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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도산공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이 깃든 시민 문화 공간

by 혜강(惠江) 2018. 3. 10.

 

 

도산공원

 

도심 속, 도산의 정신이 깃든 시민 문화 공간

 

- 도산 안창호기념관과 도산 안창호 묘소 -

 

 

글·사진 남상학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 

 

 

 

▲ 도산공원 내  도산안창호기념관 

 

 

  3월 접어들어 햇빛 따스한 날 도산공원 근처 나들이를 했다. 나들이라기보다는 미국에서 공부하던 조카 자매가 귀국하여 도산공원 근처에 영어독서실 「we create」를 오픈하기 전 구경을 오라기에 나선 것이다. 깔끔하게 꾸며놓은 독서실 안팎을 구경한 뒤 점심을 먹고 나온 김에 도산공원을 산책했다. 

 

 

  도산공원은 화려한 건물과 자동차로 즐비한 강남 한복판 (강남구 신사동 강남구 도산대로45길 20)에 자리한 공원으로 잠시 쉬었다 가기에 좋은 휴식 공간이다. 아담한 규모로 가볍게 산책하기 좋으며 공원 내부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1971년 8월 6일 공원으로 지정하였고, 1973년 11월 10일에 개장하였다. 공원 이름은 안창호 선생의 아호인 '도산(島山)'에서 따온 것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심과 교육정신을 기념하는 곳이어서 교육․문화공간이기도 하다. 

 

 

 

 

 

▲ 도산공원 입구

 

 

  1971년 8월 6일 공원으로 지정하였고, 1973년 11월 10일에 개장하였다. 공원 이름은 안창호 선생의 아호인 '도산(島山)'에서 따온 것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심과 교육정신을 기념하는 곳이어서 교육․문화공간이기도 하다. 공원면적은 29,974㎡으로 강남구 내 공원 중에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강남 지역에서 중요한 녹지 공간 역할을 하고 있으며, 평지형 공원으로써 활용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도산(島山)’이란 호는 안창호 선생이 인천항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 갈 때 갑판에서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하와이를 바라보고 지었다고 한다. 선생은 섬마을에서 태어난 까닭에 남달리 섬을 좋아해서 ‘도산’이라 하였는데 함석헌은 도산을 '섬산'이라고 불렀다.

 

 공원 내 주요시설로는 도산 안창호기념관, 안창호 선생 부부묘, 동상, 산책로를 따라 어록비 가 있고, 도산기상(島山氣像) 돌비 등이 있다. 공원 경계는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다.

 

 

도산기상(島山氣象) 돌비와 동상

 

 

 

▲ 도산공원 내의 도산기상 돌비

 

 

 도산기상 돌비는 정문에서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서 있다. 도산기상은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 도산 선생이 한국을 세계사의 중심무대에 우뚝 솟은 부강과 도의의 새로운 민주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 민족에게 5대 정신을 강조하였다. 5대정신은 1.자주정신 2.진리정신 3.협동정신 4.개조정신 5.애국정신이었다.

 

 

 

▲ 도산의 '5대 정신'

 

 

 그 비 앞에 서면, “당신은 이 나라의 주인입니까?”(자주정신) 묻는다. 이어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진리정신)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소.”(협동정신) “나는 사람을 가리키어 개조하는 동물이라고 하오.”(개조정신),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소.”(애국정신) 이 도산의 말씀은 오늘을 사는 나 자신에게 큰 깨우침으로 다가왔다.

 

 

 

 

 

 도산공원 동쪽에는 1973년 11월 10일, 도산 안창호 선생의 95회 탄신기념일을 맞아 기념사업회에서 제막한 도산 선생의 동상을 서있다. 5m 높이의 동상 아래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올곧은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리라” 찾는 이들로 하여금 선생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느끼게 한다. 

 

 

도산정신의 모든 것을 담은 기념관의 개관

 

 도산정신의 산실인 도산 안창호기념관은 정문 안 우측에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 탄신 120주년을 맞아 도산공원 안에 도산 안창호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도산기념관은 도산기념사업회(회장 강영훈)에서 기념관의 건립을 통해 시대적으로 메말라 있는 애국심 고취와 청소년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하여 건립되었다.

