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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75

아들의 편지,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들과 자부의 편지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글 · 남상학 정년은퇴를 앞둔 어느 날, 둘째아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지를 고르고 우표를 붙이는 번거로움을 피해, 젊은 사람답게 내 홈페이지 방명록에 살며시 올려놓은 편지였다. 비록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인터넷 공간에 올려놓은 일종의 공개편지였지만, 다른 어떤 사람이 올려놓은 그 어떤 글보다 반가웠다. 대기업에 취직하여 밤늦게까지 일하다 야심한 시간에 퇴근하는 아들인데 제법 길게 써내려간 글에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진한 감사가 배어 있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로 시작된 편지에는 “아버지의 정년퇴임을 맞이하며 그동안 마음속 깊이 하고 싶었던 말, 그렇지만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해드린다”며, 자신을 위해 애썼던 일, 가족간의 아름다.. 2011. 6. 27.
다섯 손자 ·손녀 이야기 다섯 손자 · 손녀 이야기 글 · 남 상 학 "언제까지 이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때는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점점 험악해지고 삶은 그만큼 험난할 것이 분명한데, 우리 아이들이 세상의 지식에 급급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 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침잠을 깨어 창밖을 보니 펑펑 눈이 쏟아진다. 순간 대치동 대현초등학교 1학년인 손녀 지연이와 같은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 다니는 가연이의 등교 길이 걱정된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차의 왕래가 빈번한 대로를 건너 언덕길로 15분쯤 걸어 올라가야 하므로 길이 미끄러울 것이 분명하다. 아이들의 등굣길이 불안하여 나는 아이들이 입학하는 날부터 매일 아침 승용차로 등교.. 2011. 6. 27.
기도로 얻은 선물, 남기찬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선물, 남기찬 글 · 남 상 학 “아버지, 그 이름은 태어날 우리 아들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것으로 믿고, 저의 부부가 이름을 지어놓고 그 이름으로 감사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2008년 11월 30일(주일) 저녁 18시, 삼성동 소재 호텔 뷔페에서 손자 기찬이의 돌잔치가 열렸다. 친가, 외가 친척들과 아빠․엄마의 친구들이 모였다. 태어난 날에 맞춰 돌잔치를 하려면 12월 10일에 맞춰야 하는데, 송년회 등 각종 연말모임이 몰려 장소를 구하기가 어렵고, 주중에는 모두 일에 매달리는 형편이어서 부득이 날짜를 앞당긴 것이다. 우리는 기찬이가 태어나서 1년 동안 찍은 사진으로 장식된 복도를 지나 별실로 들어갔다. 어찌 보면 아이의 돌을 축하하는 모임이 요란스러운 것처럼 보일 수 있으.. 2011. 6. 27.
자녀교육을 어떻게 했냐구요? - 밥상머리 교육과 가족여행 자녀교육을 어떻게 했냐구요? - 밥상머리 교육과 가족여행 - 글 · 남 상 학 "우리도 부모 자식이 한 상에 앉아 식사를 나누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된다면 자녀교육은 저절로 이루어 질 것이라 믿는다. " 어느 해인가 교회에서 개최한 젊은 엄마들의 가정교육 세미나에서 ‘가정에서 자녀교육을 어떻게 시켰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또 두 아들을 잘 키운 것으로 생각하여 별다른 자녀교육의 비법(秘法)을 알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학교 교사일 뿐, 두 자녀의 가정교육에는 별로 신경을 쓴 일이 없어서 그냥 ‘하나님이 키워주셨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무성의한 것처럼 들렸는지 구체적으로 답변해 달라고 재차.. 2011. 6. 27.
아내의 빨래 아내의 빨래 글 · 남 상 학 "아내는 우리 가족 모두가 바른 심성과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일깨워주는 일에 누구보다도 예민했다." 어느 날 아내가 대학 동창 모임에 나갔다 돌아와서 “창피해서 혼났다”며 투덜거렸다. 한 친구가 자기를 가리켜 “너는 빨래를 잘 한다며?” “네가 얼마나 빨래를 열심히 하면 네 남편이 ‘아내의 빨래’라는 글을 썼겠느냐”고 놀리더라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내 시집에서 라는 글을 읽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친구가 말은 바로 했네.’ 라고 말하고 피식 웃은 적이 있었다. 내 아내는 천성이 부지런했다. 자기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뒤로 미루거나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다.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완벽에 가깝도록 노력하는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무학여고를 졸업할 때까.. 2011. 6. 27.
