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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옥(趙顯玉) 권사님의 아름다운 삶 조현옥(趙顯玉) 권사님의 아름다운 삶 - 그분의 나누고 베푸는 삶에 고개를 숙이며 - 글 · 남상학 * 조현옥 권사님(가운데), 우측은 임영수 목사님 * “이제 다 정리하고 내려갑니다. 고마웠습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살던 아파트의 세간을 사위가 다 정리해 줘서 이제 홀가분한 몸으로 제주도로 내려간다는 전갈이었다. 조 권사님은 아들이 시작한 사업이 사기를 당하여 부도가 나게 되자 급전이 필요하게 된 것을 알고 아들을 위하여 살던 아파트마저 정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평생을 지니고 살던 가구들을 정리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 가구는 고가의 물건이어서가 아니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평생 자식처럼 애지중지 아끼고 사랑하여 손때가 묻은 것들이었다. 자리를 차지하는 소파, 식탁, 침대, 자개.. 2011. 7. 14.
장기천 감독에 대한 회고, ‘혜강(惠江)’이라는 호(號)를 주신 분 장기천 감독에 대한 회고 ‘혜강(惠江)’이라는 호(號)를 주신 분 글 · 남상학 1991년 나는 평소 존경하는 장기천 목사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당시 목사님은 대한감리회 감독회장을 지내시고 동대문교회에서 시무하시고 계실 때였다. 편지는 내가 두 번째 시집인 「하늘을 꿈꾸는 새」를 출판하여 보내드린 것에 대한 답신이었다. 남상학 시인에게 나는 당신이 말하는 ‘나는’에서 다시 나 자신을 찾게 됩니다. 나는 당신이 번뇌하는 ‘빌라도의 기도’에서 오늘의 가야바들을 보게 됩니다. 장로님, 시인으로서, 교사로서 계속 나를 깨우쳐 주시고 나를 즐겁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리교도들 속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나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 장기천 목사 나는 목사님이 친필로 편지를 보내 주실 .. 2011. 7. 14.
화답시(和答詩), ‘진정 아름다운 사람’ 화답시(和答詩) ‘진정 아름다운 사람’ - 졸고 '마침표를 찍으며'에 대한 장경희 선생님의 화답시 - 글 · 남상학 ▲ 장경희 선생님의 '화답시' 중 일부- 시를 공부할 때 우리는 가끔 화답시를 발견한다. 일찍이 중국 송대 시인들은 정규적으로 모임을 갖고 한 주제나 글자를 미리 정해 놓고 번갈아 가며 화답하는 형식으로 시를 지어 불렀고, 우리 시에도 화답하는 형태의 시를 가끔 찾아볼 수 있다. 고려 말 이방원의 에 대한 정몽주의 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시를 통하여 화답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전했다. 정도전과 함께 아버지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왕조를 열고자 한 이방원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고려 말의 학자요 충신인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를 불렀다. 그러자 .. 2011. 7. 13.
비움과 떠남의 미학(美學) 비움과 떠남의 미학(美學) 글 · 남상학 떠난다는 것은 단지 공간이나 시간의 이동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신적인 것이다. 삶의 자리에서 안일에 매몰되지 않는 것, 악습이나 구태와 결별하는 것, 과욕과 집착을 버리는 것,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 이런 것들은 떠남의 본질이다. 한국시사에서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 미학을 선보인 시인 이형기 씨는 에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 격정을 인내한 /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 지금은 가야 할 때”라고 노래했다. 가야 하는 낙화에게는 아쉬움이 없을 리 없다. 이별은 등 뒤를 허전하게 만들고, 며칠 눈물을 돌게 할 것이다. 그러나 미련 없이 돌아.. 2011. 7. 13.
나의 시(詩)를 말한다, 절대 가치에 대한 추구와 갈망 나의 시(詩)를 말한다 절대 가치에 대한 추구와 갈망 글 · 남상학 첫 시집 〈가장 낮은 목소리로>를 비롯하여 시집 5권에 수록된 나의 시는 기독교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어렸을 적부터 의심 없이 믿어 온 하나님의 존재가 내 생각과 감정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출석할 때에는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갔으나, 점차 철이 들면서 인간의 삶이란 결국 목표를 지향하는 상대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쳐, 내가 믿고 신앙하는 기독교의 대상이야말로 지상(至上)의 가치, 최고의 진실, 최상의 순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고, 따라서 나 자신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서, 그 자체가 내 삶의 의미요 보람이라는 생각하게 .. 2011. 7. 13.
