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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4.19혁명기념관에서 4․19혁명의 전말(顚末)을 살펴보다.

by 혜강(惠江) 2018. 3. 24.

 


4.19혁명기념관에서

 

4․19혁명의 전말(顚末)을 살펴보다.

 

 

글·사진 남 상 학

 

 

▲ 국립4.9민주묘지 진입 광장에 세운 '민족의 뿌리' 탑 

 

 

4.19혁명기념관은 국립4.19민주묘지 안에 있다. 국립4·19민주묘지의 설립은 1961년 2월 당시 국무회의에서 공원묘지 설립이 결의와 함께 추진되었고, 이듬해인 1962년 기공식을 가졌다. 1963년 국립4·19묘지라는 명칭으로 준공식과 기념탑 제막식을 가졌다.

 

그 후 1993년부터 국립4·19민주묘지에 대한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고, 1995년에는 국가보훈처로 관리가 이전되었다. 1997년 4월 19일에는 전시공간인 4.19혁명기념관이 개관되었고, 2006년 현재의 명칭인 국립4·19민주묘지로 변경됨으로써 명실공이 우리나라 민주이념의 최고 성지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 국립4.19민주묘지 종합안내도

 

 

▲ 4월 학생혁명기념탑, 4월 혁명의 드높은 기상을 표현했다. 중앙의 분향소 좌우 날개는 혁명투사들의 군산(群象)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국립4.19민주묘지는 1960년 4월 19일 전후로 일어났던 4.19혁명에 참가했던 희생자들을 모시기 위해 만들었다. 총면적은 9만 6,837㎡이며, 성역공간과 사용공간은 상징문으로 구분된다. 이 중 성역공간은 2만 9,405㎡으로 이곳에 묘역과 유영봉안소, 4.19혁명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이밖에도 4월학생혁명기념탑, 수호예찬의 비, 수호자상, 군상부조, 정의의 불꽃과 같은 기념 조형물이 들어서 있다. 잘 정돈된 공간 안에 공들인 조경과 연못, 분수, 벤치 들이 배치하여 여느 공원 못지않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국립 4.19민주묘지를 대강 둘러보고 4·19혁명을 계승할 정신적 산 교육장으로 이용되는 4·19혁명기념관에 들러 전시된 자료들을 통해 4.19의 발생 원인과 그 정신을 찬찬이 따라가 본다.

 

 

4.19혁명기념관의 구성

 

 

 

 

▲ 4월혁명표지석과 기념관

 

4·19혁명기념관은 민주묘지의 아래쪽 우측에 자리 잡고 있다. 1,652.9m² 규모의 총 2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최신 기법의 전시실 기능을 갖추고 있다.

 

▲ 기념관 내부의 전시내용을 알려주는 안내판

 

 

▲ 현관 입구

 

 

1층에는 '그들의 몸짓, 소리 그리고 바람'이란 타이틀로 4.19 혁명의 배경과 내용을 영상매체로 형상화하여 전시하였다.

 

2층에는 '그들을 기억하고 공감한다'라는 타이틀로 4.19 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재평가에 대한 정보검색, 유물전시코너, 영상실·혁명의 유산·체험학습장 등이 마련되어 있다. 또 4.19묘지를 중심으로 한 수유동 북한산 기슭의 이준 열사, 손병희 선생 등 20여분의 애국지사 묘소 안내도 등이 있어 애국지사들에 대한 관심을 끌게 했다.

 

3층에는 전망대가 있어 의자에 앉거나 망원경을 통해 4.19민주묘역과 그 뒤로 펼쳐진 북한산의 아름다운 풍치를 감상하기에 좋다. 특히 관람객 편의 제공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여 장애인들도 아무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다. 

 

1층에 들어가는 복도 끝 벽에는 4.19 당시 희생된 민주열사들의 사진이 빼곡하게 박힌 게시물을 만난다. 1층에 일목요연하게 전시된 자료를 통하여 4.19 혁명의 배경과 내용을 정리해 본다.