 

 

 

 

 

 

 

 도산 공원 안 도산 안창호 기념관에서는 도산의 생애와 사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사진

71점과 신채호 선생이 미국에 있는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 등 편지 19점, 흥사단에서 활동할 때 작성한 문서 48점, 임시정부 사료집, 도산일기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도산어록, 연보와 사진은 터치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왼손을 양복바지 에 넣고 서 있는 도산 안창호의 동상이 있고 기념관에 들어서기 전 입구에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도산 선생의 좌상과 사진이 먼저 맞이한다. 도입부는 선생의 흉상과 사진, 연보와 어록, 독립운동 방향 등을 통하여 관람객이 선생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 1919. 11. 19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촬영한 사진 (좌로부터 김구, 안창호, 이탁)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다” (도산 안창호)

 

  이 말은 도산이 대한의 독립을 위해 평생 애쓰고 헌신하였음을 일러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기애타(愛己愛他)’ 즉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라” 이것은 민주주의 공동체가 지녀야 할, 계승시켜야 할 보편적 가치이다. 그 말 속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성찰이 담겨 있다. 도산은 당시 한민족이 처한 불행에 대해서도 자기성찰을 통해 해답을 찾고자 했다. 나아가 나 자신을 뛰어넘어 한민족이 처한 불행을 ‘내 것’으로 여기며 남을 사랑하고자 하는 정신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기애타(愛己愛他)’ 즉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라”는 가르침

 

 

 전시실로 들어서면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다”는 도산의 말이 사진과 함께 들어온다,

 

 전시실 벽면은 선생의 생애를 <성장과 구국운동기>,<미주활동기>,<임시정부와 대독립당활동기>, <국내활동과 서거>로 구분하여 각종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시대별로 도산의 활동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전시실 입구에 전시된 도산 관련 서적과 기념사업회 홍보물

 

 

▲ 도산 안창호의 연표

 

 

  <성장과 구국운동기>는 출생과 성장, 독립협회의 활동, 1차 도미와 한인친목회 공립협회 활동, 신민회 활동과 독립운동기지 개척 상황을 전시했다. 

 <미주활동기>는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으로 구분하고, 미주교포의 단합과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상을 전시하고 있다.  

<임시정부와 대독립당 활동>은 임시정부를 위한 선생의 활동, 이상촌 건설과 대독립당운동으로 구분하고 있다.  

<국내활동과 서거>는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 의거로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 4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한 사건, 동우회 사건으로 형무소에 수감된 사건, 지병으로 출감하여 이듬해 서거함으로써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한 사실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서 민족을 위해 살다간 도산 안창호는 생애와 활동사항을 정리해 보았다.

 

 

⊙ 성장과 구국운동기

 

 

 

⊙ 성장과 구국운동기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 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호는 도산(島山). 평안남도 강서 출신. 안흥국(安興國)의 셋째아들이다.

 

 1878년 11월 9일, 평양근교에서 태어난 도산 안창호 선생은 만 19세의 나이로 독립협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일생을 오로지 근대화 운동과 독립운동에 바쳤다. 인재양성과 경제번영을 민족발전의 기초로 여긴 선생은 일찍부터 교육과 산업에 힘을 기울였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을 바탕으로 1899년 점진학교, 1908년 대성학교(大成學校), 1926년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또 흥사단(興士團), 북미실업회사(北美實業會社) 등 여러 기관을 만들고 지도하였다.

 

 

 

 

▲ 출생에서부터 1차도미전가지의 <성장과 구국운동기>

 

 

⊙ 미주활동기

 

 1902년 이혜련과 결혼한 안창호는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1차로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기울어가는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자 1907년 국내로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동지들을 결집하여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실질적으로 이끌며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안중근 의사의 이도 히로부미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도산을 배후 혐의로 체포하고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더 이상 국내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도산은 애국지사들과 함께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1910년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도망친 도산은 중국, 러시아, 독일,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1912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가 발족한 뒤에는 총회장으로 활약하며 해외 한인사회를 결집하여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1913년 도산은 민족운동을 담당할 중견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였다.

 

 

 

 

 

⊙ 임시정부와 대독립당 활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도산은 상해에 도착하여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하였다. <독립신문>을 발간하며 국내, 상해, 러시아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통합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며 흥사단 활동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한편으로는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창도하여 지도이념을 체계화하고 지도자들의 대동단결을 강조했다. 또 1930년에는 상해에서 최초의 정당조직체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결성하였다.

 

 

 

▲ 도산의 가족은 부인 이혜련 여사와 자녀로는 안필립, 안필선, 안수산, 안수라, 안필영 등 5남매를 두었다.

