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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지혜로운 나의 어머니

by 혜강(惠江) 2011. 4. 21.

                                  

지혜로운 나의 어머니


 

글 · 남상학

 

 

 

"헌신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삶이 아니었으면 전쟁 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태에서

어찌 우리가 일어설 수 있었을까.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우리 가정의 인생역전은 한 마디로

어머니의 눈물 어린 희생과 헌신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운 어머니


 

  나의 어머니(의:義자, 동:東자)는 청주 한씨 집안의 상(庠)자, 원源)자 외할아버지의 1남 5녀 중 둘째딸로 1906년 3월 2일에 출생하셨다. 유복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살 때 같은 마을에 살던 아버지와 결혼하셨다고 한다. 위로 딸 넷을 낳았으나 셋째 딸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잃은 뒤 나를 포함하여 아들 셋을 낳으셨다.

   천성이 온화하고 인자하셨던 어머니는 엄한 성격의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를 각별한 사랑으로 감싸 주셨다. 위로 누님 넷을 낳고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 우리 삼형제를 금지옥엽(金枝玉葉)처럼 귀엽게 여기시고 바닷가에서 헤엄치는 것조차 금지시키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우리들을 선생의 자녀답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개구쟁이 시절부터 옷 입기와 말하는 태도까지 모범적이기를 바라시며 각별히 교육을 시켰다. 또 교사의 살림이 넉넉지 못했으므로 알뜰하셨고 검소한 생활을 하셨다.

 

   그 후 아버지가 교직을 그만두신 후에는 섬 아낙네가 되어 살을 에는 겨울 바다를 헤매며 굴을 따고, 찬 바다 물길을 따라가며 바지락을 캤다. 그 때 나는 동상에 걸려 부어오른 손가락을 자식들 앞에서 애써 감추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또 마을 뒷동산에서 캐온 무릇과 둥굴레를 고아놓고 우리 가족의 허기를 메우게 하셨고, 겨울 깊은 밤에는 화로에 물 주전자를 올려놓고 빨래를 만지던 어머니의 지친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가난이 땅거미처럼 몰려오고
사람이 목 메이게 그리운 밤에는
곤히 잠든 사남매의 숨소리를 들으며
긴 밤 하얀 빨래를 손질하며 지새우셨다

그 날 밤 어둠을 환히 밝히던 어머니는
숭늉 끓이는 주전자 속에
당신의 고뇌를 얼마나 풀어 끓였을까
다림질하는 기진한 손끝에서

치마폭 구석구석 몸져누운

외로움과 아픔의 자국들을 얼마나 지웠을까

- 졸고 “숭늉 냄새가 그립다”에서



  교사의 아내였던 어머니가 생계를 위하여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 때,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고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살 길을 찾아 이작도에서 영흥도로 옮긴 것도 어머니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생활도 어려운 것은 여전했다.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게 되자, 지혜로우신 어머니는 반년 만에 섬 생활을 청산하고 육지로 나가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다.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지만 먹고 마시는 문제보다 자식들 교육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만약 우리를 섬에 남겨두었으면 “고기 잡는 어부나 뱃사람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회고하셨던 것이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육지로 나온 우리는 강원도 영월을 거쳐 제천으로, 제천에서 서울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 모두가 교육여건을 고려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 다름없는 어머니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때 어머니의 화두는 두 가지,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배워야 산다.”는 것이었다.

목표가 분명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12년 동안 갖은 고난을 스스로 담당하셨던 것이다. 행상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점상을 하셨고, 좁은 공간이지만 점포를 임대하여 손수 힘든 장사를 하셨던 것이다. 변변치 않은 물건들을 머리에 이고 발품을 팔았던 세월, 추위에 떨며 기차역 앞에서 좌판을 펴고 푼돈을 모았던 세월, 새벽 1시가 넘도록 야간열차의 손님을 상대로 국수를 말고 빵을 찌던 세월들은 모두 자식들을 위한 희생의 세월이었다. 우리 사남매는 그런 어머니의 희생적인 삶을 바탕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기차 역전에서 몸을 떨며 좌판을 놓고 노점을 하셨다. 그러다가 좁은 자리지만 점포를 임대하여 상점을 운영하기도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2년 동안 자식들과 가정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신 것이다. 어느 부모치고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없겠으나 오늘의 우리 사남매를 만든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헌식적인 삶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지혜와 자식 사랑의 정신이 가져온 결과였다.