 

 

▲ 기념관 1층 입구에 4.19민주열사의 사진이 타오르는 불꽃 형태로 설치되어 있다. '추모와 계승은 역사적 진실을 확인하고,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 1층 전시장은 4.19 혁명의 배경과 내용을 영상매체로 형상화하여 꾸몄다.

 

▲ '그들을 기억하고 공감한다'를 주제로 꾸민 2층의 한 부분

 

▲ 기념관 3층 전망대, 이곳에선 국립4.19민주묘지를 한 눈에 전망할 수 있다.

 

▲ 3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4월혁명기념탑과 우측 숲속에 자리잡은 유영봉안소 지붕이 희미하게 보인다.

 

 

1. 4.19혁명의 발생 배경 및 주요사건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피 비린내 나는 6·25전쟁을 겪어야 했다.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우리 국토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겨났으며, 우리 경제는 자생력을 잃고 말았다. 외국의 원조에 의존함으로써 물가는 자꾸 오르기만 하였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거리를 배회했다. 이 무렵,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미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를 재건하고 국가경제를 일으켜야 할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자신들의 장기집권을 꾀했다. 그 주요 사건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 개헌 (1952년)

 

이승만 정권은 1950년 5.3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2대 대통령의 당선이 어렵게 되자 재집권을 위해 간선제였던 헌법을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개헌안을 내놓은 동시에 세력기반 확충을 위해 자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개헌안이 부결되자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장택상을 임명했다.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데 이어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10여명을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하고 야당 회의장을 습격하고 국회의원 구속하는 80여 명을 연금하는 등 온갖 탄압을 가하여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었다. 이 헌법안은 정부안의 일부를 발체했다 하여 발췌개헌이라 한다. 1952년 7월 28일 비상계엄령이 해제되고 정치파동은 일단락되었다.

 

(2)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1954년)

 

이승만은 두 번 대통령을 지내 헌법상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게 되자 종신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주요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자유당 소속의원과 무소속의원 136명의 서명으로 9월 8일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표결 결과 가결 정족수는 국회의원 203명의 2/3인 135.33…명이었다. 가결 되려면 136명 136명의 찬성을 얻어야 하나 135명의 찬성표를 얻는데 그쳐 부결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정권은 이틀 후인 29일 4사5입의 수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개헌안을 불법으로 통과시켰다. 이것이 ‘4사5입개헌’이다.

 

 

(3) 정․부통령 선거 (1956년)

 

제1공화국 때인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로, 제2대 대통령 선거와 마찬가지로 국민이 직접 선거에 참여해 최다수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직접 선거 방식을 채택하였다. 후보자는 2선 대통령인 자유당의 이승만과 민주당의 신익희, 무소속의 조봉암이 출마하였다. 그러나 선거 운동 기간 중 신익희 후보가 뇌일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유효 투표가 투표자 총수의 79.5%에 지나지 않았다.

 

이승만 후보가 70.0%를 얻어 당선되었지만 무효표와 기권표가 많았던 것은 자유당 정권에 비판과 신익희 후보의 추모 투표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4) 국회의원 선거와 보안법 제정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유당이 참패하자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물론 보안법의 제정은 1948년에 발생하였던 여순사건을 계기로 하여 좌익세력의 폭동과 내란행위를 처단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기틀을 다지고 좌익세력을 제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이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반민주성의 강화와 더불어 법문상으로 뿐만 아니라 법운용상으로도 국민의 인권을 탄압하고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실제로 보안법은 언롱 규제와 국회를 탄압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고, 정부에 반대하는 자는 공산당으로 간주하며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들을 폐간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조치들은 집권을 연장하려는 술책이요, 부정선거도 불사하겠다는 의도였다.  

 

 

 

 

2.  4.19혁명의 전개과정

 

 

 

1층 벽면 게시물은 은 4.19혁명의 발생 배경 및 주요사건과 4.19의 전개과정을 상황별로 자세하게 보여준다.