 

 

  아래 편지는 1920년 8월, 홍콩에서 미국에 있는 큰아들 필립에게 보낸 것이다. 아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힘쓰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이 편지는 자상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읽는 이에게 큰 감동을 준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필립 

어머니의 편지를 본즉 네가 넘어져 팔이 상하였다 하니 매우 놀랍고 걱정된다. 네 팔이 낫는대로 내게 곧 알리어라. 네가 소학교에서 중학교 일반을 마친 것을 기뻐하노라. 나는 평안하고 이번 미국에서 동양에 놀러 나온 미국 상의원과 하의원들을 만나려고 홍콩에 왔다가 그이들이 이곳에 오지 아니함으로 만나지 못하고 수히 상해로 돌아가겠노라. 내 아들 필립아, 이왕에도 말하였거니와 너는 나의 점점 많고 키가 자라고 몸이 굵어지니 전날 나이 어리고 몸이 적을 때보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쓸 줄 아노라. 내 눈으로 네가 스스로 좋은 사람 되려고 힘쓰는 모양을 매우 보고 싶다. 너의 근본 성품이 속이지 않고 거짓말 아니 하고 진실하니 이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좋은 사람되기가 쉬우리라고 생각한다. 좋은 사람됨에는 진실하고 깨끗한 것이 첫째임이리니 너는 스스로 부지런한 것과 어려운 것을 잘 견디는 것을 연습하여라. 네가 책을 부지런히 보느냐? 쉬지 말고 보아라. 그러나 아무 책이나 마구 보지 말고 특별히 좋은 책을 택하여 보아라. 좋은 사람 되는 법이 좋은 친구를 잘 기르어 두며 좋은 책을 잘 가리어 보는 두 가지가 매우 요긴하니라. 두 종류의 책을 택하라. 첫째는 좋은 사람들의 사적과 인격을 수양하는데 관한 책이요. 둘째는 네가 목적하고 배우는 지식을 돕는 데 관한 책이다. 이 두가지 성질을 표준하여 책을 보고 한국 글과 말을 잘익혀라. 내가 주는 말은 네가 즐거운 마음으로 받을 줄 믿노라.”  

 

 참고로 안필립은 할리우드 1세대 배우로 한국계로는 유일하게 LA 할리우드의 워크 오브 페임(Hollyeood Walk of Fame)에 이름(손도장)을 남긴 첫 번째 한국인이 되었다. 현재에도 이 분 외에는 한국인이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남긴 사례는 없다.

 

 

⊙ 국내 활동과 서거

 

그러나 도산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그 해 6월 국내로 호송되어 4년 실형을 언도받았고, 대전 감옥에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1935년 2월 가출옥하였다.

 

도산은 1932년 1월 16일, 도산 선생이 체포되기 백일 전 상해에서 미주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일제에 의해 체포될 것을 예상이라도 했듯이 오직 혁명을 위하여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뿐이라는 비감한 심정을 적어 보냈다.

 

“나의 사랑 하는 아내

당신의 친수로 써 보낸 편지를 받아 읽으니 반가운 생각이 있는 동시에 슬픈 마음도 많습니다. 나는 남편의 직분, 아비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아내와 자식을 고생시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심히 괴롭습니다. 필선까지 공부를 못한다 하니 더욱이 괴롭고 부끄럽습니다. 나는 당신을 무엇으로 위로할는지 생각이 막연합니다. 내가 일찍 우리 민족에게 몸을 바치고 일하느라고 집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나 민족에게도 크게 공헌한 것이 없으니 두루 생각할수록 죄송한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이제 하던 집을 버리고 집을 돌아볼 수 없는 것은 당신도 잘 이해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일찍 모든 것을 희생하고 우리 민족을 위하여 일하기로 작정한지 오래였고 가정의 행복을 희생한 지 오래였을 뿐더러 당신도 우리 민족을 위하여 희생을 당하는 바이라, 이미 혁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작성하고 오랫동안 희생을 달게 여기어 온 바에, 이제 어떤 고통을 받든지 어찌 원망할 것이 있으리오. 나는 더욱이 여러 동지와 동포에게 빚진 것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다시는 집이나 무엇이나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여지가 없고 오직 혁명을 위하여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뿐입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까지도 혁명의 정신을 넣어주기를 힘쓰소서. 금년 안으로 미주에 건너가려고 하나 아직은 시간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나의 몸은 좀 쇠약하나 특별한 병은 없으니 염려마소서. ”

 

  도산선생이 일본에게 납치되기 백일 전, 상해에서 미국에 있는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무엇보다 아내 홀로 아이들을 돌보게 한 미안함이 배어있으면서도, 오직 혁명(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다지며 아이들에게도 혁명의 정신을 넣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1932년 안창호가 상해에서 체포된 뒤 부인에게 보낸 편지 

