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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6

고고(孤高) / 김종길 고고(孤高) - 김종길 북한산이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 다음 겨울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밤사이 눈이 내린, 그것도 백운대나 인수봉 같은 높은 봉우리만이 옅은 화장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왼 산은 차가운 수묵(水墨)으로 젖어 있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신록이나 단풍,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래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積雪)로는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는 장밋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 그 고고(孤高)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 시집 《하회에서》 (1977) 수록 ◎시어 풀이 *수묵(水墨) : 이 엷은 먹물.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고고한 삶의 자세와 정신세계에 대한 지향(의지.. 2020. 5. 4.
솔개 / 김종길 솔개 -안동에서 - 김종길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임청각(臨淸閣)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朔風)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 《달맞이꽃》(1997) 수록 *헛제사밥 : 제사를 지내지는 않지만, 제사 음식처럼 차려 먹는 밥. 깨소금, 간장 따위를 넣어서 비벼 먹는다. *임청각(臨淸閣) :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형 별당건축, 독립운동가 이상용의 거처 .. 2020. 3. 12.
자전거 / 김종길 자전거   - 김종길    내리막길에는 가속(加速)이 붙는다. 발은 페달에 올려놓으면 된다.   그러나 균형은 잡아야 한다. 무엇이 갑자기 뛰어들지도 모른다. 그런 뜻하지 않은 일에도 대비해야지.   그런데도 그런대로 편안한 내리막길, 바퀴살에 부서져 튕기는 햇살, 찌렁찌렁 울리는 방울.   언덕길 밑바지에선 해가 저물고 결국은, 결국은 쓰러질 줄 알면서도, 관성(慣性)에 몸을 실어, 제법 상쾌하게,   가을 석양(夕陽)의 언덕길을 굴러 내려간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가면서, 지그시 브레이크도 걸어보면서.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석양의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는 상황을 인생의 황혼기에 유추함으로써 노년기의 죽음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삶의 태도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 2020. 3. 11.
고갯길 / 김종길 고갯길 - 김종길 시골 옛집 앞을 지나 뒷산 등성이를 오늘은 상여(喪輿)로 넘으시는 아버지. 낯익은 고갯길엔 마른풀 희게 우거졌고 이른 봄 찬 날씨에 허허로운 솔바람 소리. -아버지, 생전(生前)에 이 고갯길을 몇 번이나 숨차시게, 숨차시게 넘으셨던가요? ▲이해와 감상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절제된 언어와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짧고 간결한 언어 표현과 서리를 뒤집어써 하얗게 우거진 마른풀의 모습, 차가운 봄 날씨, 허허로운 솔바람 소리 등의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아버지를 잃은 화자의 슬픔을 잘 드러내고 있다. ​ 시에는 현란한 어휘나 특별한 표현 기교가 없다. 그저 아버지의 상여를 따라 고갯길을 오르다가 문득 아버지를 생각하는 솔직한 마음만 그려져 있다. 그런 소박한 화자의 마음이 오.. 2020. 3. 11.
성탄제 / 김종길 <사진 : 눈이 덮여있는 산수유 열매> 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 2020. 3. 11.
성탄제 / 김종길 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 2020.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