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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이작도(伊作島) 섬 아이

by 혜강(惠江) 2011. 4. 23.

 

이작도(伊作島) 섬 아이

 

- 아, 잊을 수 없는 유년의 추억이여 -

 

 

글 · 남 상 학

 

 

“섬은 / 누군가를 / 하염없이 기다리다

바다 한 자락을 베고 / 몸으로 졸고 있었다.”

 

 

 

* 마을 앞 바다에서 본 이작도 큰말 정경 *

 


  섬은 그리움이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섬은 숙명적으로 고립과 단절이라는 이미지를 안고 있다. 그래서 섬이 지니는 그리움은 곧 외로움이 된다. 두 살 때 가족과 함께 섬으로 들어간 나는 초등학교 시절 동안 서해의 한 외로운 섬 이작도(9년)와 영흥도(1년)에서 산 철부지 섬 아이였다. 나는 그 때 이작도 섬마을 선생님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 섬에 발을 디뎠다.

  바닷가 사택에서 자란 나는 바다와 함께 철이 들었다. 잠에서 눈을 뜨면 넓게 펼쳐진 바다와 섬들, 모래사장과 갯벌, 부두와 방파제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파도소리를 들었다. 바다는 늘 좋은 친구였고, 가장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이가 된 뒤에도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물장구치기, 모래성 쌓기, 숨바꼭질, 달리기, 씨름 등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여자 아이들과 어울려 백사장에 꽂혀 있는 하얀 조가비를 줍고, 남자 아이들과는 얄팍한 돌을 주워 물수제비를 뜨며 좋아라 손뼉 치며 뛰놀았다. 방울을 튀기며 멀리 바다 끝으로 튕겨나가는 물수제비는 우리의 꿈이요 벅찬 소망의 몸짓과도 같았다.


그러다가 선창가에 물이 가득 차면 방파제에서 나무껍질로 만든 배에 돛을 달아 먼 바다로 띄웠다. 먼 바다 저편 내가 동경하는 피안에 닿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잔잔한 물결 위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떠가는 조각배에는 어린 시절의 꿈을 실었다. 그럴 때마다 파도는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개구쟁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처럼 작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잔잔하게 백사장에 와 스러졌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던 나는 으레 저녁마다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보곤 했다. 그 때 푸른 바다는 바닷가 해송과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였다.

 

   1.


내 눈동자 속에는

늘 엷은 안개가 낮게 깔리고

그 안개 속에 흔들리는

이작도가 있다.

 

서해의 한 점 섬

사시사철 바닷 바람에 씻기우고

가뭇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발 밑에 다소곳이 잠재우고

 

허구한 날 태풍 일어

뱃사람 모진 목숨 숱하게 앗아가도

당산(堂山) 겨드랑이 사이로

마파람이 기지개 켜며

무시로 넘나든다.

 

    2.

 

학교는 파했는가
운동장 아래 모래벌로
검게 탄 조무래기들
알몸 되어 조르르 몰려들고

바다 끝 하늘 향해
썰물로 드러난 갯벌 위를
맨발로 달려가면

출렁이는 물결 속을
무리 지어 헤엄치는 숭어가 되고
맑은 물 잔잔한 바다 속을
일렁이는 청태(靑苔)가 된다.

 

   3.

 

종이배 접어 물 위에 띄우는

철없는 마음 더 이상 비상할 수 없어

슬픈 갈매기 되어 선창 위를 날고

 

속살 드러내고 누운 모래톱에
은빛 낙조가 넘실거리는데
구멍 난 그물을 손질하는
불혹(不惑) 지난 어부의 눈가에
노을이 진다.


파도여, 힘차게 날아오르라

새하얀 조약돌 바다 발톱에 부서져도

억센 생명력으로 퍼득이는

나의 고향 꿈길 이작도.