아내를 위한 소묘(素描) 아내를 위한 소묘(素描) 글 · 남 상 학 "유난히 추운 이 겨울, 단 하루만이라도 아내의 손을 설거지통에서 빼내어 거품이 퐁퐁 올라오는 기포탕에 담가주어야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다." 결혼한 지 40년이 지났으니 세월은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60년대 끝자락에서 난 아내를 맞이했다. 객관적인 면에서 보면 도저히 내 아내가 될 수 없는 사람을 아내로 맞이했다. 큰 느티나무 그늘 같은 아내의 가정은 그 그늘에 많은 친척들을 불러 모을 만큼 넉넉했다. 그런 가정에서 곱게 성장한 처녀가 부모 없고 의지가지없는 나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요 축복이었다. 장인어른 되시는 이석재(李奭載) 어른은 성경린 씨 등과 함께 1926년 4월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3기생으로 입학하여 1931년에 졸.. 2011. 6. 27.
내 혈통의 뿌리, 의령남씨 충경공 자손 설애공파 내 혈통의 뿌리 - 의령남씨 충경공 자손 설애공파 - 글 · 남 상 학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와 뿌리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나는 중학교 시절 사회 선생님의 영향으로 비로소 ‘존재와 뿌리’에 대한 자각을 갖게 되었는데 내 주변에는 이러한 나의 관심사에 대하여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분이 계시지 않았다. 보통 뿌리교육은 뜻있는 집안 어른이 맡아서 하기 마련인데,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뿌리 교육을 받을 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늦게 기회가 찾아왔다. 학생 시절 집안 선산이 있는 아산 온양에 가면, 그곳에 사시는 여섯째할아버지께서 집안의 가계(家系)에 대하여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손수 만드신 “세계(世系)”를 교재로 혈통에 대하여 교육을 받을 수.. 2011. 6. 27.
부모님 묘의 이전 합장과 정리 부모님 묘의 합장과 정리 글 남상학 "나무와 나무 위로 높은 하늘 아래 보고 싶은 얼굴 언젠가는 만나 보리라 지그시 눈을 감네." 2004년 4월 2일 아산시 기산동, 선산 묘역은 봄이라지만 아침공기는 쌀쌀했다. 우리 형제는 부모님의 합장묘 앞에서 할 말을 잊고 있었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산소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친척 중 하나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선산을 통째로 팔아넘김으로써 선조들과 그 후손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겨주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사촌형님은 타인에게 넘어간 땅을 되찾기 위해 생업을 제쳐놓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뒤로 두어 차례 명의가 바뀌고 새로운 매입자가 개발을 목적으로 산소의 이장을 요구해 온 것이다. 위로는 고조할아버지로부터 .. 2011. 6. 27.
영흥도, 그 아픔의 세월 영흥도, 그 아픔의 세월 - 그것이 가슴 저린 내 그리움일 줄이야 글 · 남 상 학 * 영흥도 진두 갯벌 * 나는 기분이 울적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서해의 작은 섬 영흥도(永興島)를 찾는다. 영흥도는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인천에서 뱃길로 1시간이나 떨어진 외로운 섬이었다. 그러나 2001년 선재도와 영흥도 간의 연육교인 영흥대교가 개통되면서 뭍과 이어졌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이 섬을 드나들었던 사람들에게 영흥대교의 개통은 감격과 환희 그 자체일 것이다. 서해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지만 전체 둘레가 15km 남짓해 자동차로 30분가량이면 둘러볼 수 있다. 내가 이 섬을 즐겨 찾는 이유는 한국전쟁이 한창(1952년)이던 때 이작도(伊作島)에서 이곳 영흥도로 이사 와서 어려운 생활고.. 2011. 4. 23.
이작도(伊作島) 섬 아이 이작도(伊作島) 섬 아이 - 아, 잊을 수 없는 유년의 추억이여 - 글 · 남 상 학 “섬은 / 누군가를 / 하염없이 기다리다 바다 한 자락을 베고 / 몸으로 졸고 있었다.” * 마을 앞 바다에서 본 이작도 큰말 정경 * 섬은 그리움이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섬은 숙명적으로 고립과 단절이라는 이미지를 안고 있다. 그래서 섬이 지니는 그리움은 곧 외로움이 된다. 두 살 때 가족과 함께 섬으로 들어간 나는 초등학교 시절 동안 서해의 한 외로운 섬 이작도(9년)와 영흥도(1년)에서 산 철부지 섬 아이였다. 나는 그 때 이작도 섬마을 선생님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 섬에 발을 디뎠다. 바닷가 사택에서 자란 나는 바다와 함께 철이 들었다. 잠에서 눈을 뜨면 넓게 펼쳐진 바다와 섬들, .. 2011. 4. 23.
