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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 / 김종길

by 혜강(惠江) 2020. 3. 11.


<사진 : 눈이 덮여있는 산수유 열매>



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성탄제(1969)


<시어 풀이>

성탄제 : 성탄절
산수유 : 산수유나무의 열매, 강장(强壯)의 효과가 있는 약재
,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화자는 성탄일의 추억을 제재로 하여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보여 준 헌신적인 사랑을 회상하면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의 화자는 성탄일 무렵의 각박한 도시에서 옛날과 다름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 아픈 자신을 위해 눈 속을 헤치고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 오신 아버지의 헌신적 사랑에 대해 그리워하고 있다.

 

  이 시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 도시와 시골이라 배경의 대칭 구조가 드러나 있고, 색채 대비를 통해 선명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전체 10연 중에서 7연을 분기점으로 하여 전반부에는 화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후반부에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어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대칭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 시는 10개의 연이 시간적 추이 과정에 따라 전개되고 있으며, 16연의 유년 시절의 체험과 710연의 어른이 된 화자의 체험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서도 4연과 6연은 그 시간적 전개에서 제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이 '산수유 열매'''을 대비시켜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고도의 시적 장치로 볼 수 있다.


   1~6연까지의 전반부를 보면 어린 시절의 화자는 열병을 앓고 있었으며,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온 붉은 산수유 열매(해열제)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생각한다. 여기서 '붉은 산수유 열매'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는 어린 아들을 위해 고난을 무릅쓰고 따 온신 것으로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담겨 있다.


   후반부에서는 어른으로서의 화자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계승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계기는 성탄제 가까운 어느 날 서른 살의 성인이 된 화자의 이마에 와 닿는 눈의 서느런감촉이다. 이 감촉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연상케 하는 회상의 매개체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본연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흥청거리는 도시의 성탄절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체험을 소개하면서 아버지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편적이고 숭고한 의미로 숭고한 의미로 승화시키도 있다.

 

  김종길 시의 뿌리를 이루는 것은 유가적(儒家的) 전통이다. 그의 시의 특성인 절제된 감정과 시어, 명징한 이미지와 고전적 품격 등은 모두 유가적 덕목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보여 주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결국 그의 이런 근본에서 자라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부모의 은덕을 효로 보답해야 한다는 효제(孝悌)의 원리를 절로 떠오르게 하는 아버지이며, 화자는 그런 아버지로 표상되는 애정 넘치는 과거의 생활상을 그리워하고 있다.


 

 작자 김종길(金宗吉, 1926~2017)

 

  시인이며 영문학자. 경북 안동 출생. 본명은 김치규. 1947경향신문신춘문예에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시의 소재를 얻으며, 열띤 감정이나 감상, 혼돈에 젖지 않는 시풍을 이룬다. 시집으로 성탄제(1969), 하회에서(1977), 황사 현상(1986), 해거름 이삭줍기(2008) 등이 있다. 대표작으로는 <성탄제>, <고갯길>, <자전거> 등이 있다.


  성탄제는 극심한 고통으로 사경을 헤매는 어린 화자에게 도움을 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어른이 되어 깊이 회상하는 것을 형상화한 작품이며, 고갯길은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절제된 언어와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짦고 간결한 언어 표현과 서리를 뒤집어써 하얗게 우거진 마른 풀의 모습, 차가운 봄 날씨, 허허로운 솔바람 소리 등의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아버지를 잃은 화자의 슬픔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국시인협회장과 고려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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