 

 

(1) 2 ․ 28 대구 학생의거

 

1960년 2월 28일은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대통령 후보인 장 면(張勉)의 대구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부는 시민들의 집결을 막고자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시켜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에 동원하려 하였다.

 

이에 반발한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학생 8명은 하루 전날 이대우 경북고등학교 학생회장 집에 모여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결의문(경북고 3학년의 중퇴생이던 하청일이 초안을 작성)도 작성했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은 대구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도 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커졌고, 경북고 3학년인 학생회장 이대우는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 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요구하며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대구 시위는 3월 14일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어 서울, 부산, 대전, 원주, 청주, 충주, 포항의 고등학교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2.28 대구 학생의거는 고교생들이 주체이고, 계획적 조직 시위의 민족운동 요건을 갖춘 학생 운동이었으며, 불의와 부정선거에 대한 최초의 항거로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2)  3 · 15 부정선거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자 12년간 계속된 장기집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선거 조작을 계획하였다. 야당의 조병옥 후보가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너자 선거일을 2개월이나 앞당겼으나 조 후보가 미국에서 갑자기 사망해 이승만의 4선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켜 당시 85세인 이승만이 사망하면 모든 권력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공무원들을 총동원하여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경찰이 이를 감시하게 하며 온갖 부당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 4할(40%) 사전투표 및 투표함 바꿔치기

- 유권자 명부조작 및 사전 투표

- 득표수 조작 및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 야당 참관인 축출

- 자유당 완장부대와 깡패를 동원하여 유권자 위협하기

 

1960년 3월 15일, 마침내 정·부통령 선거 날이 밝았다. 한 마디로 사상 유례가 없는 계획적인 부정선거였다. 부정과 폭력이 난무한 선거는 끝이 났다.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표가 100% 가까이 나오자 내무부 장관은 득표수를 줄여서 발표하도록 했다. 결국 이승만 85%, 이기붕 73%로 당선자가 발표되었다. 이 날은 장기집권을 꿈꾸는 이들의 예정된 승리의 날이었다.

 

 

 

 

(3) 3 ․ 15 마산의거

-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군의 시체

 

3 ․ 15 부정선거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였다.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3월 15일 오후 부정선거를 폭로하고 선거무효를 외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를 강제 해산하기 위해 경찰이 총을 쏘며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10여 명이 사망하고 87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자유당 정권은 이 날 시위를 공산당 지하조직에 의한 폭동으로 몰고 갔다.

 

그 와중에 시위 중 행방불명된 16세인 김주열 군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김주열이 소속했던 마산상고를 포함해 인근의 많은 고등학교 학생들과 마산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여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2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경찰이 쏜 총에 2명이 사망하자 시위는 더욱 대규모로 확대되었고, 이승만 정권은 4월 12일 전국에 등교 중지령을 내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마산고, 마산상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동래고, 총합 3,000여명이 참가하였다.

 

 

 

 

 

 

 

 

(4) 4 ․ 18 고려대생들의 시위와 피습

 

4.18은 3.15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에 분노한 고려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이 고문을 뛰쳐나와 벌인 학생 시위이다. 이 시위를 ‘4.18 의거’라고도 부른다. 고려대생들은 "민주역적 몰아내자" “자유 ․ 정의 ․ 진리 드높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안암동에서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여 선언문을 낭독했다. 고려대 학생들은 “기성세대 반성하라”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각 처단하라”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 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 날 고려대 학생 4.18 선언문은 이렇다.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나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종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발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중략...)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투쟁의 전위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하겠다(...뒷줄 줄임)”

 

평화적으로 시위였지만 이들은 행진 도중 경찰의 곤봉에 맞아 여러 사람이 쓰러지기도 했다. 시위 중 연행되었던 학생들이 풀려나서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수많은 시민과 고교생들이 뒤따랐다. 시위 중 연행되었던 학생들이 풀려나서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수많은 시민과 고교생들이 뒤를 따랐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던 이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 경찰과 모의한 정치깡패 ‘반공청년단’의 무차별 습격을 받아 20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들이 정치깡패에 구타당하여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진이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이를 본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평화시위마저 폭력으로 진압한 정권에 대해 분노를 자아냈고, 고대생 피습사건을 계기로 자유당 정권은 걷잡을 수 없는 국민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날,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는 4․19혁명의 시발이라 할 수 있다.

