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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내 고향은 어디?

by 혜강(惠江) 2011. 4. 23.

 

내 고향은 어디 ?

 

 

글 · 남상학

 

 

 

" 나는 ‘당신의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오히려 내게는 고향을 묻기보다 출생지, 성장지를 구별하여 묻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 내가 유년시절 10년간 살았던 이작도 장승 * 

 

  라디오나 TV 음악프로에서 고향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누구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조영남의 번안가요 “내 고향 충청도”의 정겨운 노랫가락을 들을 때도 그렇다. ‘1.4 후퇴 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곳 두메나 산골,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나를 키워준 고향 충청도 ⋯ ’ 비록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자신을 키워준 곳이기에 그는 남다른 애착으로 충청도를 노래한 것이다.

   조영남과는 반대로 나는 1940년 3월 2일 충청남도 서산군 성연면 왕정리 240번지에서 태어났다. 서산은 내가 태어날 당시에는 육로로 가는 것보다는 해상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다. 인천에서 서해상의 영흥도를 거쳐 서산까지 여객선인 황진호와 은하호가 운행했다. 여객선은 지금은 대호방조제로 막혀있지만, 당시에는 당진군 석문면과 서산의 대산면 사이의 좁은 만을 통하여 깊숙이 자리 잡은 성연에 닿았다. 

   내 할아버지(廷자, 煥자)의 형제는 7형제였기 때문에 자손이 번화했고, 그 자손들은 거의 서산, 예산, 홍성, 아산 등 거의 충청도 일대에 흩어져 살았다. 7형제 중 둘째인 우리 할아버지는 6남매를 두셨는데, 나의 아버지는 둘째아들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성(成)자’ ‘희(熙)자’의 함자였고, 청주 한씨(韓氏)에 ‘의(義)자’ ‘동(東)자’ 함자를 가진 어머니를 아내로 맞으셔서 3남 4녀를 두셨는데, 위로 딸 넷을 내리 낳았지만 셋째 하나만 생존하고 나머지는 모두 갓난애 시절에 모두 잃어버리고 뒤늦게 아들 셋을 낳으셨다. 그 중에서 첫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나는 서산에서 태어났지만 얼마 안 되어 그곳을 떠났다. 서산군 농업기사였던 아버지가 교육에 뜻을 품고 서해 낙도인 이작도(伊作島)로 근무지를 바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향의 사전적 의미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라면 서산은 분명 나에게 반쪽이지만 고향임에 틀림없다. 조영남이 ‘비록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자신을 키워준 곳’ 충청도를 고향이라고 노래한 것처럼, 비록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충청도는 나를 낳아준 곳이기에 나의 고향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나를 낳아주신 부모를 비롯해서 선대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곳이기에 충청도를 고향으로 여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모의 유해를 모신 선산이 아산(온양)에 있고 더욱 그렇다.

   13살 때 섬 생활을 청산하고 육지로 나와 처음 정착한 곳은 충청북도 제천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다시 충청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충청남도는 아니지만 같은 충청도라는 의미에서 어떤 동질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충청도를 내 고향이라고 말하는 것에 나는 쉽게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살 때 충청남도 서산을 떠나 서해의 이작도에서 10년, 영흥도에서 반년을 살면서 철이 들고, 유년 시절의 꿈을 키웠고, 초등학교도 섬에서 졸업했기 때문이다. 충청남도 서산은 단지 태어난 곳일 뿐, 정작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곳은 외딴섬이었다. 그래서 성년이 된 뒤에도 나는 섬에 더 큰 애착과 애정을 갖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온 후 나는 바다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고향이 그리운 날 바다는 아예 내 눈썹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사계(四季) 중 여름이 더욱 그랬다. 바람 부는 날에는 창 밖 흔들리는 미루나무에서 넘실거리는 물결과 파도소리를 보고 듣곤 했다. 때로 집채만 한 파도가 덮치면 신열(身熱)이 오른 맨발의 아이는 해안을 따라 정처 없이 달렸다.
그리고 바람이 자면 수평선 위에 가물가물 꿈의 돛배를 띄웠다. 팔미도를 지나 영흥도로, 자월도를 지나 이작도 승봉도로, 아니면 덕적도를 경유하여 문갑도 백아도 울도로, 그 너머 어딘가에 있을 미지의 또 다른 섬으로. 그 아련한 물길 따라 나는 가끔 물새 우는 소리를 듣곤 했다. 이제 지명(知命)을 훨씬 넘은 나이에도 지도책을 펴들고 눈을 끔벅이며, 너무 길어 보이지 않는 바닷길, 애처로운 길을 가다가 베갯머리에서 요즘도 내가 듣는 그 소리, 환청(幻聽)일까?”

   - <아련한 물길-바다 생각> 전문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물론 내가 자란 섬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추억 때문이다. 나는 내가 자란 섬을 진정한 고향으로 여기며 살았던 것이다. 이런 감정은 늘 마음속 깊이 자리 잦고 있어서 ‘당신의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오히려 내게는 고향을 묻기보다 출생지, 성장지를 구별하여 묻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고향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는 통상적인 개념을 떠나 출생지나 성장지를 구별할 필요 없이 ‘마음이나 영혼의 안식처’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역감정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요즘에는 더욱 좋지 않은가. 세상풍파에 시달리다가도 고향을 생각하면 달려가고 싶은 곳, 고향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안식처요 피난처이며, 따라서 고향은 우리의 정(情)을 다독거려주고 한(恨)을 어루만져 주는 곳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이은상의 「가고파」를 떠올리곤 한다.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이처럼 고향은 언제나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 백발이 성성한 어른이 된 뒤에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고향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바다와 산을 동시에 지닌 섬마을에서 살아온 나는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줄줄이 떠오르는 추억들이 있다. 코 흘리며 하루 종일 뛰놀던 바닷가 모래사장, 조개를 줍던 갯벌, 망둥이를 낚던 갯벌의 물고랑, 메뚜기를 잡던 벌판, 주먹만한 개살구를 따먹으러 담을 넘던 이웃집, 도라지와 잔대를 캐던 언덕 ……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기억의 실타래 속에서 줄줄이 풀리는 추억들. 그것이 비록 아픔과 설움에 겨웠던 세월일지라도 지나고 보면 모두 내 인생을 가꿔온 자양(滋養)이 되었던 것이다.

   고향이 갑자기 그리울 때나 마음이 심란할 때, 나는 가끔 추억이 깃든 이작도와 영흥도를 방문하곤 한다. 이작도를 방문한 것은 1962년 대학시절 이작도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처음이었다. 섬을 떠난 지 10년 만의 일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에 그 지역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뒤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그곳에서 태어난 두 동생을 포함하여 4남매의 가족이 찾아가기도 했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에도 두 번 방문했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노소에 관계없이 마음의 고향인 것이다.

 


* 서해의 이작도를 방문했을 때 촬영, 나는 이곳에서 유년기에 10년간 살았다 *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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