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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나의 시(詩)를 말한다, 절대 가치에 대한 추구와 갈망

by 혜강(惠江) 2011. 7. 13.

 

나의 시(詩)를 말한다

 

 절대 가치에 대한 추구와 갈망

 

 

글 · 남상학

 

 

 

 

 

  첫 시집 〈가장 낮은 목소리로>를 비롯하여 시집 5권에 수록된 나의 시는 기독교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어렸을 적부터 의심 없이 믿어 온 하나님의 존재가 내 생각과 감정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출석할 때에는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갔으나, 점차 철이 들면서 인간의 삶이란 결국 목표를 지향하는 상대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쳐, 내가 믿고 신앙하는 기독교의 대상이야말로 지상(至上)의 가치, 최고의 진실, 최상의 순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고, 따라서 나 자신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서, 그 자체가 내 삶의 의미요 보람이라는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나의 시가 추구하는 대상에 대한 추구와 갈망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끊임없이 ‘영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표현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나의 시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보석’ ‘진주' ‘빛’ ‘별’ ‘불’ ‘불씨’ 등의 언어들은 절대적 대상의 비유어로 채택된 것이었고, 그 색깔인 ‘피’ ‘금빛’ 그리고 그 발광체로서의 ‘해’ 혹은 ‘별’ 또한 그 대상이 변주되어 표현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1) 눈물 되어 빛나는 보석(寶石)을 보게 하소서 (나목)
(2) 영롱한 진주(眞)를 키워내는
      비밀스런/모래섬을 보았는가(바다의 꿈) 
(3) 빛은 영원(永遠) 안에 있고 
      그 빛 속에 소중한 생명(生命)은(새해의 기도) 
(4) 찬란한 빛보라의 아침을 
      다시 열어가야 하리(아침의 기도 2) 
(5) 밤이면 밤마다 
      별들이 알을 까는 숲(나에겐 숲이 있었네)
(6) 사랑의 산 불꽃이여 (부활의 그리스도) 
(7) 어둠을 밝히는 
     작은 불씨 가슴에 안고 (평화의 왕으로 오십시오) 
(8) 명멸(明滅)하는 별빛이 
     이 밤, 조용히 숨죽여 눈을 뜨는가 (무인도)
 


  그리고 개인적인 사정이지만 ‘영원’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은 나의 시에 있어 ‘하늘’ 이외에 흔히 ‘바다’라는 대상을 통하여 형상화되는 때가 많았다. 그 까닭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바다를 호흡해 왔고, 유년기의 대부분의 체험이 바다와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바다’는 나 자신의 중요한 체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따지고 보면 그 ‘바다’라고 하는 것이 인류사의 원형, 시원적인 것으로서 개인 체험 이전의 존재라고 믿어지는 이유에서 어쩌면 내가 추구하는 정신세계와 그 맥을 같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나의 글 속에는 바다의 심상이 적지 않게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 당신은 수평선 너머 
     출렁이는 파도를 거느리고(그 때 당신은) 
(2) 돌이어라 나는 
     파도가 출렁이는 바닷가에 앉아(돌) 
(3) 바다에 오면 
     바다는 늘 낮아지라 이르시네.(바다에 오면) 
(4) 출렁이는 
     절대(絶對)의 바다 
     천 길 바다 속 영원을 
     꿈꾸는 소라여, (소라의 꿈)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표인 인간 구원에 대한 나의 절대적 확신은 어둠과 절망 속에서도 ‘밝음’과 ‘소망’이라는 희망적 세계관으로 내 삶의 방향을 고정시켜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나의 특별한 사상 체계는 시를 씀에 있어서, 주제를 설정하거나 자연 현상을 포함한 모든 대상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소재를 선택하거나, 언어를 다루는 면에 있어서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 사월은 
     고난(苦難)의 땅, 피 흘린 대지에도 
      마음 갈아입고 
      우리를 다시 피어나게 하나이다(우리들의 사월) 
(2) 가파른 언덕을 땀 흘리며 오르는 
      나의 사람아, 그래도 하늘을 보자 
      설레이는 별들 물 어린 눈을 뜨면 
      대숲의 나무들은 새벽안개를 걷어내고 
      기적을 기다리는 빛나는 눈동자로 
      영롱한 아침 무지개를 세우리라 (대숲의 나무들은) 
(3) 진실은 가쁜 숨결 속에서 자라가는 것 
      불씨는 수북한 잿더미 속에서 살아나는 것 
      무릎 꿇은, 불빛 없는 어둠의 방(房) 
      기진한 겨울밤이 깊어갈 때 
      핏빛 동백은 피어나리라! 
      피어나리라! (동백은 어둔 밤에도) 
  