 

 

 

 

 

 

 

▲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은 민중의 선두에 서서 4.19를 이끌었다.

 

 

 

(5) ‘피의 화요일’ 1960년 4월 19일

- 드디어 성난 시민들이 총궐기하다

 

고려대 학생들의 피습 소식이 전해지자, "피의 화요일" 이라 불리는 4월 19일, 수많은 대학생과 고등학생,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부정선거 다시 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고 외치며 서울 시내 곳곳을 누볐다. 4·19혁명은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의의 독재 권력에 항거한 것이다. 

 

젊은 학생들은 전우와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시민들도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했고, 서울시내는 온통 민주를 외치는 시위대열로 뒤덮였다. 부정선거 규탄과 학원의 자유를 요구했던 시위가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혁명의 대열로 바뀌고 있었다. 가운을 입고 참가한 의대생들은 의대생다운 자기들만의 독특한 구호를 썼다. 예를 들자면 "학우들이여, 메스를 들어라! 썩은 정치 수술하자!" 등등.

 

시위대는 이른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하고, 정오를 지나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경무대로 향하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과의 공방은 치열했다. 최루탄과 공포 사격으로 저지하던 경찰의 1차 저지선은 민주신념에 불타는 학생과 시민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위대는 경찰의 최후 저지선인 경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m로 좁혀졌을 때, 경찰의 총구가 곽영주의 지휘하에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이 총격으로 선두에 있던 21명의 꽃다운 젊은 학생과 시민들이 희생되고 172명이 부상하였다.

 

분노한 시민들은 반공청년단 본부와 왜곡 보도를 일삼았던 신문사를 불태웠으며,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소방차를 뺏고 경찰관서를 습격하는 등 항의 시위를 전개했다. 당일 서울에서만 약 130명이 죽고, 1,000여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기타 지역의 경우는 부산의 경우 사망 13명 부상 60명. 광주는 사망 6명(경찰 1명 포함) 부상 70명. 그 외의 지역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없어 사상자가 없었다.

 

정부의 강경 대응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인천, 수원, 부산, 광주 등 전국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이 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자, 자유당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사건 무마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민심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 4.18 고대생들의 시위를 필두로 희망과 혁신을 향한 목소리는 전방위로 퍼져나갔다.

 

 

 

 

 

4.19 시위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전국 대학교과 고등학교,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전국적으로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시위에 참여한 의대생들은 긴급구호활동에 나섰고, 여기에는 국립의료원의 외국인 의사들까지 합세했다.  

 

 

 

▲ 영상으로 보여주는 4.19의 합성 - 어머니들도, 시위 중 친구를 잃은 수송국민학교 어린이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 4월 24일 열린 4.19희생자합동위령제와 오열하는 유가족

 

 

(6) 4월 25일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과 전 국민의 궐기

 

4월 25일,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과 독재정권의 종말을 결정짓는 전 국민의 궐기가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의 미온적인 태도와 제자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하던 전국 27개 대학 교수단이 258명은 종로에서 시위를 하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하였다. 대학교수단 4⋅25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이번 4⋅19 참사는 우리 학생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이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초래한 중대 사태이다. 이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바로잡지 않으면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은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우리 전국 대학교 교수들은 이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양심의 호소로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수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불의에는 언제나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적인 왜곡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에 대한 모독이다.

