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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by 혜강(惠江) 2020. 8. 16.

 

 

 

 

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음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다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 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를 밀항(密航)*하는 정크*와 같아

  소금에 쩔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과 싸워 가고

  전설(傳說)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 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빈저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 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에워 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인 양

  다 삭아 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을 들여다보며

 

 

     - 《자오선(子午線)》 창간호(1937) 수록

 

 

►시어 풀이

 

*노정기(路程記) : 여행할 길의 거리·경로를 적은 기록.

*구죽죽한 : 굴 껍데기 등이 쌓여 지저분한.

*포범(布帆) : 베로 만든 돛.

*밀항(密航) : 절차나 밟거나 운임을 내지 않고 몰래 해외로 항행하는 일.

*정크(junk) : 연해나 하천에서 승객이나 화물을 실어 나르는 데 쓰는, 특수하게 생긴 배.

*조수(潮水) : 일정한 시간을 두고 주기적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바닷물.

*암초(暗礁) : 물속에 숨어 있어 보이지 않는 바위.

*산호도(珊瑚島) : 산호초가 수면 위로 5m 이상 노출되어 형성된 섬.

*남십자성(南十字星) : 남십자자리에 있는, ‘十’ 자 모양을 이루는 네 개의 별.

*빈저주도 : 비추어주지도

*시궁치 : 시궁의 근처. ‘시궁’은 더러운 물이 빠지지 않고 썩어서 질척질척하게 된 도랑. ‘시궁발치’의 준말.

*노정(路程) : 거쳐 지나가는 길이나 과정.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노정기(路程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지나온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는 내용으로, 화자는 과거의 삶을 고통스러운 항해에 비유하여 어둠 속을 걸으며 쫓기며 살아온 삶의 비애를 형상화한 작픔이다.

 

  전체가 5연 15행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립적인 시어들이 화자의 현재와 이상의 괴리를 보여주고 있다. ‘뱃조각’, ‘어촌’, ‘밤’, ‘암초’, ’태풍‘, ‘포범(布帆)’, ‘시궁치’ 같은 시어들이 시인의 부정적 현실을 보여준다면, ‘산호도’, ‘남십자성’, ‘지평선’ 같은 단어들은 힘든 삶 가운데서도 한 줄기 빛으로서 희망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듯 대립하는 시어들의 상징성을 통해 삶의 역경과 희망을 병치시키면서,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각 연은 3행으로 구성되어 마지막 행은 ‘~(ㅆ)다‘의 과거형으로 종결되어 지나온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는 형태이며, 마지막 5연에서는 2행과 3행을 도치시켜 형태상의 변화를 주었다. 1연에서는 '목숨'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깨어진 뱃조각'이라고 묘사하고, ‘티끌’처럼 뚜렷한 결과 없이 지나온 삶의 모습만 낡은 ‘돛’처럼 나부끼는 어촌의 풍경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암울한 현실과 고통스러운 화자의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2연에서는 행복해야 할 젊은 시절이지만, ‘서해를 밀항하는 정크와 같아/ 소금에 쩔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라고 표현하여, 고통이 가득한 현실에서 불안하게 살아왔음을 진술하고 있다. 3연에서는 벗어나려 해도 언제나 계속되는 ’암초’와 ’태풍‘과도 같은 장애물(시련과 고난) 때문에 희망의 어떤 기미도 찾을 수 없는 절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산호도‘나 ’남십자성‘은 화자가 지향하는 ’이상향과 희망을 상징하는 시어로서 이 시가 창작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조국의 광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보이지 않는 상황은 화자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은 고통일 뿐이다. 4연에서는 힘든 삶에 지쳐서 밝은 미래를 꿈꾸었으나 언제나 암울한 삶이 자신의 발목을 끌어당겼음을 서술한다. ‘지평선’은 화자가 가고자 하는 상황으로 앞 연의 ‘산호도’나 ‘남십자성’과 이미지를 같이한다. 그런데 지평선을 향해 노력해도 시궁창 같은 현실에 빠져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5연에서는 상처와 아픔뿐인 지난 과거의 삶을 돌아보며, 지금의 자신의 삶을 '거미'라는 소재로 비유하여 ‘삭아 빠진 소라 껍질’에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채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 척박한 현실 속에 살아온 삶의 유전(流轉)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시인의 실제 현실과 연관 지어보면 일제 강점기 조국을 빼앗기고 쫓기듯 살아온 시인 이육사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의미한다. ‘흐릿한 밤’으로 묘사된 비극적이고 어두운 시대 현실을 독백적인 어조로 읊조리면서 자신을 ‘배’로 환치시키고, 힘든 삶에 지쳐서 밝은 미래를 꿈꾸었으나 언제나 암울한 삶이 자신의 발목을 끌어당겨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채 괴롭게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의 다른 시 <자야곡(子夜曲)>과 닮아 있다.

 

 

▲작자 이육사(李陸史, 1904~1944)

 

 

  시인 · 독립운동가. 경북 안동 출생. 본명은 원록(源綠). 육사라는 이름은 형무소 수인 번호 264에서 따온 것. 일제 강점기에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추고 있던 이육사는 생애 후반에는 총칼 대신 문학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애국지사였다. 수십 차례 검거 구금되었고, 1944년 1월 16일 40의 나이로 이국 땅 베이징의 감옥에서 순국했다.

 

   1933년 <황혼>로 등단하여 1937년 《오선》 동인으로 잠시 활약했다.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시풍으로 일제 강점기 민족의 비극과 저항 의지를 노래하였다. 웅장하고 활달한 상상력과 남성적이고 지사적인 절조와 품격을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 <절정>, <광야>, <꽃>, <청포도> 등이 있으며, 그의 사후에 출판된 유고 시집 《육사 시집》(1946)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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