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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나의 '서시(序詩)' 두 편에 담긴 의미,

by 혜강(惠江) 2011. 7. 13.

  

나의 '서시(序詩)'  두 편에 담긴 의미

 

- 시  '기도'와 '자화상'의 분석 - 

 

 

글 · 남상학

 

 

 

 

 

  흔히 '서시'란 시집에서 머리말에 해당하는 시로 전 작품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암시한다. 윤동주의 서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과로와 했다”는 것도 자신의 시, 자신의 삶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전 생애에 걸쳐서 철저하게 양심 앞에 정직하고자 했던, 젊은이로서의 내적 번민과 의지를 보여 준다. 이처럼 나는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하면서 두 권에 서시를 올렸다. 첫 시집 「가장 낮은 목소리로」의 서시는 <기도>였다. 


  검은 그림자를 몰아내었습니다.
  간밤 내 흘린 눈물이 영롱한 이슬로 맺혔습니다.
  이 허전한 들판에 화사한 햇빛을 부어 주십시오.
  연기처럼 보드라운 푸른 옷깃을 주십시오.

  산천을 떠들썩하게 울리는 새들의
  지저귐을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벌레의 새파란 울음소리를
  자지러이 놓아 주십시오.

  마음에 정한 그릇을 마련하였습니다.
  투박한 작은 질그릇일지라도
  향기로운 꽃의 향내를 듬뿍 고이게 하십시오.
  붉은 꽃, 흰 꽃, 노란 꽃……
  그래서 나부시 절하는 나비를 닮게 해 주십시오.
  부지런한 꿀벌의 생활을 배우게 하십시오.

  오, 기쁨과 즐거움의 아름다운 비단 폭을
  푸른 하늘 높이 드시어
  독수리처럼 활개 치며 올라가는 
  찬미와 신앙을 주십시오. 

 

  이 서시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나의 간곡한 기도시였다. 소녀적 취향과도 같은 이 기도시는 시적 자아의 티 없는 순결과 내적 충만, 그리고 절대자를 향한 끝없는 추구와 갈망을 노래한 것이다. 나는 참된 신앙의 자세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비롯되고, 또 그분에 대한 기도는 정결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순결하고 정결한 마음을 위하여 믿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나는 회개라고 믿는다. 성서는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시편 32: 5~6)”라고 말한다. 회개는 인간의 지성, 감정, 의지 모두와 관련되는 것으로 지성과 관련해서는 “마음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고, 감정과 관련해서는 “죄를 슬퍼하는 것”을 의미하고, 의지와 관련해서는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회개하고 찾으면 하나님은 만나주실 뿐만 아니라 구하는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나는 서시 <기도>에서, 정결한 마음으로 간구하면 들판에 ‘화사한 햇빛’ ‘푸른 옷깃’ ‘새들의 지저귐’ ‘벌레의 울음’을 주시고, 질그릇 같은 내 마음에 ‘향기로운 꽃의 향내’, 즉 은혜가 있을 것이고, 나부시 절하는 나비의 겸손과 부지런히 나누는 꿀벌의 근면함으로 받은 은혜를 골고루 나누는 삶을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절대자에 대한 신앙과 경외하는 마음이 ‘독수리가 비상하듯 더욱 향상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내가 제2시집을 “「하늘을 꿈꾸는 새」”로, 제3시집을 「비상연습」으로 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아울러 제2시집 하늘을 꿈꾸는 새」에 올린, 두 번째 서시 <자화상>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 이해할 수 있다.


  하늘 우러러
  물빛 눈매를 닮은 
  학이 운다.

  아득한 간구만이 
  표적 위에 나부끼기엔
  이제 힘이 겨워
  목을 흔들어 학이 운다. 

  다가갈수록 초조해지고
  우러러 볼수록 달아나는 얼굴
  빈 공간을 휩싸고 도는 바람소리에
  아픈 울음을 삼다가도 
  
  태어날 때 배워버린
  습성 때문에 

  행여나 기다림에 가슴 조이며
  하늘에 목을 올려 
  오늘도 학이 운다.

 

  서시 <자화상> 전문이다. 이 작품에서 시적인 자아는 ‘학(鶴)’이다. 학은 독수리에 비하면 유약하기 그지없지만, 영원을 향한 끝없는 갈망은 하늘 그리움에 다리가 길어진 슬픈 학이 더 어울릴뿐더러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비추어 볼 때 내 이름자 학(鶴)과 일치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치시킨 것이다. 


 “나는 때로 학(鶴)의 꿈을 꿉니다. 힘찬 날갯짓으로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떠오르다 번번이 찢긴 나래로 제자리에 내립니다. 속세에 살면서도 창공을 꿈꾸는 천성(天性), 날개가 하얀 학은 나의 자화상입니다.  오늘도 목을 길게 늘이며 물빛 눈매를 닮은 눈은 하늘을 응시합니다.  푸른 하늘로 당신을 향해 찬란하게 비상(飛翔)할 수 있는 날을 주십시오.”

             - 찬란하게 비상할 수 있는 날을 주십시오-27
  

  하늘을 향하여 목을 길게 빼고 있는 학의 모습은 마치 영원을 향해 사랑 노래를 부르는 형상이며, 하늘 향해 비상을 준비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나의 노래는 싸늘한 벽을 맴돌다 돌아오고 뼛속으로 촉촉이 젖어드는 슬픔 앞에서 목 놓아 울음을 삼키는 것이다. 어쩌면 영원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 노래는 이루어질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숙명적으로 슬픈 존재인 것이다.  


  날으는 허공, 긴장
  아, 날으는 것의 한계
  춤추는 세월의 반복
  그리워할수록 수척해지는 몸
  가슴 조이며 애태우는 
  그대 영혼은 
  얼마만큼 가벼운 날개를 달 것인가.

     시  '갈매기'에서

 

  영원의 끝을 만지고 싶어 가파른 벼랑으로 사랑의 날갯짓을 해 보고,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눈물로 따라갔지만 나의 발길은 마냥 그 자리, 그대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질 수 없음을 노래할 수밖에 없다.(그대와의 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만치 보이는 그리움 찾아 / 새로움의 포말(泡沫)로 달려 갈 그날은 언제일까”(그 날은 언제일까) 라고 노래한다.  살아 있는 동안 하늘 향해 목을 늘이며 비상하는 것이 바로 나의 자화상인 것이다.

 

 

 

 

*출처 : 졸저 :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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