나의 '서시(序詩)' 두 편에 담긴 의미, 나의 '서시(序詩)' 두 편에 담긴 의미 - 시 '기도'와 '자화상'의 분석 - 글 · 남상학 흔히 '서시'란 시집에서 머리말에 해당하는 시로 전 작품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암시한다. 윤동주의 서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과로와 했다”는 것도 자신의 시, 자신의 삶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전 생애에 걸쳐서 철저하게 양심 앞에 정직하고자 했던, 젊은이로서의 내적 번민과 의지를 보여 준다. 이처럼 나는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하면서 두 권에 서시를 올렸다. 첫 시집 「가장 낮은 목소리로」의 서시는 였다. 검은 그림자를 몰아내었습니다. 간밤 내 흘린 눈물이 영롱한 이슬로 맺혔습니다. 이 허전한 들판에 화사한 햇빛을 부어 주십시오. 연기처럼 보드라운 푸른 옷깃.. 2011. 7. 13.
50대, 늦깎기로 시인의 길에 들어서다 50대, 늦깎기로 시인의 길에 들어서다. 글 · 남상학 ▲『크리스챤신문사』 창간 34주년 신인문예상 공모에서 신인상 수상 고등학교 시절 교내 백일장이 열리면 나는 시를 쓰거나 수필을 쓰거나 항상 입상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주위에서는 글재주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해 주었고, 그럴 때마다 앞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대학에 입학할 때 국어국문학과를 지망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서는 어떤 분야를 전공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크게 고민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대학에서 이수해야 하는 교과과정은 크게 국어학과 국문학으로 나뉘고, 그것도 여러 학문분야로 갈라져 있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국문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장르별로 이수과목이 잡다해서 대학의 공부는 여러 분야에 걸쳐 골고루 공부하는.. 2011. 7. 13.
남이섬에서의 알몸 불고기 파티 남이섬에서의 알몸 불고기 파티 긴 장맛비에 낭만의 꿈은 사라지고··· 글 · 남상학 1972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방학 중이라 해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방과 후 학교처럼 보충수업이 있을 때였다. 찌는 듯한 더위, 냉방 시설도 없는 교실에서 50여 명의 학생들과 수업을 한다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이 때 기발한 발상을 하기로 정평이 난, 같은 교과의 김희보 선생이 나에게 제의를 해왔다. 보충수업이 끝나는 날, 남이섬으로 단 둘이 낭만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모든 준비는 자신이 다 하겠다는 것이다. 마침 보름날이고 하니 달 밝은 밤, 남이섬의 푸른 잔디밭에 앉아 숯불에 불고기를 구우며 파티를 하자는 제법 낭만적(?)인 계획이었다. 나는 여름 더위에 지친 피로도 풀 겸 멋진 하룻밤의 낭만을 연상하며 흔.. 2011. 7. 13.
미주 LA지역, 시카고 지역,‘숭의동문회’ 순방 미주지역 ‘숭의동문회’ 순방 미주 LA지역, 시카고 지역 방문기 글 ·남상학 ▲ LA 숭의동문모임 총회를 마치고 기념 촬영 2003년 재미 숭의동문회의 초청을 받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재미 남가주숭의동창회와 시카고숭의동창회는 그 동안 미주지역동문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의미로 퇴임에 즈음하여 남가주(LA) 숭의동문회 총회에 맞춰 우리 부부를 초청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해 숭의 개교 100주년 행사에 미주지역 동창들이 대거 참가하는 것이 계획되어 있어서 아내 대신 후임 유재영 교장과 동행했다. 해외 동문과의 원활한 협력을 위해서는 후임 교장과 미리 상견례를 하는 것이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비행기 창문의 차단막을 올리니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LA공항은 미국 서해안 최대의 .. 2011. 7. 13.
이신덕 장학회 설립과 숭의 동문회 회지 '빛보라' 간행 이신덕 장학회 설립과 숭의 동문회 회지 '빛보라' 간행 글 · 남상학 숭의(崇義) 재건의 어머니요 송죽원(松竹園) 어린이의 인자한 할머니 그는 참으로 진정한 교육자요 주(主)의 신실한 종이었다. - 고 이신덕 교장 '비문' 2003년은 숭의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숭의는 구한말 개화기에 시대적 요청과 선교를 목적으로 사무엘 마펫( Samuel. A. Moffett : 한국명 마포삼열)에 의해 평양에서 세워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33)”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하여 ‘의(義)를 숭상하는 학교’라는 교명으로 출발했다. 전국 각지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신학문에 대한 향학열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제의 강점으.. 2011. 7. 13.