3. 합법적이요, 평화적인 데모 학생에게 총탄과 폭력을 기탄없이 남용하여 공전(空前)의 민족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자유와 민주를 기본으로 한 대한민국의 국립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집단의 사병(私兵)이다.

4. 누적된 부패의 부정과 횡포로써 민권을 유린하고 민족적 참극과 국제적 수치를 초래케 한 현정부와 집권당은 그 책임을 지고 속히 물러가라.

5. 3⋅15 선거는 부정선거다. 공명선거에 의하여 정부통령을 재선거하라.

6. 3⋅15 부정선거를 조작한 자는 중형에 처하여야 한다.

7. 학생살상의 만행을 위해서 명령한 자와 직접 손을 쓴 자는 즉시 체포 처단하라.

8. 깡패를 철저히 색출 처단하고 그 전국적 조직을 분쇄하라.

9. 모든 구금된 학생은 무조건 즉시 석방하라. 설령 파괴와 폭행이 있었더라도 이는 동료의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 하의 행동이요, 파괴와 폭동이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10. 공적 지위를 이용해서나 관청과 결탁하여 부정축재한 자는 군 관 민을 막론하고 가차 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부패와 부정을 방지하라.

11. 경찰의 중립화를 확고히 하고 학원의 자유를 절대 보장하라.

12. 곡학아세의 사이비 학자를 배격한다.

13. 정치도구화한 소위 문화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여 이성을 지키고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15. 학생 제군은 38 이북에서 호시탐탐하는 공산괴뢰들이 제군들의 의거를 백퍼센트 선전에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라. 또 이남에서도 종래의 반공 명의를 도용하는 방법으로 제군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불순분자가 있음을 조심하라.

 

이종우(고려대), 이희승(서울대), 정석해(연세대), 조윤제(성균관대) 외 시국선언문 서명자는 258명이었다.

 

선언문을 발표한 대학교수단은 시민과 학생들의 호위를 받으며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살인귀 처단하라!”라는 플래카트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했다. 의대 교수들은 의사 가운을 입은 채 시위에 참가하였다.

 

경찰과 계엄군은 위대를 제지하지 않았다. 교수단 시위는 끝났으나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는 밤새 계속되었다. 교수단 시위는 소강상태에 빠졌던 4.19혁명에 결정적이고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 4.25,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를 외치며 시국선언에 이어 거리를 행진하는 대학교수단

 

 

(7)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및 자유당 정권의 종말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및 자유당 정권의 종말을 거둔 날이다. 4.25대학교수단의 시위를 계기로 시위대는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강력히 요구했고 이승만 동상이 철거되었다. 계엄사령관 송요찬(宋堯讚) 장군은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계엄군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지시했다. 

 

국회는 대통령의 즉각 하야, 정 ․ 부통령 재선거,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결의했다. 미국 대사와 일부 각료들이 계속하여 하야를 설득하자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물러나겠다.”고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새로운 민주시대를 염원하는 환호와 만세소리로 전국이 들끓었다. 결국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자유를 염원하며 항거한 시민들이 승리한 것이다. 이로써 자유당 정권도 무너지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이 학생들이 주도하는 대중에게 굴복했음을 의미한다. 경찰력이 자유당의 주요골격을 이루어왔다는 것은 4·19혁명 후 경찰력의 마비에 따라 자유당이 하룻밤 사이에 붕괴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났다. 교수들의 시위로 시작된 시위의 새로운 물결,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경찰력의 붕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으로부터의 지지결여 등에 직면하여,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 사임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부통령 이기붕(李起鵬) 일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5월 29일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평생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을 바쳤으며, 대한민국 수립을 위해 헌신하는 한편, 6․25 전쟁에서 유엔과 미국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지켜냈지만 영구집권을 위한 독재정치로 한국헌정사에 오점을 남겼다. 

 

이미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한 터라, 외무부 장관인 허정(許政)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여 허정 내각수반이 과도정부를 이끌었고, 학생들은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의원내각제의 장면 내각이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다.

