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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올곧은 선비, 나의 아버지

by 혜강(惠江) 2011. 4. 21.

 

올곧은 선비, 나의 아버지


 

글 · 남 상 학

 

 

 

"선비형의 아버지는

명예나 재물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고향 서산에서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마다하고

'낙도의 교사로 자원했던 것도 욕심 없이

어린 아이들의 교육에 헌신하려는 열정 때문이었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나는 두 살 때(1941) 서해의 작은 섬 이작도(伊作島)로 이사했다. 서산군청 농업기사로 계셨던 아버지(成자, 熙자)가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 식구는 나를 포함하여 넷(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나), 그곳에서 남동생(상범, 상우) 둘이 태어났다.


  이작도는 인천에서 여객선을 타고 1시간여 가야하는 낙도로 이 섬의 큰말에는 영흥초등학교 이작분교가 있었다. 이작분교는 2개의 교실에서 6개 학년이 2부제로 공부하는 미니 학교. 정식으로 발령을 받은 교사는 우리 아버지 한 사람뿐, 현지 주민 중에서 임시교사 한 분의 도움을 받아 선생님 두 분이 학생들의 수업을 맡았다.

  학교가 있는 동네는 약 60여 가구, 주민들은 농지가 별로 없어 바다에 의존하고 살았다. 섬에서 굴과 바지락을 캐고 주변 해역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빈촌이었다. 이 섬에서 아버지는 박봉을 무릅쓰고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10년간 교육을 천직으로 알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셨다. 선비형의 아버지는 명예나 재물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고향 서산에서 안정적인 공무원(서산군 지곡면 면서기, 서산 농업기수) 생활을 마다하고 낙도의 교사로 자원했던 것도 욕심 없이 어린 아이들의 교육에 헌신하려는 열정 때문이었다. 올곧고 강직한 성품을 지니셨던 아버지는 오직 가르치는 일에 철두철미했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나는 아버지와 관련된 두어 가지 추억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이므로 다섯 살 정도였을 것이다. 운동장 한 쪽에 사택이 있어서 학교 운동장이나 교실, 학교 앞 바닷가 모래사장이 모두 내 놀이공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수업 중인 교실에 몰래 숨어들어가 회초리 같은 막대기를 들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장난삼아 방해한 적이 있었다. 그 일로 나는 그날 저녁,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며 아버지로부터 종아리에 회초리를 맞았고, 그 후로는 아버지는 나에게 교실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금족령을 내리셨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또 다른 잘못을 저질러 산 너머 공동묘지까지 갖다오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나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공동묘지를 갔다 오면서 평펑 눈물을 쏟았고, 아버지를 한없이 원망한 적도 있었다.
나는 이작도를 떠난 지 40여년 후 우리 형제들과 함께 이작도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우리 형제를 은사의 자제분들이 왔다며 환대해 ㅈ주셨는데, 그 때 아버지의 제자인 강동산(姜東山) 할아버지는 옛날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한 마디로 엄하고 철저한 분이셨어요. 학생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 학생에게 선생님 자신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내리치게 했지요. 선생님 자신이 잘못 가르쳤다는 거예요. 지금 어디 그런 선생님이 있습니까? 숙제를 안 해 오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면 매서운 회초리로 얻어맞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도 물론 야단을 많이 맞았지요.”

  이러한 성품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북한군이 섬에 들어와서 선무공작(宣撫工作)에 열을 올릴 때 학교교실을 이용하겠다는 것을 거부하여 곤욕을 치렀고, 그 후 우리 군이 다시 수복하면서 북한군에게 협력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협박하자 1952년 10월 4일 교사직을 자진 사퇴하여 결백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이런 행동이 강직한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사람다운 길을 걷고자 했던 옛 선비의 정신을 지니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신 적 없이 배움과 실천 속에서, 큰 스승 공자가 그랬듯이 자신이 지닌 사람됨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노력했던 분이었다.

