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희덕15

못 위의 잠 / 나희덕 못 위의 잠 - 나희덕 ​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체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2020. 5. 14.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며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 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 2020. 5. 13.
어떤 출토(出土) / 나희덕 어떤 출토(出土)* - 나희덕 고추밭을 걷어 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 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 하려고 밭에 다시 가 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 《사라진 손바닥》(2004) 수록 ◎시어 풀이 *출토(出土) : 유물 등이 땅속에서 나옴. 또는 그것을 .. 2020. 5. 13.
푸른 밤 / 나희덕 <출처 : 다음카페 '문학광장'> 푸른 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2020. 5. 13.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벨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칼날을 베고 잠들던 날 탱자꽃 피어 있던 고향 집이 꿈에 보였다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도 함께 피워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가 환했다 꽃들을 지키려고 탱자는 가시를 가졌을까 지킬 것도 없이 얇아져 가는 나는 내 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데 탱자 꽃잎에도 제 가시에 찔린 흔적이 있다 침을 발라 탱자 가시를 손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어린 시절 바람이 와서 탱자 가시를 가져가고 살을 가져가고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나는 탱자 꽃잎보다도 얇아졌다 누구를 벨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 시집 《그곳이 .. 2020. 5. 12.
음지(陰地)의 꽃 / 나희덕 음지(陰地)의 꽃 - 나희덕 우리는 썩어가는 참나무 떼, 벌목*의 슬픔으로 서 있는 이 땅 패역*의 골짜기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겨울을 난다 함께 썩어갈수록 바람은 더 높은 곳에서 우리를 흔들고 이윽고 잠자던 홀씨들 일어나 우리 몸에 뚫렸던 상처마다 버섯이 피어난다 황홀한 음지의 .. 2020. 5. 11.
엘리베이터 / 나희덕 엘리베이터 - 나희덕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 병원 엘리베이터 타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 육중한 몸집을 들이밀며 한 아주머니가 타고 나자 엘리베이터 안은 빽빽한 모판*이 되어 버렸다 11층, 9층, 7층, 5층 …… 문이 열릴 때마다 조금씩 헐거워지는 모판, 갑자기 짝수 층 엘리베이터에서 울음소리 들려온다 누구일까, 어젯밤 중환자실 앞에서 울던 그 가족일까, 모판 위의 삶을 실은 홀수 층 엘리베이터와 칠성판* 위의 죽음을 실은 짝수 층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만난다,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족들과 짝수 층 엘리베이터에 실린 죽음을 홀수 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흰 헝겊으로 들씌워진 한 사람만 짝수 층 엘리베이터에 남고, 문이 닫히고, 잠시 후 B1에 불이 들어온다, 그새*.. 2020. 5. 11.
속리산에서 / 나희덕 속리산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길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 2020. 5. 11.
땅끝 / 나희덕 땅끝 - 나희덕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좇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 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 2020. 5. 11.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200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2020. 5. 10.
귀뚜라미 / 나희덕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의 화자인 귀뚜라미는 매미 떼의 소리에 묻혀 아직은 자신의 울음이 노래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울음이 누군가에게 .. 2020. 5. 10.
뿌리에게 / 나희덕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이영대(베레미아)의 시집'> 뿌리에게 -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 2020. 5. 10.
배추의 마음 / 나희덕 배추의 마음 - 나희덕 네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 늦가을 배추 포기 묶어 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 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배추’를 키우면서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자연과.. 2020. 5. 9.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일러스트 잠산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 2020. 2. 8.
사랑시[37] :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37]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 일러스트=클로이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 2008.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