 

 

▲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문

 

▲ 4.19 혁명은 그들이 피로써 쟁취한 것으로, 혁명의 성공으로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게 되었다.

 

▲ 대통령의 하야 성명으로 정국이 안정을 찾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유지에 앞장 섰고, 대학생들은 위문금 모집 운동으로 상처를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3. 4.19의 의미

 

4.19는 ‘혁명’이다. 한4.19는 분명한 ‘혁명’이다. 한때 민중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두려워한 독재 정권은 4.19를 단순한 ‘의거’라고 부름으로써 그 평가를 절하시키려 하였으나, 4.19는 이제 명실상부한 민주화 혁명으로 제대로 평가되고 있다.

 

3.1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민중들은 평화적으로 시위에 참가하였다. 4.19의 시발점이 되는 4월 18일 고대생들의 시위는 매우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온갖 무기들로 무장하고 시위를 진압한 정치 깡패들에 의해 많은 학생들이 다치게 하였다.

 

이러한 경과로 미루어볼 때 평화적인 국민의 의사 표현을 불법적인 무력으로 진압하여 한 독재 정권에 대해서 더 이상 어떠한 합법적 절차를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4.19는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한 시민 혁명이었다. 이는 한국 내에서 진정으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진통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서구에서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국민들은 이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식만 하면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독재 정권 치하에서 많은 반(反)민주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 절차의 모방만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었다. 서구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수많은 피와 땀을 흘렸던 것처럼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도 그러한 고통을 수반함으로써 진정으로 토착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19이다

 

 이후 민중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두려워한 독재 정권은 4.19를 단순한 ‘의거’라고 부름으로써 그 평가를 절하시키려 하였으나, 4.19는 이제 명실상부한 민주화 혁명으로 제대로 평가되고 있다. 3.1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민중들은 평화적으로 시위에 참가하였다. 4.19의 시발점이 되는 4월 18일 고대생들의 시위는 매우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온갖 무기들로 무장하고 시위를 진압한 정치 깡패들에 의해 많은 학생들이 다치게 된다. 이러한 경과로 미루어볼 때 평화적인 국민의 의사 표현을 불법적인 무력으로 진압하여 한 독재 정권에 대해서 더 이상 어떠한 합법적 절차를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4.19는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한 시민 혁명이었다.


이는 한국 내에서 진정으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진통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서구에서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국민들은 이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식만 하면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독재 정권 치하에서 많은 반(反)민주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었다. 서구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수많은 피와 땀을 흘렸던 것처럼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도 그러한 고통을 수반함으로써 진정으로 토착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19이다.

 

 

  거리에 불붙은

  4월의 혼을 보라.

  내가 그날 보았던

  짓붉은 피의 뜨거운 여울

  두 주먹에 정의를 불끈 쥔

  거대한 항거를 보라.

 

  헛되이 만용을 부리지 않고

  그들은 역사와 힘으로 싸웠다.

  핍박을 향하여 내던진

  장엄한 희생을 보라.

 

  그 쾌적한 울분이여

  핍박을 향하여 온 몸을 바친

  아, 우리들의 큰 희생이여

  4월 하늘을 갈라낸

  그들의 함성을 들어보라.

 

  뜨거운 피의 여울을,

  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

  그 힘을 보라.

 

 

 

윤후명 시인의  <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 4·19의 힘을 보아라>의 시는 4. 19 혁명정신의 위대함을 노래하였다. 

 

 

 ▲ 윤후명의 <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 4·19의 힘을 보아라>의 시는 민주묘지 내의 '수호예찬의 비'에 새긴 것. 사진은  4.19혁명기념관 2층에 걸린 것이다.  

  

 

▲ 4.19 민주이념의 의미는 한 마디로 진리와 정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이었다.

 

▲ 4.19혁명은 우리에게 '아프지만 의로웠던 기억'이 되었다.

