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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8

강우(降雨) / 김춘수 강우(降雨) - 김춘수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뼘 두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 시집 《거울 속의 천사》(2001) 수록 ◎시어 풀이 *넙치지지미 : 넙치를 밀가루에 묻혀서 기름에 튀긴 음식. *담괴 : 담(痰)이 살가죽 속에 뭉쳐서 생긴 멍울.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아내의.. 2020. 5. 7.
능금 / 김춘수 능금 -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시집 《꽃의 소묘(素描)》(195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능금’이.. 2020. 5. 7.
내가 만난 이중섭 / 김춘수 <사진 : 이중섭이 일본의 아내에게 보내 편지> 내가 만난 이중섭 - 김춘수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2020. 5. 6.
능금 / 김춘수 능금 - 김춘수 Ⅰ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Ⅱ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愛撫)의 눈짓을 보낸다. Ⅲ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꽃의 소묘(素描)》(1959)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능금'이 익어 가는 자.. 2020. 3. 13.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精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 - 《김춘수 시전집》(1976) ​ *샤갈 :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화가(1887~1985). 풍부한 개인적 경험을 화려한 색채와 환상적인 화풍으로 표현함으로써 초현실주의 미술에 영향을 끼침. *관자놀이 : 귀와 눈 사이의 맥박이 뛰는 곳. *쥐똥만 한 :.. 2020. 3. 13.
꽃을 위한 서시(序詩) /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序詩) -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 (1957)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꽃’은 인식의 대상이자 존재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심오한 철학적 문제를 구체적인 시어를 사용하여 형상화함으로써 존재의 참모습을 인식하고자 하는 욕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화자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지만 끝내 알아내지.. 2020. 3. 12.
꽃 / 김춘수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시와 시론》 (1952>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52년 《시와 시론》에 발표된 김춘수의 연작시 중 하나로, ‘꽃’을 제재로 하여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 갈망과 진정한 인간관계 형성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누군가 자신의 본질에 맞는 이름을 불러 주기를 원하고 있으며, 사물의.. 2020. 3. 12.
꽃 / 김춘수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 2020.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