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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부모님 묘의 이전 합장과 정리

by 혜강(惠江) 2011. 6. 27.

 

부모님 묘의 합장과 정리 

 

 

글  남상학

 

 

 

"나무와 나무 위로 높은 하늘 아래 보고 싶은 얼굴
언젠가는 만나 보리라 지그시 눈을 감네."

 

 

 

 

▲아버지, 어머니 합장묘

 

                   
   2004년 4월 2일 아산시 기산동, 선산 묘역은 봄이라지만 아침공기는 쌀쌀했다. 우리 형제는 부모님의 합장묘 앞에서 할 말을 잊고 있었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산소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친척 중 하나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선산을 통째로 팔아넘김으로써 선조들과 그 후손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겨주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사촌형님은 타인에게 넘어간 땅을 되찾기 위해 생업을 제쳐놓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뒤로 두어 차례 명의가 바뀌고 새로운 매입자가 개발을 목적으로 산소의 이장을 요구해 온 것이다. 위로는 고조할아버지로부터 20여기가 훨씬 넘는 묘들이 모두 대상이었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당숙 어른(斗熙)을 중심으로 친족회의를 열어 의논한 끝에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하고 같은 날 산소를 정리하되 이장하거나 화장하기로 하고 화장한 유골을 납골당에 모시거나 아니면 일정한 장소에 뿌리는 것은 직계손의 의향에 따라 정하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 사남매는 고심 끝에 부모의 묘를 정리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한번 이장하여 합장으로 모신 산소에 다시 손을 대는 것도 여간 죄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뿐더러 부모의 유해가 사후 52년과 40년이 경과된 터라 한줌 흙으로 변해 있을 유해를 또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국가의 정책도 오래된 산소는 정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고려했던 것이다.

  1953년 5월 24일 돌아가신 아버지 묘소는 6.25 전쟁 중 강원도 벽지에서 근무하다 순직하셨으므로 그 동안 영월군 북면 연덕리 공동묘지에 모셔져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철들어 산소를 찾아갔을 때는 봉분이 무너지고 잡목이 우거져 묘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다. 뒤늦게 불효를 깨달은 우리 형제는 묘단을 다시 쌓고 새로 봉분을 만들고 해마다 성묘를 갔다. 그 후 1965년 3월 18일 돌아가신 어머니는 타지에 모실 수 없어 집안 어른들의 산소가 있는 아산 기산동의 선산에 모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머니를 모신 선산이 남에게 명의가 넘어가 하는 수 없이 길 건너편 자리로 이장하면서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다가 합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막내 동생과 매부는 하루 전날 아버지 산소가 있는 영월 현지로 가서 아버지 유골을 수습하여 다음날 온양으로 모셔오는 책임을 맡았고, 나와 둘째 동생은 아산 현지에서 어머니 산소를 파묘하고 새로 합장할 자리를 잡아 아버지의 유해와 합장하는 일을 총괄했다. 1984년 가을, 두 분의 유해가 한 자리에 만난 것이다. 31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와 19년 전에 작고하신 어머니의 유해를 고향땅 한 자리에 모시면서 자식 된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돌아가신 두 분을 선산의 한 자리에 모시게 된 것은 퍽 다행한 일이었다. 합장의 예를 마친 우리는 늦었지만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두 분이 멀리 떨어져 계시게 하는 것도 죄송할 뿐더러 막상 자식 된 우리가 두 곳으로 성묘를 다니기도 불편했는데 이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산비탈 후미진 골짜기 
  강원도 영월군 북면 연덕리에서 모셔 온 
  삼십일 년 지난 아버님의 유해를 
  아산 기산리 양지 바른 선영 
  어머님 곁에 안장하던 날 

  가파른 세월의 하많은 이야기 
  못다 한 사랑을 조잘거리는 
  타향 외로운 멧새의 쉰 울음은 멎었을까 
  엉겅퀴 덤불에 검푸르게 자라던 
  슬픔 마디마디 맺힌 한은 얼마나 풀렸을까 

  얼룩진 날들을 가슴 저미며
  뜨거움으로 채색한 당신의 생애 
  무심한 채로 흘려보낸 날들이 
  이토록 후회롭고 
  그 위대한 모습 앞에 
  우리는 왜 그리 왜소하고 초라한지 

  이작도 사월의 푸른 파도와

  제천역앞의 칼날 같은 겨울 바람을

  고운 흙모래 속에

  한 뭉치 유품으로 정성껏 묻어 드리고

  돌아서는 발길에 밟히는 것은   여전히 죄스러울 뿐  

              
    - <합장의 예를 마치고>
에서  

          
  합장을 해 드린들 무엇하랴!  논어에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나무는 조용하고자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찬가지로 자식이 효도를 다하려고 해도 그때까지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부모가 살아 계실 때 효도하지 않으면 뒤에 한탄하게 되는 풍수지탄(風樹之嘆 )의 마음을 갖는 것은 모든 자식들의 어쩔 수 없는 심정일 것이다.  