 

 

  츨옥 후 도산은 일본 경찰의 감시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ㅎ러약한 몸을 이끌고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하며, 고향 근처 대보산 송태산장에 기거하면서 동우회의 민족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그 죄로 체포당한 도산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얻은 얻은 병환으로 위급한 상태에 빠져 경성국제대학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8년 3월 10일, 만 6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홍사단 및 도산기념 사업회에서는 도산 안창호의 묘역에서 해마다 도산 선생 추모식을 갖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벽면 전시물을 구경하고 나니, 전시실 중앙에  수염을 깎지 않은 도산의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여위고 수염이 텁수룩한 것으로 보아 감옥에 투옥되어 고초를 겪고난 모습이다. 그 사진 아래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글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일본은 자기 힘에 지나치는

               큰 전쟁을 시작하였으니

               필경 이 전쟁으로 인하여 패망하오.

               아무런 곤란이 있더라도 인내하시오.”

 

 

  앞날을 예감했던 것일까? 자신은 죽음 앞에 의연하다면서도 동포들이 겪는 아픔에 괴로워하며, 전쟁이 곧 끝날 것이고 결국 일본은 패망할 것이니 그 때까지 인내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기념관을 나와 공원 산책길로 들어섰다.

 

   

 

도산 안창호 어록비

 

 

 

 

 

 산책로를 따라 세워놓은 도산의 어록비의 글을 읽어가노라면, 인격수양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므로 인격 수양에 힘쓸 것과 청년을 일깨우는 도산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이 외에도 산책길을 따라 어록비가 몇 개 더 있어서 산책하며 읽어볼 수 있다.

 

 

 

 

 

  “만일 사회를 개조하려면 먼저 스스로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개조해야 한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우리 청년은 태산 같은 큰일을 준비합시다. 낙심 말고 겁내지 말고 용감하고 대담하게 나아

   갑시다.”

 

  수차례의 수감생활,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죽음의 공포보다는 동포를 더 걱정하고 아파했던 도산 안창호의 애민사상과 독립정신에 고개가 숙여진다.

 

 

도산 안창호 부부가 잠든 묘

 

 

 

 

 

 

 

 

 

  도산 안창호 선생과 부인 이혜련 여사의 묘소와 1998년 개장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기념관을 꼽을 수 있다. 도산 안창호의 묘는 처음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이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옮겨와 합장하고 묘 앞에 묘비를 세웠다.

 

  안창호 선생의 묘소가 원래는 망우리 묘지에 있던 까닭은, 그곳이 흥사단 동지인 태허 유태규 선생이 안장된 곳이라 같은 곳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망우리 묘지에 있던 비석은 도산공원 안에 있는 도산기념관 지하로 옮겨 보관하다가, 2016년에 망우리 묘지의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웠다.

 

  공원 외부는 전면에 도산 안창호 선생의 호에서 유래된 도산대로와 공원과 도산대로를 잇는 150m 길이의 리버사이드 길이라 명명된 기념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3월 10일, 이곳에서 홍사단 및 도산기념 사업회 주관으로 도산 선생 추모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마침 추모 행사를 열기 며칠 전이어서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2018년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80주기를 맞는 해여서 김동길 박사를 초청하여 ‘민족 현실과 도산의 교훈’이라는 주제로 기념강좌(9일)를 개최하고 이어 10일에는 도산공원 내 도산 묘소에서 추모식을 갖고 기념관 전시관 리뉴얼 오픈행사를 펼친다.

  

◉ 정보

 

 

 

 

 

• 가는길 :

도보 :

-도산공원은 수도권 전철 3호선 압구정역과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에서 도보 10~15분(1 km)이면 찾아갈 수 있다. 도산대로에 위치한 CGV에서 270여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지하철 :

-3호선 압구정역 2번 출구로 나와서 버스 9407, 310, 2411, 440, 4212 탑승

-7호선 강남구청역 3번출구로 나와서 버스 3011번 타고 도산공원 하차, 혹은 4번 출구 뒤쪽에서 버스 301, 342 디자이너클럽 하차

 

• 주소 :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45길 20 (신사동 649-9)  

• 전화번호 : 02-541-1800

• 이용시간 : 24시간 개방

                  (도산기념관 평일 10:00∼16:00, 토요일,공휴일 10:00 - 14:00)

• 휴무일 : 연중무휴 (단, 도산기념관은 매주 일요일, 설, 추석연휴)

• 입장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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