내 고향은 어디? 내 고향은 어디 ? 글 · 남상학 " 나는 ‘당신의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오히려 내게는 고향을 묻기보다 출생지, 성장지를 구별하여 묻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 내가 유년시절 10년간 살았던 이작도 장승 * 라디오나 TV 음악프로에서 고향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누구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조영남의 번안가요 “내 고향 충청도”의 정겨운 노랫가락을 들을 때도 그렇다. ‘1.4 후퇴 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곳 두메나 산골,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나를 키워준 고향 충청도 ⋯ ’ 비록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자신을 키워준 곳이기에 그는 남다른 애착으로 충청도를 노래한 것이다. 조영남과는 반대로 나는 1940년 3월 2일 충청남도 서산군 성연면 왕정리 240번지.. 2011. 4. 23.
지혜로운 나의 어머니 지혜로운 나의 어머니 글 · 남상학 "헌신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삶이 아니었으면 전쟁 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태에서 어찌 우리가 일어설 수 있었을까.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우리 가정의 인생역전은 한 마디로 어머니의 눈물 어린 희생과 헌신의 결과였던 것이다." 나의 어머니(의:義자, 동:東자)는 청주 한씨 집안의 상(庠)자, 원源)자 외할아버지의 1남 5녀 중 둘째딸로 1906년 3월 2일에 출생하셨다. 유복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살 때 같은 마을에 살던 아버지와 결혼하셨다고 한다. 위로 딸 넷을 낳았으나 셋째 딸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잃은 뒤 나를 포함하여 아들 셋을 낳으셨다. 천성이 온화하고 인자하셨던 어머니는 엄한 성격의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를 각별한.. 2011. 4. 21.
올곧은 선비, 나의 아버지 올곧은 선비, 나의 아버지 글 · 남 상 학 "선비형의 아버지는 명예나 재물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고향 서산에서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마다하고 '낙도의 교사로 자원했던 것도 욕심 없이 어린 아이들의 교육에 헌신하려는 열정 때문이었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나는 두 살 때(1941) 서해의 작은 섬 이작도(伊作島)로 이사했다. 서산군청 농업기사로 계셨던 아버지(成자, 熙자)가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 식구는 나를 포함하여 넷(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나), 그곳에서 남동생(상범, 상우) 둘이 태어났다. 이작도는 인천에서 여객선을 타고 1시간여 가야하는 낙도로 이 섬의 큰말에는 영흥초등학교 이작분교가 있었다. 이작분교는 2개의 교실에서 6개 학년이 2부제로 공부하는.. 2011. 4. 21.
남상학의 자전에세이집 <아름다운 동행> 출간 남상학의 자전에세이집 「아름다운 동행」 아름다운 동행(同行)에 감사하며 어느 덧 희수(稀壽)를 넘어섰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은 호사가들이 하는 말이다. 70을 넘어서면 겸손한 마음으로 인생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성서는 인간을 가리켜 ‘거류민과 나그네’(벧전 2:11)라고 표현했다. ‘거류민과 나그네’는 자기 고장을 떠나서 객지에서 임시로 살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이 땅 위에서 사는 인생길은 길든 짧든 나그네 길임에 틀림없고, 언젠가는 천상병 시인의 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할’ 존재인 것이다. 인생을 여행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인간은 우연히 이 땅에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어느 한 생명도 하나님의 .. 2011. 3. 6.
아름다운 사은회(72년 졸업, 숭의여중 제자들과의 만남) 아름다운 사은회 1972년 졸업, 숭의여자중학교 제자들과의 만남 글·사진 남상학 지난 10월 23일 오후 7시, 신촌에 있는 음식점 에서 미국에 이민 가셨던 김희렴 선생님의 일시 귀국을 계기로 금년 두 번째로 제자들과의 반가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어느새 50대에 접어든지 수년이 지났지만 50대의 제자들과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로 돌아가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이 제자들을 만난 것은 지금부터 38년 전, 중학교 평준화 첫해가 되는 1969년 숭의여자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때였습니다. 그 후 1학년, 3학년 시절 담임을 하며 국어(國語)교과를 맡아 지도했습니다. 3년의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이들은 제각기 자기가 지원한 고등학교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어느 때나 마찬.. 2008.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