재직 중에 겪은 몇 가지 시련 재직 중에 겪은 몇 가지 시련 - 시련은 시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위한 연단의 기회였다. 글 · 남상학 * 윤순희 이사장으로부터 퇴임 축하패를 받는 장면 나는 33년 6개월 숭의에서 근무하는 동안 몇 차례 시련을 겪었다. 첫 번째는 1985년 3월 초 학교가 재정 사고를 일으켜 부도가 발생한 것이다. 내가 교감으로 재직할 때였다. 당시 법인 사무국장을 겸임하고 있던 송화(宋樺) 교장은 재정 위기가 발생할 것을 예감하고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84년 12월 22일부로 나를 명목상 교장 직무대리로 발령했다. 그리고 다음해 2월 28일, 교장은 나를 불러 새학년도 개학식과 입학식을 맡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이유를 물은즉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바로 그 날 나는 퇴근하면서 석.. 2011. 7. 13.
교육, 어렵지만 보석을 캐는 작업 교육, 어렵지만 보석을 캐는 작업 글 · 남상학 어딘가에서 반짝일 보석을 위하여 지불한 내 인생, 그 보석으로 하여 나는 늘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 학생대표로부터 꽃다발을 받는 장면 * 김정환의 『한국교육이야기 백 가지』라는 책에는 교직에는 네 가지 슬픔이 있다고 했다. 첫째, 전문적인 건 맞는데 전문직 대우를 받지 못한다. 둘째, 받는 돈은 겨우 집 살림을 꾸려갈 정도다. 셋째, 노력한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아 성취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넷째, 열심히 가르쳐 봐야 입신출세와는 애당초 거리가 멀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교직은 그리 선호할 직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교직을 내 적성에도 맞고, 그만큼 보람과 가치가 있는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주저하지 않고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했다... 2011. 7. 12.
숭의 36년, 교사의 길 숭의 36년, 교사의 길 글 · 남상학 몇 차례에 걸쳐 재단이 바뀌는 와중에서도 재단의 어른들은 나를 학교의 관리 경영 책임자로서 신임해 주셨다. 편협한 교단 위주의 사고가 만연된 우리의 현실에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음에도 하나님은 나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2002년 8월 나는 천직으로 여기던 교육의 길을 마감했다. 20대 후반 교사가 된지 35년 6개월만이다. 숭실고등학교에서 근무한 1년을 빼면 모두 숭의에서 지낸 시간들이었다. 교직을 선택하면서 나는 기독교 학교에서 교사의 꿈을 펼치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희망대로 미션스쿨인 숭실고등학교과 숭의여자 중고등학교에서 꿈을 펼칠 수 있게 하셨다. 교사로 첫발을 내디딘 숭실고등학교에서는 2학년 국어를 맡아 가르쳤고, 문예반 지도교사로 대천해수.. 2011. 7. 12.
‘내 탓이오’를 실천한 교육자, 전상운(全相運) 선생님 나를 키워주신 스승님 ‘내 탓이오’를 실천한 교육자, 전상운(全相運) 선생님 글 · 남상학 선생님은 일찍이 투철한 신앙을 가진 양심가로서 교육현장에서 ‘내 탓이오’ 정신을 실천한 선구적 교육자였다. 그가 보여준 행동은 가치관을 형성할 나이에 내게는 큰 사건과도 같았다. * 최근 어느 일간신문의 기사에서 따온 전상운 선생님 사진 * 고등학교 시절 나는 전상운 선생님으로부터 화학과 독일어를 배웠다. 1928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한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충주고등학교를 거쳐 제천고등학교에 부임하셨던 것이다. 그 당시 지방학교는 교사 수급에 문제가 많아서 선생님은 본래 과학(화학) 교사였지만, 독일어 교과까지 맡으셨던 것이었다. 우리 학교에 부임하신 선생님은 총각 선생님이셨고, 훤칠한 키에 시.. 2011. 7. 8.
