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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영흥도, 그 아픔의 세월

by 혜강(惠江) 2011. 4. 23.

     

영흥도, 그 아픔의 세월 

 

- 그것이 가슴 저린 내 그리움일 줄이야

  

 

글 · 남 상 학

 

 

 

* 영흥도 진두 갯벌 * 

 

 

   나는 기분이 울적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서해의 작은 섬 영흥도(永興島)를 찾는다. 영흥도는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인천에서 뱃길로 1시간이나 떨어진 외로운 섬이었다. 그러나 2001년 선재도와 영흥도 간의 연육교인 영흥대교가 개통되면서 뭍과 이어졌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이 섬을 드나들었던 사람들에게 영흥대교의 개통은 감격과 환희 그 자체일 것이다. 서해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지만 전체 둘레가 15km 남짓해 자동차로 30분가량이면 둘러볼 수 있다.

  내가 이 섬을 즐겨 찾는 이유는 한국전쟁이 한창(1952년)이던 때 이작도(伊作島)에서 이곳 영흥도로 이사 와서 어려운 생활고를 겪으며 1년 가깝게 살면서 아버지를 여의었던 아픔의 기억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영흥초등학교, 우체국, 영흥감리교회가 있는 마을의 공회당을 임시 숙소로 하여 선착장 인근에 있는 진두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서 연명했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남동생 둘을 제외하고 어머니와 누나와 나는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적시며 썰물로 들어난 갯벌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호미질을 했다. 고된 일이 끝나면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砲聲)을 들으며 지치고 허기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영흥도와 함께 꼭 기억해야 할 일은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우리 가족의 고달픈 생활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교직에 복직할 것을 결심하고 가족들 몰래 복직원서를 제출, 1953년 4월 강원도 영월군 북면 연덕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으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건강에 무리라고 반대하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족을 영흥도에 남겨둔 채 홀로 임지로 떠나셨다. 거처할 집이 마련되면 가족을 부르겠다고 하신 아버지는 한 달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쌓여 갔다. 어머니는 앉아서 걱정만 할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셨던지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어린 누나를 보내셨던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강원도 오지에, 20살이 채 안 된 처녀를 전쟁 중에 홀로 보낸다는 것은 무척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안위가 더 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를 찾아 떠난 누나마저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우리의 걱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당신은 서해 바다 
  상어 떼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지요. 
  이상난류(異象亂流)를 타고 국적을 알 수 없는 
  상어 떼가 갑자기 몰려 들어 사정 없이 
  알몸뚱이 옆구리를 물어 뜯던 날 
  묻어나는 살점은 외로운 섬이 되고 
  날개 찢긴 까마귀 떼들이 붉게 물든 바다 
  노을 위를 가로 질러 휑하니 북쪽으로 날아갔지요. 
  그 날 이후 서해에선 밤마다 불꽃놀이를 하고 
  그 때마다 별들의 잔해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어둠의 바다 깊숙히 가라앉았지요
  격랑 속으로 어머니 눈물을 뿌리치고
  배 타고 떠나신 반백의 우리 아버지
  소식 없는 사십 평생을 빈 배에 건지면서  


     - "서해 상어 이야기"에서
    

  나와 동생은 매일 여객선이 닿는 선착장으로 나갔다. 배를 타고 올 누나를 마중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는 인천에서 떠나는 여객선 황진호와 은하호가 일주일에 서너 차례 영흥부두를 경유하여 서산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우리 형제는 염전을 지나 30분 넘게 걸리는 선착장에 나가 인천에서 오는 배를 기다렸다. 경적을 울리며 부두에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와 닿은 여객선에서 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왔지만 누님은 보이지 않았다. 허탕 치고 터벅터벅 되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고, 길가에서 쪄내는 찐빵의 구수한 냄새에 배를 움켜쥐고 돌아오곤 했다.

  열흘쯤 지난 어느 날, 여객 틈에 누나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의 손을 잡은 누나의 손은 떨렸고, 눈에서는 얼굴에서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누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悲報)를 안고 돌아온 것이다. 순간 바위 같은 절망이 어린 내 가슴에 몰려들었다. 누나가 찾아갔을 때 아버지는 병환이 깊어 위독한 상태였고, 가족 품으로 돌아올 수도 없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딸의 간호도 허사였고, 아버지는 타향에서 외동딸만이 홀로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하신 것이다.

  영흥도에서 보낸 가을, 겨울, 그리고 이듬해 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은 우리 가족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의 세월로 남아 있다. 전쟁의 상처가 우리 가정에 이토록 큰 슬픔으로 다가올 줄 누가 알았으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모래 언덕 위에 묻고, 곧 육지로 떠났다. 나는 그 때의 슬픔을 세월이 지난 후에 이렇게 적었다.   

        
              1        

          
 누나야, 영흥도 부두의 파도는 
 늘 우리를 들뜨게 했지. 

 인천으로 통하는 뱃길
 한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한 뼘 손끝으로 재면서 
 우린 선창에 서 있었지 

 뚜, 뚜우, 뚜우우 - 
 뱃고동 소리 섬 모퉁이를 돌아오면
 흐르는 물살은 더욱 빨라지고 
 우린 하늘 위를 갈매기 되어 날면서 
 물살 위에 아버지 얼굴을 그리곤 했지.

 꿈길 따라 가뭇없이 떠오는 배는 
 황진호일까, 은하호일까 
 우린 부푼 가슴 안고 마중하여
 돛대의 맨 꼭대기에 앉아 지켜보았지.

