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에서 4 ·19 예찬시(禮讚詩)를 음미하다.

by 혜강(惠江) 2018. 3. 24.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에서

 

4·19  예찬시(禮讚詩)를 음미하다.

 

 

 

구성 · 사진  남 상 학

 

 

 서울 강북구 수유동,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삼각산(북한산) 기슭의 아담한 터에 국립4.19민주묘지가 있다. 135,901m²의 경내에 1960년 4.19 혁명 때에 희생된 199위의 영혼을 포함하여 현재는 366명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공들인 조경과 잘 정돈된 환경으로 4.19민주묘지는 깔끔하고 아늑했다. 상징문을 기준으로 위쪽의 성역 공간과 아랫부분의 사용 공간으로 구분된다. 성역 공간에는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군상부조, 영령들이 잠든 묘역과 유영봉안소가 있고, 주변에 수호예찬의 비, 수호자상, 자유의 투사가 들어서 있어 이곳이 성역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사용공간에는 4.19혁명기념관을 비롯하여 연못, 분수, 벤치와 ‘정의의 불꽃’이 제각기 있을 자리에 자리잡고 있어서 여느 공원 부럽지 않게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서는 국립4.19민주묘지의 잔디밭 가장자리에 세운 ‘수호예찬의 비(碑)’에 등장하는 12편의 시를 소개하며 자신을 불태워 민주주의를 쟁취한 이들의 정신을 살펴본다.

 

∼∼∼

 

 

 

 

 

진혼곡(鎭魂曲)  

-마산 희생자를 위하여

 

 

구 상(具 常)

 

 

손에 잡힐 듯한 봄 하늘에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이듯이

피 묻은 사연일랑 아랑곳 말고

형제들 넋이여, 평안히 가오.

 

광풍(狂風)이 휘몰아치던 쑥대밭 위에

가슴마다 일렁이는 역정(逆情)의 파도

형제들이 피워 놓은 그 한길 위에

오늘도 자유의 상렬(喪列)이 뒤를 이었오.

 

형제들이 뿌리고 간 목숨의 꽃씨야

우리가 기어이 가꾸어 피우고야 말리니

운명보다도 짙은 그 바램마저 버리고

어서, 영원한 안식의 나래를 펴오.

 

 

구상(具常)    

            

대한민국의 시인, 언론인이다. 본명은 상준. 초기에는 공산치하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극복하고 상승하려는 동경과 희구를 노래하다가 차츰 그리스도교 사상을 읊었다.

 

1941년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동인시집 〈응향 凝香〉에 〈길〉·〈여명도 黎明圖〉·〈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작품들이 강홍운·서창훈 등의 시와 함께 회의적·공상적·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동작가'로 몰리자 이듬해 월남했다.

 

〈백민〉에〈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1947)·〈유언〉(1948)·〈사랑을 지키리〉(1949) 등을 발표했으며, 〈영남일보〉·〈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1년 첫 시집 〈구상시집〉을 펴냈고, 1956년 6·25전쟁을 제재로 한 시집 〈초토의 시〉를 펴내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대리석에 정을 치듯 피땀을 흘려가며 온정신을 기울여 시를 써야 한다'는 그는 시창작을 통해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하는 동시에 이것의 융합을 위한 노력을 부단히 경주했다. 희곡과 시나리오에도 손을 대어 〈수치〉(자유문학, 1963. 2)·〈갈매기의 묘지〉(세대, 1967. 4) 등을 썼다. '6·25전쟁중 고초를 함께 한 대구 시민'에게 바친다는 사회시평집 〈민주고발〉은 〈대구매일신문〉에 발표했던 칼럼을 모은 것으로 자유당 때의 불의를 고발한 것이다.

 

수상집 〈부언부어 浮言浮語〉(1961)와 사회문제논쟁집 〈예술과 인생의 시비〉(1963)를 펴냈다. <출처 : 다음백과>

 

 

 

 

∼∼∼

 

 

 

 

 

 

죽어서 영원히 사는 분들을 위하여

 

 

박목월(朴木月)

 

 

학우들이 메고 가는

들것 위에서

저처럼 윤이 나고 부드러운 머리칼이

어찌 주검이 되었을까

우람한 정신이여!