강직과 청렴의 사표(師表), 장병환(張炳煥) 선생님 나를 키워주신 스승님 강직과 청렴의 사표(師表), 장병환(張炳煥) 선생님 글 · 남상학 특히 선생님께서는 청렴결백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몸소 실천해 오셔서 청렴과 강직한 분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인간은 만남의 연속이다. 혈연에 의하여 부모와 자식으로 만나고, 태어나서 형제와 만난다. 자라면서 친구와 만나고, 교육의 장에서 선생님을 만난다. 그리고 성장한 다음에는 평생을 같이 할 동반자를 만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만남’은 매우 중요하다. 그 만남 중에서 ‘의미 있는 만남’이 있다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공자와 안연의 만남, 예수와 베드로의 만남, 괴테와 실러의 만남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나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에 있어서도 인격과 인격의 깊은 만남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고 또 부러워한다... 2011. 7. 8.
“나 하나만이라도”의 박지견 선생님 나를 키워주신 스승님 “나 하나만이라도” 정신을 가르쳐주신 박지견(朴持堅) 선생님 글 · 남상학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수업 내용과는 상관없이 자주 “나 하나쯤이야”라는 말을 칠판에 쓰시고 역삭빠르게 살아가려는 삶의 태도를 질타하셨다. 그리고는 '나 하나만이라도' 라는 말을 그 옆에 큼직하게 써 놓으시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하셨다. * 노년의 박지견 선생님 * 누구에게나 학창시절의 추억 가운데는 잊지 못할 선생님 한 분쯤 계신다. 그분이 있어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받게 되고 추억은 더욱 빛난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박지견 선생님을 만났다. 황해도 신계 출생이시며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을 나오신 30대 중반 가까이 되셨던 선생님은 시인으로서 우리에게 국어문법을 가르치셨다. 선생님은 용모와 차.. 2011. 7. 8.
그 봄의 편지, 목련(木蓮) - 스승을 향한 제자의 편지 그 봄의 편지, 목련(木蓮) - 스승을 향한 제자의 편지 - 글 · 남상학 어느 해 봄, 나는 엽서 한 장을 받았다.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 호된 시련을 겪고 대학에 입학한 후에 보낸 것이었다. 엽서에는 단아한 글씨로 쓴 4행의 글이 전부였다.'교정 곳곳에/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제법 두툼한 편지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었다. 따뜻한 바람 불어오고, 햇빛 빛나고, 목련은, 발끝으로 서서, 하늘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손을 흔들며 춤추는, 춤을 추는 무희(舞姬)와도 같습니다. 손짓을 할 때마다 흰 잎이 하나, 둘, 떨어져 쌓입니다. 가슴 미어지도록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선생님께 이 춤추는 목련의 참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보여드릴 수 있다면...... 나는 편지를 읽어 .. 2011. 7. 8.
해당화꽃, 너는 내게 불붙는 꽃이었다. 해당화꽃, 넌 내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다. 글 · 남상학 해당화 꽃에 대해 전해지는 전설이 하나 있다. 당나라 현종은 어느 날 심향정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평소에 지극히 사랑하는 양귀비를 불렀다. 이 때 양귀비는 지난밤에 마신 술이 깨지 않아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양귀비는 황제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어서 황급히 나가기는 했지만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옥같이 흰 얼굴은 불그레한 홍조가 곱게 피어 있고, 두 눈은 가느다랗게 떴고, 몇 가닥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에 나부끼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예쁘기만 했다. 현종은 한 동안 양귀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양귀비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아직도 술에 취해 있느냐?” 그러자 양귀비는 “해당화의 잠이 아직 깨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양.. 2011. 7. 1.
경아의 지극한 정성 - 전남 해남에서 미국 산마리노까지 경아의 지극한 정성 - 전라남도 해남에서 미국 산마리노까지 글 · 남상학 ▲경아의 초청으로 방문한 헌팅턴 박물관 2005년, 내가 미국 서부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미국에 이민 가서 LA 근교 산마리노(San Marino City)에 살고 있는 경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국 도착 일정과 여행 계획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메일로 알려줬더니 다시 연락이 왔다. 일정을 하루나 이틀 정도 앞당길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고 주변 지역의 여행을 돕고 싶은데 문제는 자기의 한국 방문 일정과 공교롭게 겹친다는 것이었다. 경아는 내가 LA에 도착하는 날 아침, LA공항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내외는 당시 미국 동부.. 2011. 7. 1.