 그러나 뭍으로 간 아버지는 영영 오지 않았다.
 꽃신 싣는 설날에도
 보름달 환한 추석에도
 엄마의 생일에도 오지 않았다. 

   

          2


  누나야, 영흥도 내리의 물살은
  늘 우리를 슬프게 했지.              
    
  물결소리 바람소리 행여 그 음성인가 
  썰물 따라 달려가
 바다 끝에서 주저앉고
  질퍽한 갯벌에 빠져 울다가
  밀물 따라 힘없이 돌아오곤 했지.

  작은 눈으로는 잴 수 없는
  드넓은 갯벌 위에
  형형색색 무늬의 바지락을 캐며
  이랑이랑 아픈 삶을 일궜지  
                    
  한나절 뙤약볕이 허기로 쏟아지고
  긴 강둑에 앉아 잡풀처럼 흐느끼다가
  먼 곳에서 울리는 포성을 들으며
  비릿한 바다 내음에 잠들곤 했지.

  누가 아버지의 귀향(歸鄕)을 막았을까
  어머니의 눈가에 얼룩진 소금기가 쌓여
  마른 모래 언덕을 이루고
  파도는 영문 모르고 기슭을 핥고 있었지.                
     
   - "나의 사랑 영흥도" 에서 


  혹자는 영흥도에서의 아픔의 세월을 <나의 사랑 영흥도> 라고 표현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누구나 슬픈 기억은 잊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영흥도에서 겪었던 아픔의 기억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아픔은 당장은 힘든 과정이었지만 그것은 훗날 내 삶의 자양이 되고 힘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난 속에서 인내를 배웠고, 용기를 배웠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영흥도를 즐겨 찾아간다.    
     
  나는 영흥도에 갈 때마다 십리포해수욕장을 찾아간다. 그곳에는 아픔의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처럼 소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진두선착장에서 10리가량 떨어져 있는 십리포해수욕장 해안가에 심은 소사나무는 방풍(防風)이라는 소임을 완수하느라 고단한 세월을 살았다. 하늘로 뻗어야 할 나무는 불어 닥치는 바람에 직립을 포기하고 몸을 꼬며 옆으로 자란 것이다. 그나마 제대로 뻗지 못하고 밑동과 가지에 옹이들이 달라붙고 새끼줄처럼 비틀어졌다. 세월의 아픔을 견디어 온 자국이 온몸에 훈장처럼 붙어 있다.

 

  나는 아픔 속에서도 모진 바람을 이겨내며 소임을 다하고 있는 영흥도 십리포해수욕장의 소사나무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영흥도에서의 나의 삶과 닮아 있었다. 겨울에는 방풍림으로, 여름에는 더위를 식혀주는 정자나무로 제몫을 다하는 소사나무숲이 왜 그리 대견스럽게 보였던지 나는 단숨에 글을 적어나갔다.  

 

  척박한 땅에 뿌리박고
  매서운 칼바람을 가로막아
  뒤틀린 생명이거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저 모진 근육질의 인내(忍耐)를 
  나는 이제 사랑해야 하리

  지난 날 아픈 유년의 기억을 
  바람막이로 둘러치고
  옹이진 마디마디에서 꿈틀대는
  비명소리를 탁, 탁, 
  이제는 힘찬 용솟음으로
  솟구쳐야 하리

  억센 줄기에 생명이 돋아 
  무성한 잎이 그늘을 드리우고
  이 텅 빈 포구(浦口)에 징 소리 울리는 날
  저녁 햇살 눈부실 때

  소사나무 숲 그늘에 앉아 
  은비늘처럼 물길 가르며 돌아올
  만선(滿船)의 배 한 척 
  포구에 앉아 기다려야 하리


  <소사나무의 꿈>의 전문이다. 소사나무 숲은 100년 넘도록 해풍(海風)을 이겨내며 애처로울 만큼 휘고, 굽고, 늙어버렸지만 마을과 사람을 보호해 왔다. 그 인내와 의지가 나를 감동케 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장 3~4절)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고백했지만, 나에게 있어서 영흥도 시절의 아픔은 나를 나 되게 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생존의 방식을 가르쳐준 영흥도의 '뽀얗게 흙먼지 덮인 날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 추억은 '가슴 저린 내 그리움'으로,  '외롭게 가슴 뜯는 노래'로 남게 되었다.  다음은 <추억의 섬 -영흥도를 찾아>의 전문이다.  

 

  대부도 선재도 지나 
  해무 자욱한 다리를 가로질러 
  단숨에 바다를 건넜다 

  영흥대교 너머 
  오랜 세월 가슴에 짙게 밴 
  묵은 바다향(香)의  진두 선착장 

  먼지 풀풀 나는 길가 
  그 옛날 어릴 적 허기를 자극하던 
  빵 찌내는 아줌마는 간데 없고 
  포장마차만 즐비하다 
 
  바람맞이 척박한 땅 지켜온 
  십리포 사구(砂丘)의 소사나무처럼 
  너는 오랜 세월 모진 비바람을 
  용케도 버텨왔구나 

  출렁거리는 물결 벗삼아 
  썰물 따라가며 바지락을 캐던 
  의지(意志)의 땅 
  내게 생존의 방식을 가르쳐준 
  뽀얗게 흙먼지 덮인 날들 

  그것이 가슴 저린 내 그리움일 줄이야 
  홀로 외롭게 가슴 뜯는 노래일 줄이야 

  단숨에 안개 걷히듯 
  내 어린 시절로 옷을 벗는 
  벌거숭이 추억의 섬.
 

 

 

 

▲영흥도 십리포해변에 자라고 있는 소사나무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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