  아버지의 선비다운 성품은 취미 생활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붓글씨와 그림을 그리셨다.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 한문사숙(私塾)에서 5년 동안 공부하였기에 한문 필체가 남다르게 뛰어났다. 글자의 획 하나도 흩어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작성한 이력서 글자를 보면 곧은 성격이 배어 있는 듯 반듯하면서도 정확하고 힘이 있어 감탄할 정도였다.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한자로 직접 써 놓으신 이력서를 소중한 유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새와 꽃을 소재로 하여 색연필로 그린 병풍화인 화조도(花鳥圖) 또한 일품이었다.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와 원앙새 등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들 작품들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까지 유품으로 보관하였으나 잦은 이사 중에 유실되어 지금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또, 아버지는 틈이 나면 갯바위낚시를 즐기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좋았고, 나는 그 때마다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낚싯대를 드리우면 우럭과 노래미가 제법 잡혔다. 내가 지금도 갯바위 낚시에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함께 했던 추억 때문이다. 약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간혹 잡수시는 날에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학교를 그만 둔 후에 아버지는 병환이 나셨다. 모함으로 시달리다 화병을 얻으신 것이었다고 했다. 의료시설이 전무한 낙도에서, 그것도 치열하게 전쟁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운 터에 치료비를 장만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겪으신 고통은 어쩌면 육체적 아픔보다는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명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었을 것이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생계의 어려움을 고민하시던 아버지는 가족들 모르게 복직 신청을 하셨고, 복직이 허락되어 가족을 섬에 남겨두고 와병 중인 몸을 이끌고 홀로 강원도 영월군 북면 연덕초등학교에 부임하신 것이다. 살 집이 마련되면 이사할 수 있도록 연락하겠다는 말씀만 남기시고서. 부임하신 이후 한달여 기다렸지만 편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병환이크게 악화되지나 않았는 지 걱정하기 시작했고, 연락할 방법이 없자 어머니는 결국 내 누님을 아버지 계신 곳으로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기로 하셨다. 당시만 해도 강원도 영월군 북면 연덕리는 벽촌이었다. 더구나 6·25 한국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교통수단도 별로 좋지 않은 산골에 18살 처녀인 누님 홀로 보낸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없다.


  어렵사리 누님이 아버지 계신 곳에 이 찾아갔을 때 아버지의 병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낯선 곳에서 심신이 더욱 쇠약해졌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부임한 지 2개월도 채 못되어 1953년 5월 24일 딸이 홀로 지켜보는 자리에서 끝내 숨을 거두신 것이다. 46세의 나이에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신 것이다. 그 후 나는 아버지의 유해가 묻힌 그곳 공동묘지를 찾아갈 때마다 눈물이 앞섰고, 아버지의 일생은 비록 길지 않았지만 고귀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가 나는 1962년 대학시절 아버지가 꿈을 불사르던 이작도를 찾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간절한 생각 때문에 교회에서 실시하는 농촌봉사활동 장소를 이작도로 정했던 것이다. 섬을 떠난 지 10년 만의 일로 최초의 방문이었다. 그 때 나는 아버지가 사용하던 교실을 숙소로 삼고 그 운동장, 그 화장실을 이용하며 1주일을 보냈다. 그 때 나는 화장실 입구에서 아버지가 직접 쓰신 “便所(변소)”라는 친필을 보았다.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저며 왔다. 세월이 많이 흘러 글씨는 퇴색해 있었지만 친필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다시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누님(상옥)과 섬에서 태어난 두 동생(상범, 상우)을 포함하여 우리 형제의 식구들 11명이 이작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제자들은 옛 스승의 자녀들이 방문했음을 마을 방송으로 알렸고, 방송을 듣고 모여든 동네 어른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다. 동네 어른들의 대부분은 아버지의 제자들로서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은 지난 학창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 밤에는 나는 아들 석우와 함께 달빛이 환한 방파제 위에서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세듯 지난 세월을 세고 있었다.

 

 

  “몇 년 전 30년 만에 이작도(伊作島)에 간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분교 앞마당, 운동장 곁의 느티나무는 푸르름이 짙었는데 그리운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진 속에 본, 먹으로 쓴 낯익은 글씨 ‘便所’라고 써 붙인 뒷간도 없어졌다. 이것들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옛날 추억을 더듬는 강 동산 할아버지의 얼굴에 잠시 회한이 스치고 지나갔다. 건너편 언덕 위로 새로 페인트를 칠한 양철지붕의 교회당, 그 첨탑(尖塔) 위 십자가가 유난히 선명하다. 그 날 밤 나는 만조(滿潮)가 된 방파제에 앉아, 오랜 시간 큰아들과 아버지 이야기를 꽃피우다가 달빛이 내린 밤바다에 무시로 뛰어오르는 은빛 물고기와 맑은 하늘을 쳐다보며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의 눈을 보았다. 다음 날 나는, 아버지의 그림자 대신 반짝이는 물고기의 비늘과 수많은 별들이 가득 담긴 섬을 송두리째 가슴에 안고 벅찬 가슴으로 돌아왔다"

    - 졸고 <별들의 눈을 보았다-아버지 생각> 전문

 

 

   이글은 이작도를 다녀온 후 그 소감을 적은 것이다. 아버지의 흔적은 세월과 함께 지워지고 바래갔지만,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큰 바위 얼굴’ 같은 존재였고, 아버지의 선비다운 강직한 성격, 올곧은 삶의 태도, 고상한 취미, 이름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실천적인 신념, 이것들은 지금까지 내 삶을 지탱하는 한 기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누님과 나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와 나(총잡이)
▲학교 앞 해변(가운데 : 아버지)
▲교직원 일봉(아버지 : 넥타이 맨 분)

 

 

<출처>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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