       
   누구든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비록 지금의 현실이 가파르고, 그래서 고달픈 자리에 있다고 느낄지라도 내일에의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골고다 언덕의 고난은 바로 부활의 새벽으로 이어지고, 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내세에의 희망을 가지도록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를 쓰면서도 시 자체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늘 한없는 은총 속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며, 모든 대상을 아름답게 보고 싶어 했고, 긴 터널의 어둠과 같은 괴로움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밝음’을 노래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문제는 절대가치에 대한 추구와 갈망은 그렇게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추구하는 대상이 손쉽게 잡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육신의 옷을 입고 현실에 부대끼다 어느 순간 돌아보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본연의 자세에서 크게 일탈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 소스라치는 때가 참으로 많았다. 그런가 하면 내 속에 있는 두 개의 세력,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할 때도 많았다. 따라서 절대가치에 대한 추구와 갈망은 키에르케고르가 지적한 대로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1)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눈물로 따라갔지만 
       나의 발길은 마냥 그 자리 
       아아, 꿈속에서도 부둥켜안고 
       불러보는 이름
       그대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힐 수가 없다.(그대와의 거리) 

(2) 묻어나는 살점, 선연한 핏자국
      부끄러운 삶의 비린내가 사방으로 퍼진다. 
      육신을 얽어매는 덫의 가시여,
      끝내 영혼마저 탈진하여 스러지고
      막다른 골목에서 나는 항복한다. 
      풀어낼 수 없는 가위눌림
      나는 좀처럼 일어설 수가 없다.(벌판에 홀로)


   그러면 나는 예외 없이 나의 영혼이 폐허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빈 영혼의 충일을 위하여 긴 목마름에 닿을 수밖에 없게 되어, 꽤 오랫동안 무릎 꿇고 아픔의 시간들을 견디어야만 했다. 이 나의 아프고 간절한 부름과 호소는 한 토막의 절규이기도 하고, 한편의 안타까운 기도시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목마름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고 사랑이며, 동시에 나 자신을 내리치는 참회의 채찍이기도 했다. 


(1) 쓸쓸히 풍화하는 영혼의 통곡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앉아 
     예인(曳引)을 기다리며
     밤새 목쉰 소리, 통성기도로 눈을 떴다.(어둠 속에 앉아)

 (2)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에
     깔끔한 입맛처럼 새벽이 찾아올 때 
     붉은 살점 같은 장미 몇 송이 들고
     눈부신 햇살로 그대는 걸어올까(창가에 비가 내린다)     

(3) 그날 감람산 겟세마네 칠흑의 밤에 
      피땀 흘려 우시던 당신 모습 뵈오며
      오늘은 산처럼 돌아앉은 당신의 침묵 앞에 
      아픈 가슴 뜯으며 내가 우노니(탕자탄)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나의 중요한 정신세계를 이루고 있다 하여 나는 도식적(圖式的)으로 내 사상과 감정을 표출하고자 애쓴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정신세계는 시를 쓰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의 사상과 감정으로 정제되어 저절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목적적이며 작위적인 소산이 아니라 신앙적인 삶의 자연스런 필연적 산물일 뿐이며, 꾸밈없는 삶 자체의 고백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세월이 꺾이면서 삶의 여정에 있어서 종착지를 찾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즐겨 표현했다. 긴 여정의 고달픈 여정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방황을 끝내고 영원한 안식을 찾아가는 귀향의 몸짓이라고나 할까. 누구인들 인자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고향은 있듯이, 내 시적 여정의 귀착지는 결국 피곤한 몸 기댈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 출렁거리는 물결 따라 가 닿아야 할 곳 영원의 기슭일 수밖에 없었다.

 

(1) 이제 살아 있는 날은 / 긴 방황을 끝내고
     유순한 영혼으로 돌아와 
     당신의 문 앞에 서겠습니다.(살아 있는 날은)
   
(2) 어두운 시절
     애절한 노래와 꿈을 
     파도에 두둥실 실어 보내고
     출렁거리는 물결 따라 가 닿아야 할 곳
     영원의 기슭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람 부는 날이면 풍선처럼
     오늘도 내 몸 두둥실 돛을 올린다.(출항)

 (3) 버릴 것 죄다 버린 
     홀가분한 지금에서야 
     저 멀리 희미한 등불처럼
     내가 꿈꾸어 온 가야 할 길
     또 하나의 길이 
     안개 속에 보이는 듯합니다.(또 하나의 길)

 

   성서는 인간을 가리켜 “땅 위에서는 길손이요 나그네”(히브리서 11:13)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땅 위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사실(고후 5:1)을 알기 때문에, 그 영원에 대한 끝없는 향수에 젖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여, 긴 방황을 끝내고 유순한 영혼으로 돌아와 영원의 문 앞에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다. 지는 해의 아름다움처럼 절대자의 손 안에 아주 깊이 잠들고 싶다는 것, 이것이 나의 시적 귀향의 종착지임은 분명하다.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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