호된 죄값을 치른 제부도 여행 호된 죄값을 치른 제부도 여행 글 · 남상학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제부도로 처음 여행을 간 것은 1973년이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나는 가깝게 지내던 영어과 지승일 선생님으로부터 제부도 여행에 대한 제안을 받았다. 여름방학 보충수업이 끝나면 고3여학생 두 명과 함께 제부도로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받고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성숙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들과의 사적인 여행은 누가 봐도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고, 또 괜한 일로 좋지 않은 소문이라도 퍼지면 무슨 말로 어떻게 변명을 할 것이며, 결혼한 지 몇 년 안 된 내 아내에게는 무어라 말할 것인가? 그랬더니 이들은 꼭 나를 동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학교 시절 내가 한번 담임을 한 적이 있었고,.. 2011. 6. 30.
스승의 날의 흑장미 스승의 날의 흑장미 글 ˙ 남상학 어느 해 스승의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찍 출근해 보니 흑장미 한 송이가 내 책상위에 놓여 있었다. 그 흑장미는 자태와 색깔과 향기에 있어서 다른 어느 것과 비교가 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매혹적이며 고혹적인 매력을 지녔다고나 할까? 아무튼 나는 그처럼 탐스럽고 색깔과 향기가 뛰어난 장미를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 동안 내가 보아온 장미는 흰색, 하얀색, 핑크색, 노란색 등 다양하지만, 이처럼 짙은 보라색깔의 장미는 본 적이 없다. 꽃잎이 붉은 장미보다는 검은 색을 띄기 때문에 적자색(赤紫色, Black Rose)을 띄는 흑장미는 품격과 향기면에서 대중적인 장미보다는 크게 돋보였다. 이런 귀한 꽃을 어디서 구했으며, 누가 이 꽃을 갖다 .. 2011. 6. 29.
행복했던 군(軍) 생활 행복했던 군(軍) 생활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장교보직처 포병기갑과 근무 - 글 · 남상학 * 육군본부 근무 시절의 포병기갑과 동료들과 함께 (앞줄 우측이 본인)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이것은 우리나라 대표군가 가사의 일부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노래를 모르는 이가 없다. 군가이면서도 누구나 힘들 때 부르면 힘이 나는 그런 노래다. 현역 생활을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전역한 사람은 호호백발이 된 뒤에도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흥얼거린다. 국방의 의무는 교육, 근로, 납세의 의무와 함께 국민의 4대 의무에 속하므로 대한민국 남아들은 누구나 일정한 나이가 되면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키는 병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런데도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병역.. 2011. 6. 27.
<졸업기념 수필> 피날레의 지점에서 -사랑하는 젊은 R에게 피날레의 지점에서 - 사랑하는 젊은 R에게 - 글 · 남상학 R! 4년 전, 내가 1학년이 되던 해 봄철이었습니다.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되지 않지만 그 프랑스 영화에는 ‘추억을 파는 노점(露店)’이 있어서 젊었을 때의 추억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을 보고 참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흘러간 것들에 집착을 하지 않으면서 현재라는 상황만을 응시하며 현실의 장벽과 싸워가던 주인공, 그에게는 젊음의 용기와 투쟁과 모험만이 내일의 비전을 향해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고뇌의 역정(歷程)을 거친 뒤 노년에 이르러서는 센 강변에 자리 잡은 ‘추억을 파는 노점’에서 젊음의 추억을 고가(高價)로 매입하면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습니다. 「Youth is beautiful it's not eternal; N.. 2011. 6. 27.
<평론> 한국적 허무주의(虛無主義)의 고찰 한국적 허무주의(虛無主義)의 고찰 - 조병화의 를 중심으로 - 글 · 남상학 1. 서구에 있어서 니힐리즘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무 것도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알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을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의 이 말은 현대에 이르러 니힐을 느끼는 인간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살려고 하는 의지를 부정하고 인생은 허무하다. 생의 가치를 갖지 않았다"고 주장케 했다. 그들이 오랫동안 생활 이념과 가치 기준으로 삼아온 그리스도교 모럴은 '신의 추방(追放)'으로 상실되어 버렸고, 이성을 신주처럼 모시던 근대인은 과학 문명의 위협과 인간능력의 유한성 앞에 .. 2011. 6. 27.
