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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9

사랑 / 김수영 사랑 - 김수영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 《거대한 뿌리》(1993)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풍부한 서정적 정감보다는 분석적이고 주지적인 시풍을 줄곧 유지했던 김수영 시인의 몇 안 되는 서정시 중의 대표적인 ‘사랑 시’이다. 그는 주로 감성보다는 지성에 토대하여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의 렌즈를 많이 써 온 시인이었기에 이 작품은 오히려 신선미를 느끼게 한다. 그는 이 시에서 사랑의 모순을 나타내고 있다. ‘어둠’이나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은 마치 영원불변할 것 같지만, ‘번개’처럼 환해졌다가 금세 어두워.. 2020. 3. 11.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詩人)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自由)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거대한 뿌리》(1974) ▲이해와 감상 이 시는 4·19혁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발표 직후 쓴 작품으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고 ‘혁명은 고독’한 것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투쟁과 고통이 따르는 것이며, 혁명은 투쟁과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감정의 절제를 통해서 자유와 혁명.. 2020. 3. 11.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野戰病院)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 2020. 3. 10.
파밭 가에서 / 김수영 파밭 가에서 - 김수영 ​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먼지 앉은 석경(石鏡)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 《자유문학》(1960) 석경(石鏡) : 유리로 만든 거울. 조로 : 물뿌리개, 포르투갈 어인 ‘조로(jorro)’에서 유래한 말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새싹이 흙을 뚫고 나오는 ‘파밭’을 통해, 과거의 묵음 것을 버림으로써 새.. 2020. 3. 10.
풀 / 김수영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창작과 비평》(1968)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김수영 시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발표한 유작(遺作)으로, 나약한 속성을 지니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풀’을 제재로 하여 고통을 받고 살아온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풀’이 온갖 시련 속에서도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라는 기대를 ‘풀’과 .. 2020. 3. 10.
폭포 / 김수영 폭포 -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평화에의 증언》(1957) 고매한 : 인격이나 품성, 학식, 재질 따위가 높고 빼어난. 금잔화 : 국화과의 한해살이 꽃. 나타(懶惰) : 나태. 행동, 성격 따위가 느리고 게으름. ▲이해와 감상 폭포는 우렁찬 소리를.. 2020. 3. 10.
눈 / 김수영 눈 -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문학 예술》(1956)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순수를 표상하는 ‘눈’을 제재로 하여 순수하고 정의로운 삶에 대한 소망과 부정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눈’은 순수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화자는 ‘눈’과 ‘가래’를 대립적인 관계로 보고, 기침하여 가래를.. 2020. 3. 9.
풀 / 김수영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 2020. 2. 9.
사랑시[32] : 거미 - 김수영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32] 거미 - 김수영 ▲ 일러스트=이상진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 2008. 10.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