 
    우리 4남매가 어울려 선산으로 성묘를 가는 날은 언제나 진한 그리움이 배어났다. 무덤 위에 난 잡초를 뽑기도 하고 잔디가 성치 않은 쪽은 잔디를 입히고 우리는 부모님 앞에 불효를 뉘우치며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동시에 형제애를 돈독하게 하는 날이 되기도 했다.  벌초는 해마다 선영에 이웃하여 살고 있는 6촌 형님 두 분과 동생이 맡아 해 주셨다. 한둘이 아니고 20여기도 넘는 산소를 해마다 형님과 동생이 맡아서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산을 지키는 것만도 고마운데 벌초까지 해 주는 두 형님과 동생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부모님의 산소는 우리가 하기로 마음먹고 몇 년 동안 계속했다. 어떤 때는 낫으로, 어떤 때는 예초기를 사용해 보기도 했지만 서툰 솜씨로 뜨거운 태양 아래 벌초를 하고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두어 시간 남짓 달려 와서 
 양지 바른 곳 아버님 어머님 뜰에 
 사남매가 나란히 섭니다.

 얼굴 한 번 보신 적 없는 
 사위 자부들까지 
 옛날 집 앞의 미루나무처럼 서 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 가슴 뭉클하여 
 두 손 모아 넙죽 큰 절을 올립니다. 

 외딴 섬 큰 바위 얼굴로 사신 아버님 
 긴 겨울 밤 촛불 밝혀 새우시던 어머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셨지만 
 우리는 늘 부끄러움인 채로 
 그 문 밖에서 하염없이
 눈물 같은 비에 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잔디밭에 핀 들꽃처럼 
 아버님 어머님 뜰에 
 한 떨기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겠습니다. 

 하늘보다 높으신 그 모습 우러러  
 사남매가 짝하여 서서 
 오늘은 한 아름 카네이션 붉은 꽃을 바칩니다.


    - <성묘> 전문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품으신 그 사랑, 그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으랴. 그러나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생각하며 부모 앞에서 늘 우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합장한 지 20년 만에 다시 부모님의 합장한 묘를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다. 하는 수 없이 나 자신의 가슴을 헤치는 마음으로 파묘(破墓)했다. 시신을 안장했던 자리에는 유해를 찾아볼 수 없었다. 59년, 39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유해는 흔적 없이 흙으로 돌아가 있었다. 주변의 흙을 수습하여 화장의 절차를 거쳐 가져온 단지를 받아들고 우리는 고향의 산언덕에 뿌려드렸다. 어둠이 내리는 저녁 부모님의 흔적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우리들의 발길은 여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영혼이 떠난 육신은 한 줌의 흙으로, 재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그 한 자리를 지키지 못한 아쉬움은 쉽게 떨칠 수 없었다. 


   시리도록 아파오는 눈가에 
   소리 없이 뚝뚝 떨어지는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목 메인 사랑일지라도
   우리는 역시 나뭇가지 끝에 잠시 머무는 
   겨울 햇살 같은 목숨들이매


   육신은 흙으로 
   영혼은 하늘로
   먼 길 혼자 떠나가는 것


   사랑이 이별로 돌아가듯이
   어느 날 침묵의 문을 열고 오는
   눈부신 아침을 다만

   믿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나무와 나무 위로 높은 하늘 아래 
   보고 싶은 얼굴 
   언젠가는 만나 보리라
   지그시 눈을 감네.

      - 졸고 <다만 믿음으로>에서



   이제 어찌 하겠는가?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궁핍의 시대를 한 몸에 안고 살아오신 아버님, 어머님 앞에서 자식으로서 끝내 산소마저 지키지 못한 죄송함과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었던 우리는 무릎 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침묵의 문을 열고 오는/ 눈부신 아침을 다만 믿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 이 세상의 옷을 벗고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그 모습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늘 그래왔듯이, 3월 18일(어머님 기일), 5월 24일(아버님 기일)에 우리 4남매 가족은 어김없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날은 부모님의 삶을 추모하며 은덕을 기리는 동시에 또한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자녀로 살아가기를 굳게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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