 

 

  

4.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시위에 참가하기 전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 학생이 홀어머니에게 남긴 유서

 

 

1960년 3월 15일부터 4월 26일까지 사망자는 185명, 부상자는 1,500여 명을 내며 민주주의를 염원한 학생들의 시위는 끝이 났다. 피의 값으로 쟁취한 승리였다.

 

4.19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의 힘이었다. 먼저 시위를 벌인 것은 의외로 고등학생들이었다. 2 ․ 28 대구 학생의거에는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로 참가한 시위는 는3월 14일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어 서울, 부산, 대전, 원주, 청주, 충주, 포항의 고등학교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3.15 부정선거 후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 후 가장 분개한 사람들은 실제 같은 나이 또래인 고등학생이였다. 실제 각 학교 대표들은 미리 비밀스럽게 모여서 4월 19일 전후로 지역적으로 각각 대대적인 데모를 계획하였다. 마산의거 역시 김주열이 소속했던 마산상고를 포함해 인근의 많은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마산상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농고, 청주고, 동래고 등 총합 3,000여명이 참가하였다.

 

이 계획을 들은 고려대 학생들이 어찌 고등학생들이 나서는데 우리가 잠자코 있을 수 있느냐며 4월 18일 먼저 시위를 벌였다. 4월 19일도 대학생들이 주도하였다고 하였지만 대학생들이 주도한 곳은 서울의 시위였다 그날 시위에 참여한 대학교와 참여 숫자는 다음과 같다. 서울대 3,000여명, 고려대 4,000여명, 건국대 2,000여명, 동국대 2,000여명, 성균관대 3,000여명, 연세대 3,000여명, 중앙대 4,000여명, 홍익대, 경기대, 한국외대, 단국대, 국학대, 국민대, 서라벌예술대, 숙명여대, 이화여대 등이었다.(당일 시위에 참여한 순서대로 정리한 것) 지방에는 각 시도에 한두 개의 대학과 대학생들의 인원도 작았다. 실제 주도적으로 앞장선 이들은 대부분이 그 지방의 고등학생들이 앞장섰고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하는 형태였다.

 

“象牙(상아)의 眞理塔(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疾風(질풍)과 같은 歷史(역사)의 潮流(조류)에 自身(자신)을 參與(참여)시킴으로써 理性(이성)과 眞理(진리), 그리고 自由(자유)의 大學精神(대학정신)을 現實(현실)의 참담한 薄土(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自身(자신)들의 知性(지성)과 良心(양심)의 엄숙한 命令(명령)으로하여 邪惡(사악)과 殘虐(잔학)의 現狀(현상)을 糾彈(규탄), 匡正(광정)하려는 主體的 判斷(주체적 판단)과 使命感(사명감)의 發露(발로)임을 떳떳이 宣明(선명)하는 바이다. … (이하 생략)”

 

4월 혁명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에 참가한 서울대는 시위 현장에서 가장 가까웠던 관계로 피해가 가장 컸다. 이 날 하루에만 고순자(당22세, 미술대 3학년), 김치호(당21세, 문리대 3학년), 박동훈(당19세, 법대 1학년), 손중근(당22세, 사범대 4학년), 안승준(당22세, 상대 3학년), 유재식(당24세, 사범대 2학년) 등 7명의 학생이 사망하였다.

 

 

맨 앞에 4.19 시위 당시, 시위 현장에서 사망한 서울대 고순자(당22세, 미술대 3학년)양의 묘비가 보인다.

 

 

서울대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낸 중앙대는 고병래(상학과3), 김태연(약학과3), 서현무(법학과3), 송규석(정외과3), 지영헌(신문학과3), 전무영(신문학과1) 등 6명이 사망하였다. 