어머니가 지니셨던 희생의 정신, 나는 그 원천은 어머니의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머니로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머니는 섬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 아버지의 사망과 가난이 연속되는 어려운 삶 속에서 오직 믿음 하나로 극복해 나가셨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나는 조복흥 장로님과 김부귀 권사님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응봉동에 사셨던 두 분은 교회로 가는 길에 늘 행당동에 있는 우리 집을 들러서 어머니와 함께 가셨는데, 어머니는 두 분과 동행하시면서 자신의 생활과 믿음에 대하여 늘 간증하심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분들은 어머니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좋은 동반자였던 것이다.

헌신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삶이 아니었으면 전쟁 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태에서 어찌 우리가 일어설 수 있었을까.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우리 가정의 인생역전은 한 마디로 어머니의 눈물 어린 희생과 헌신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 1965년 3월 18일 59세를 일기로 영원히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는 우리 4남매의 눈물 속에 아산 선영에 묻혔다. 나는 어머니가 무척 그립던 어느 오월, 어머니를 생각하며 사모곡(思母曲)을 쓰다가 펑펑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구수한 냄새 속에 살아나는 어머님의 얼굴,
거룩한 교훈은 어제나 오늘이나
연탄 냄새나 석유냄새가 아닌 쇠솥을 달구어 맛을 내는
마른 소나무의 활활 타오르는 관솔 불 같은 것
그 교훈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
출렁이는 세월의 강물 건너
오늘도 사남매의 뜰에 목련처럼 피어나는
크나큰 사랑, 오늘 밤 나는 숭늉 냄새가 그립다
어머니가 몹시 그립다.

- 졸고 “숭늉 냄새가 그립다”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이제 와서 수백 번 말로 표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 풍수지탄(風樹之嘆)이란 말이 있다. "나무는 고요하게 있고 싶어도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식이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이미 돌아가 이 세상에 없음의 비유한 말이다.(樹欲靜而風不止)

 

자녀 위해 몸과 마음의 진액을 몽땅 쏟아부어주신 어머니, 그 어머니께 효도 한 번 해보지 못한 것이 자식으로서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우리는 흔히 갚을 길 없는 큰 은혜를 하해(河海)와 같다고 표현한다. 나는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어머니의 품은 바다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에게 바다는 어머니와 동일시되어 왔던 것이다.


바다에 오면

바다는 늘 푸르게 살라하네.
하얀 모래밭에 젖은 옷 벗어 놓고

답답한 가슴 열라 하네.

바다에 오면

바다는 늘 출렁이며 살라하네.
산 넘어 몰려오는 천둥과 먹구름

맑은 바람에 씻으며
파도치는 가슴으로 살라 하네.

바다에 오면

바다는 늘 낮아지라 이르시네.
어둔 밤의 돌개바람 길 없는 성난 파도

넓은 품에 잠재우며
큰 바위처럼 침묵하라 이르시네.

저무는 바닷가 노을에 젖어

다정한 음성으로 푸르게 일깨우는
한평생 바다로 살아오신

한결같은 모습의 내 어머니

바다에 오면 인자한 얼굴에
미소 머금고 어머니가 걸어오네.


- 졸고 “바다에 오면” 전문

 

  ‘한평생 바다로 살아오신 / 한결같은 모습의 내 어머니’ 어머니는 지금 내 곁에 계시지 않지만, 영원히 내 마음 속에 살아 지금도 나를 어루만지시고, 일깨우시고, 교훈하신다. 나는 새삼스럽게 “진정한 효도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진정한 효도란 부모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라고. 왜냐 하면 부모는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자녀들이 자기보다 더 잘 되고 잘 살기를 바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오늘, 하늘보다 높으신 어머니 앞에 한 아름 카네이션 붉은 꽃을 바치고 싶다. (끝)

 

 

 

▲ 나의 대학시절,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맨 왼쪽), 둘째 상범, 셋째 상우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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