 

- 졸고 "이작도"

 

  그러다가 물이 바다 끝으로 달아나면 나는 맨발로 아이들과 무리지어 갯벌로 달려갔다. 자디잔 자갈밭에 지천으로 깔린 길쭉한 비틀이조개, 돌무더기에 다닥다닥 붙은 고둥, 갯벌에 구멍을 뚫고 사는 털게와 가재, 모시조개를 잡고, 웅덩이에서 물을 퍼내고 새끼 망둥이를 잡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철이 좀 든 뒤에는 갯바위 낚시를 즐기는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갯바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면 심심치 않게 우럭과 노래미가 올라왔고 그 때마다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잡은 고기로 어망이 그득 차는 날에는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왔다. 또 어느 때는 중선(中船)이 울긋불긋한 깃발을 달고 징과 꽹과리를 울리며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흥분한 적도 있었다. 그 배는 연평도 근해로 조기를 잡으러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바다는 평화가 넘실거리는 섬으로 철부지 나에게는 좋은 쉼터이자 삶터였다.

그러나 섬은 항상 평화스럽지는 않았다. 바다는 어린 나에게 꿈을 키워주기도 했지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풍랑이 일어날 때도 있었다. 분명 바다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편안한 안식처요, 평화로 가득 찬 바다에 태풍이 몰아쳐 높은 풍랑이 일어나는 날에는 거친 파도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섬을 무자비하게 할퀴었고, 한 입에 삼키려는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런 날이 지나면 영락없이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성난 파도에 휩쓸린 배가 파선하거나 침몰하여 어느 집 누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과 간밤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해안으로 떠 밀려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런 소식은 어린 나의 가슴을 두려움으로 몰아갔다.

이렇듯 바다가 두 얼굴을 가졌다는 것을 알 즈음에 어린 나는 전쟁을 맞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쟁의 회오리가 섬에도 불어 닥쳤다. 비행기의 굉음, 포격소리가 하늘을 덮고, 어느 날 완장을 찬 사람들이 의기양양하게 섬을 점령했다. 그들은 철부지들을 모래사장에 모아놓고 노래를 가르쳤다. 파도소리가 들리던 모래사장에 갑자기 ‘김일성장군 노래’를 비롯하여 행진곡의 노래가 퍼져 나갔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그들의 기세에 눌려 꼼짝없이 노래를 불러야 했다. 신나게 부르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얼마 후에 이들이 떠난 뒤 군복을 입은 또 다른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아른들은 국군이라고 반가워했다. 그런데 반가움도 잠시 마을 전체가 구름이 덮였다. 처지가 바뀌면서 사상이 다른 사람들끼리 편 가르기와 책임을 추궁하는 일들이 잇따르게 되고, 젊은이들이 뒷산 너머에서 총살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마을은 눈물과 통곡으로 얼룩지고, 사람들은 서로 불신과 반목하는 사이로 변해갔다. 그날 이후 나는 뒷산의 현장에는 얼씬도 못했다. 전쟁은 내게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 주었던 것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달한 어느 여름날이라고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폭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피난을 떠났다. 해상이 모두 통제된 마당에 육지로 피난을 갈 수도 없는 일, 간단히 짐을 꾸린 가족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잠시라도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잡목과 소나무 우거진 섬 속의 산밖에 없었다. 머리 위로 ‘쌕쌕이’라는 비행기가 낮게 비행하던 날, 나는 산 위에서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바다에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뒤덮여 있었다. 어른들이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조명탄이 터지고 함포에서 날아간 포탄이 터질 때는 고막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인천에서 불과 44㎞밖에 안 되는 거리임으로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른들이 철없이 전쟁놀이(?)를 한다고 생각했다.

