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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8

받들어 꽃 / 곽재구 받들어 꽃 - 곽재구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미사일 받아라 끝내는 좋다 원자폭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 아름을 골라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 2020. 4. 15.
고향 / 곽재구 고향 - 곽재구 흐린 새벽 감나무골 오막돌집 몇 잎 치자꽃 등불 켜고 산자락에 모이고 깜장 구들 몇 장 서리 내린 송지댁네 외양간 선머슴 십 년 착한 바깥양반 콩대를 다둑이며 쇠죽을 쑤고 약수골 신새벽 꿈길을 출렁이며 송지덕 항아리에 물 붓는 소리 에헤라 나는 보지 못했네 에헤라 나는 듣지 못했네 손시려 송지택 구들 곁에 쭈그린 동안 선머슴 십 년 착한 바깥양반 생솔 부지깽이 아내에게 넘겨주고 쓱싹쓱싹 함지박이 쌀 씻는 모습 쪼륵쪼륵 양은냄비에 뜨물 받는 소리 에헤라 대학 나온 광주 양반에게서도 에헤라 유학 마친 서울 양반에게서도 나는 보지 못하였네 듣지 못하였네 - 시집 《사평역에서》(1983) ◎시어 풀이 ·오막돌집 : ‘오막’과 ‘돌집’을 합한 것. ‘오막’은 오두막의 준말, 사람이 겨우 들어가 살.. 2020. 4. 15.
전장포 아리랑 / 곽재구 전장포 아리랑 - 곽재구 아리랑 전장포 앞바다에 웬 눈물방울 이리 많은지 각이도 송이도 지나 안마도 가면서 반짝이는 반짝이는 우리나라 눈물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우리나라 사랑 보았네 재원도 부남도 지나 낙월도 흐르면서 한 오천 년 떠밀려 이 바다에 쫓기운 자그맣고 슬픈 우리나라 사랑들 보았네 꼬막 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 못나고 뒤엉긴 보리밭길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멸치 덤장 산마이 그물 너머 바람만 불어도 징징 울음 나고 손가락만 스쳐도 울음이 배어 나올 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 보았네 아리랑 전장포 앞바다에 웬 설움 이리 많은지 아리랑 아리랑 나리꽃 꺾어 섬 그늘에 띄우면서. - 출처 《사평역에서》 (1983) ◎시어 풀이 전장포 :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 있는 항구 이름 덤장 : 물고기가 다니는.. 2020. 4. 14.
20년 후의 가을 / 곽재구 20년 후의 가을 - 곽재구 내 어릴 적 산골학교 미술 시간에 나는 푸른 크레용으로 옥토끼 모양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그 안에 울긋불긋 우거진 단풍잎과 맑은 시내를 그렸었다. 산머루 향이 교실까지 날아들던 오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처녀 선생님은 가을 산꽃이 지고 해으름이 일고 그 가을내 나는 선생님의 눈물방울과 같은 단풍잎과 맑은 시냇물 속에 뛰놀았지만 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선생의 뒷모습과 나를 쳐다보던 충혈된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단풍잎은 지고 세월은 가고 이제는 선생이 된 내 앞에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린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슬픔의 푸른 크레용으로 둘러친 동강 난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이들은 평상의 얼굴로 반쪽의 땅 위에 단풍잎을 채우고 나는 충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 2020. 4. 14.
구두 한 켤레의 시(詩) / 곽재구 구두 한 켤레의 시(詩) - 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 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판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 소리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 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 소리를 들려준다.. 2020. 4. 14.
새벽 편지 / 곽재구 새벽 편지 - 곽재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 시집 《전장포 아리랑》(1985) 수록 ◎시어 풀이 정령 : ①.. 2020. 4. 14.
사평역에서 / 곽재구 사평역에서 - 곽재구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2020. 4. 13.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내면 .. 2020.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