 

4.19 당일에도 대광고, 동성고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고등학교 학생들과 많은 수의 중학생들까지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에 참가하기 전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 학생이 홀어머니에게 남긴 유서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 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전영숙 학생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동대문시장에서 피복상을 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1960년 4월 19일 밤 8시경 미아리 고개에서 데모버스에 타고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부정선거 옳지 않다'고 외치다가 북선파출소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4.19혁명 희생자 중 유일하게 유서를 남겼으며, 숨지기 전 4시간 전에 쓴 이 유서에는 부정선거에 항거하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쳐 싸우겠다는 굳은 의지와 각오가 담겨 있다. 이 유서는 우리 모두에게 눈시울이 붉게 만든다.

 

그뿐이 아니다. 국립4.19민주묘지 1묘역의 216개 안장자 중 가장 어린 희생자는 종암국민학교 4학년 임동성 군이다. 당시 만 10세였다. 흑백 초상화 속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보는 이를 숙연케 한다. 임 군과 같은 초등학생 중 수송초등학교 6학년생이었던 전한승군도 가까이에 묻혀 있다. 전 군은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다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4.19 희생자 가운데는 초등학생도 있었다.

 

 

  4.19혁명 당시 사망한 초등학생은 5명, 중학생 17명, 고등학생, 대학생은 각각 40명 정도로 추정된다. 아래는 당시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 양이 쓴 <나는 알아요>라는 시다.

 

  아! 슬퍼요

  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 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강명희 양은 같은 학교 6학년생이었던 전한승 오빠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던 것이다. 혹자는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4.19는 독재정권을 뒤집은 사건이며, 한국 국민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똑바로 심어주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도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있다. 그렇다면 ‘미완의 혁명’이라는 말은 4.19가 표방하는 참된 민주주의가 개화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19혁명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고귀한 희생의 터 위에 민주주의는 이땅에서 반드시 꽃이 피어야 한다.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다시 4,19 날에”는 우리 모두가 음미해야 할 시가 아니겠는가?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날 스러져간

  젊음 같은 꽃 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4.19 혁명 순국선열들이 던진 ‘자유, 민주, 정의’의 가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이제 우리에게는 4·19혁명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정신을 계승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 내리도록 하여 후세에 잘 사는 나라를 물려줄 막중한 책임이 있다.

 

 

4.19혁명 선열들의 이름, 가슴 깊이 남게 될 그들이다.

 

 

 

▲ 그들은 가고 없지만, 그들의 간절한 소망은 아직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와 소망을 쪽지에 적어 '원원의 벽'에 넣는다. 

 

 

▲ 4.19혁명기념관을 찾은 명사들의 방명록, 대부분이 정치가들이다. 이들이 그렸던, 또는 그리는 ‘민주국가’는 무엇일까.

이들에게 민주주 신장을 위하여 얼마나 사심없이 정치를 했는지 또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 4.19정신을 기리는 단체들의 지속적인 활동이 요구된다.

 

 

4.19혁명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목에 세워놓은 ‘정의의 불꽃’은 4.19 정신이 앞으로 영원히 지속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  4.19 정신은 계속 불타올라야 함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정의의 불꽃' 상, 4.19혁명기년관에서 정문으로 나오는 길 죄측에 서 있다.

 

 

정보

 

가는 길

<대중교통>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강북구 우이동까지 총 11.4km의 우이신설선 개통으로 <4.19민주묘지>역이 생김으로써 국립4.19 민주묘지를 방문하기에 훨씬 수월해졌다. 1, 2호선 신설동역에서 출발하거나 6호선인 보문역, 4호선인 성신여대입구역에서 환승해서 국립 4.19 민주묘지까지 이동할 수 있다. 4.19민주묘지역에서 국립4.19민주묘지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걸린다.

주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4.19로 8길 17 (수유동 산 9-1)

전화 : 02-996-0419

개방 : 연중무휴 - 여름(3월~10월) 06:00~18:00 / 겨울(11월~2월) 07:00~17:00

기념관 및 유영봉안소 : 여름 09:30~17:30 / 겨울 09:30~16:30

(기념관은 월요일 휴관)

입장료 : 무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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