전쟁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고, 심각한 위기가 우리 가정에 닥쳐오고 있었다. 북쪽사람들에게 협력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협박을 당하자 1952년 아버지는 학교를 사직했다. 갑자기 끼니를 걱정할 만큼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되면서 나는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시장한 배를 체우기 위해 어머니는 둥굴레, 무릇을 고아 주셨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꽁꽁 언 밭을 뒤져 고구마를 캔 흙더미를 뒤져 잔고구마를 줍고, 버려진 배추의 배추꼬리로 시장기를 때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발에 새끼줄을 매고 얼어붙은 바위를 밟으며 칼바람이 부는 해안을 돌았다. 간혹 폭격으로 파선했거나 미군들이 먹다 버린 식품들이 바다에 떠다니다가 밀려온 것을 줍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나서기로 했다. 추운 겨울 섬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굴을 따는 것이었다. 사람이 사는 섬에는 늘 채취하여 보잘 것 없으므로 무인도를 가야 했다. 동네 배를 타고 동네사람들과 함께 며칠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굴을 땄다. 잠은 비좁고 추운 선실에서 자고, 끼니는 미리 지어 간 보리밥을 끓는 물에 데워 김치와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엄마와 누나, 그리고 내가 딴 굴은 무게에 따라 돈으로 바꿨다. 또 땔감을 마련하는 일은 나와 동생 몫이었다. 갈퀴로 마른 나뭇잎이나 솔가리(소나무에서 떨어진 마른 솔잎)를 긁어 가리(동이)를 만들고, 삭정이를 줍고, 마른 나무 등걸을 도끼로 찍어 지게로 운반했다. 세찬 바람을 이기지 못하여 지게가 곤두박질할 때는 지게를 진 채 어린 몸이 힘없이 나뒹구는 일도 허다했다. 그 해 어머니와 누나, 나는 귀와 손발에 동상이 걸렸고, 동산이 진하여 부어터진 곳에선 진물이 흘렀다.

 1.
무릇 둥굴레 고아 먹고
어지러워 멀미하는 세월이었네
돌쩌귀에 살점이 쩍쩍 달라붙는 겨울
진물 흐르는 부어터진 손마디로
꺼져 가는 화톳불을 뒤적거리다가
한기에 지친 몸
깊은 잠에 빠져 들었지.

2.
꿈속에서 보는 친구야
토시 끝에 매어 달린 가난의 흔적
양잿물 잘못 먹고 뒤집힌 너의 눈동자
그 악몽에 놀라 잠을 깨면
눈가에는 땟국 같은 눈물이 흐르고
핏방울 엉긴 젖은 기침 소리를
목젖에 삼키곤 했지.

3.
쓰린 배를 움켜잡고
비탈진 언덕받이 채마밭을
오르내린 지 몇 번인가
호미 끝에 걸리는 생존의 무게
손가락만한 고구마나 언 배추꼬리 주우며
칼로 베어내는 아픈 살점을
우적우적 씹고 있었지.

4.
누이 따라 굴 따러 나선
애띈 열한 살
얼어붙은 무인도에 노을이 잠기면
뼈마디 관절 뚝뚝 분지르는
매서운 바람 불고, 파도가 일고
배 멀미로 토악질한 바위에 닥지닥지
굴 껍질 하얗게 웃고 있었지.

5.
봄이 오면 물때 맞춰
개펄 덮인 모래밭을 뒤적이고
비단무늬 바지락을 줍는 대낮
바다 건너 한 척의 배가 당도하듯
빈 망태기 가득 그리움을 담으며
썰물 뒤에 신속히 밀물이 오는 것을 알았네
그것이 내일에의 희망이라는 것을
미래에 대한 꿈이라는 것을.

- 졸고 "추억1-유년의 기억들" 에서



이 글은 세월이 한참 지난 뒤, 그 시절의 아픔을 적은 것이다. 이런 고생은 영흥도로 이사 간 뒤에도 계속되었다. 물길 따라 드넓은 갯벌에서 허기를 참으며 바지락을 캐던 날, 그 봄날의 바닷물은 시리고 아팠다. 유년시절 섬마을에 갑자기 들이닥친 전쟁의 회오리는 나를 두려움과 공포, 굶주림으로 몰아갔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그 속에 내가 있었다. 그래서 내 유년의 추억은 오늘 나에게 가슴 저린 그리움으로, 가슴 뜯는 노래로 남아 있다. 아, 잊을 수 없는 유년의 추억이여! (끝)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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