<평론> 현대적 징후(徵候)와 전환의식(轉換意識) 현대적 징후(徵候)와 전환 의식(轉換意識) - 사상의 전환기에 서서 - 글 · 남상학 "여기엔 물이 없고 바위뿐 바위만 있고 물 없는 모래밭 길" -T.S 엘리어트 ‘황무지’에서 혼란과 무질서의 황야! 여기 황량한 지역에 비참한 경영을 지속하는 현대인은 ‘무상(無償)의 방황’이 아니면 ‘공허한 도로(徒勞)’란 제목의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조명 아래서 절대적 가치도 없는, 현대 문명이 던져준 뉴앙스의 주제들. 그리하여 저 트래지디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우리는 데카다니즘을, 니힐리즘을, 패시미즘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까뮈)는 근대적 지성의 무리들은 천부의 선택과 결단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저 만공(滿空)에 휘날리는 깃발처럼 벽을 대결하는 의.. 2011. 6. 27.
대학시절 논문 당선, 조병화(趙炳華)의 시집 『밤의 이야기』를 분석한 평론으로 대학시절, 신진 논문 당선 조병화(趙炳華)의 시집 『밤의 이야기』를 분석한 평론이 당선되다 글 · 남상학 내가 대학을 다니던 60년대는 실존주의 사상이 전 세계를 풍미하던 때였다. 그래서 대학생이라면 실존주의 작품 하나쯤은 겨드랑이에 끼고 다녀야만 행세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실 실존주의가 어떤 것이며,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온 것이며, 인간의 생활을 특정짓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이 그저 맹목적인 현상이었다. 실존주의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허무하고 부조리한 세계 속에 실존하고 있으며, 자기가 스스로를 정립하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보는 철학 또는 문학상의 입장이나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이 등장하게 된 데는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2011. 6. 27.
꽃 피우지 못한 승마의 꿈 꽃 피우지 못한 승마의 꿈 글 · 남상학 나는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에 문교부(지금의 교육과학기술부)가 운영하는 특수체육과정 의 하나인 승마훈련에 참가했다. 젊은이들의 체력을 증진시키고 능력과 취미를 습득시킨다는 취지에서 시행한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이 훈련에 지원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 ‘석양의 무법자’ ‘황야의 7인’ ‘OK목장의 결투’ 같은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영화의 주인공들은 허리춤에 총자루를 차고 말을 타고 바람 먼지를 가르며 황야를 질주했고, 나는 그런 장면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도 저렇게 말을 타고 달려보았으면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승마훈련장은 다행히 집에서 가까운 뚝섬경마장이었다. 오전반, 오후반 모두 50명의 지원자들은 승마복을 차려입은 교관들에 의하여 매일.. 2011. 6. 27.
복사꽃 추억 복사꽃 추억 글 · 남상학 "화창한 봄날 오후, 마지막 강의가 폐강된 날 나는 그녀와 함께 세검정 행 버스를 탔다. 누가 먼저 제안할 것도 없이 무르익은 봄기운을 만끽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녀의 부음(訃音)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인연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녀는 내 추억 속에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학원문학상을 수상하여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키가 크고 목이 길어 노천명의 의 한 구절을 연상시켰다.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던 그녀는 기독학생회에 출석하면서 나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화창한 봄날 오후, 마지막 강의가 폐강된 날 나는 그녀와 함께 세검정 행 버스를 탔다. 누가 먼저 제안할 것도 없이 무르익은 봄기운을 만끽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덜컹거리는 만원 버스 안.. 2011. 6. 27.
질풍노도(疾風怒濤)의 계절,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정변 ● 나의 대학시절 질풍노도(疾風怒濤)의 계절 -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정변의 소용돌이 글 · 남상학 "내 대학시절은 질풍노도의 계절이었다. 나는 1960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대학생활의 시작은 큰 포부와 기대로 부풀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대학이란 요람 속에서 안이하게 꿈을 펼 수 없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내 대학시절은 질풍노도의 계절이었다. 나는 1960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대학생활의 시작은 큰 포부와 기대로 부풀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대학이란 요람 속에서 안이하게 꿈을 펼 수 없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꾀하면서 온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사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센 항의 시위를 .. 2011. 6. 27.
나의 제천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 나의 중·고교 시절 나의 제천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글 · 남 상 학 *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가운데), 왼쪽은 박태남, 오른쪽은 이길섭 * 중학교 입학은 기적처럼 찾아왔다. 피난지 영흥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영월중학교에 입학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열과 누님 덕분이었다. 육지로 나온 뒤 누님이 영월 봉래초등학교 교사로 잠시 근무하고 있을 때, 나는 중학교에 가고 싶어 초등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1953년 영월 봉래초등학교 6학년 2학기에 재입학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까지 1년 좀 넘게 공백기가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를 다시 다니고 졸업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초등학교에서 한 학기를 다니고 이듬해 졸.. 2011. 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