자유를 불러 올 정의에 폭풍이여

눈부신 젊은 힘의

해일이여

하나, 그들의 이름 하나 하나가

아무리 청사에 빛나기로서니

그것으로 부모들의 슬픔을 달래지 못하듯

내 무슨 말로써

그들을 찬양하랴

죽음은 죽음,

명목(暝目)하라

진실로 의로운 혼령이여

 

거리에는 5월 햇볕이 눈부시고

세종로에서

효자동으로 가는 길에는

새 잎을 마련하는 가로수의 꿈 많은 경영이

소란스럽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간 것은 조용해지는 것

그것은 너그럽고 엄숙한 역사의 표정

다만

참된 뜻만이 죽은 자에서 산자로

핏줄에 스며 이어가듯이

 

그리고, 4.19의

그 장엄한 업적도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의 빛나는 눈짓으로

우리 겨레면 누구나 숨 쉴

숨결에 자유로움으로

온 몸 구석구석에서 속삭이는

정신의 속삭임으로

진실로 한결 환해질

자라나는 어린것들의 눈동자의 광채로

이어 흘러서 끊어질 날이 없으리라.

 

 

박목월(朴木月)

               

대한민국의 시인 겸 대학 교수 및 교육자이다. 본명은 박영종(朴泳鍾). 경상북도 월성(지금의 경주) 출신. 1935년대구의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를 졸업하고, 도일(渡日)해서 영화인들과 어울리다가 귀국하였다. 1946년 무렵부터 교직에 종사하여 대구 계성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연세대학교·홍익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62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1947년 한국문필가협회 발족과 더불어 상임위원으로 문학운동에 가담, 문총(文總) 상임위원·청년문학가협회 중앙위원·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총무·공군종군문인단 창공구락부(蒼空俱樂部)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맡아 1973년 이후까지 계속하였다. 한때 출판사 산아방(山雅房)·창조사(創造社) 등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잡지 『아동』(1946)·『동화』(1947)·『여학생』(1949)·『시문학(詩文學)』(1950∼1951) 등을 편집, 간행하였으며, 1973년부터는 월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하였다. 처음은 동시를 썼는데 1933년『어린이』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었고, 같은 해 『신가정(新家庭)』지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시를 썼다.

 

본격 시인으로는 1939년 9월『문장(文章)』지에서 정지용(鄭芝溶)에 의하여 「길처럼」·「그것은 연륜(年輪)이다」 등으로 추천을 받았고, 이어서 「산그늘」(1939.12.)·「가을 으스름」(1940.9.)·「연륜(年輪)」(1940. 9.) 등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 등과 3인시집 『청록집(靑鹿集)』을 발행하여 해방 시단에 큰 수확을 안겨주었다.

 

1930년대 말에 출발하는 그의 초기 시들은 향토적 서정에 민요적 율조가 가미된 짤막한 서정시들로 독특한 전통적 시풍을 이루고 있다. 그의 향토적 서정은 시인과 자연과의 교감에서 얻어진 특유의 것이면서도 보편적인 향수의 미감을 아울러 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청록집』·『산도화』 등에서 잘 나타난다.

 

6·25사변을 겪으면서 이러한 시적 경향도 변하기 시작하여 1959년에 간행된 『난(蘭)·기타』와 1964년의 『청담』에 이르면 현실에 대한 관심들이 시 속에서 표출되고 있다.

 

인간의 운명이나 사물의 본성에 관한 깊은 통찰을 보이고 있으며, 주로 시의 소재를 가족이나 생활 주변에서 택하여, 담담하고 소박하게 생활사상(生活事象)을 읊고 있다. 1967년에 간행된 장시집 『어머니』는 어머니에 대한 찬미를 노래한 것으로 시인의 기독교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68년의 『경상도의 가랑잎』부터는 현실인식이 더욱 심화되어 소재가 생활 주변에서 역사적·사회적 현실로 확대되었으며,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사념적 관념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1973년의 『사력질(砂礫質)』에서는 사물의 본질이 해명되면서도 냉철한 통찰에 의하여 사물의 본질의 해명에 내재하여 있는 근원적인 한계성과 비극성이 천명되고 있다. 그것은 지상적인 삶이나 존재의 일반적인 한계성과 통하는 의미다.

 

수필 분야에서도 일가의 경지를 이루어, 『구름의 서정』(1956), 『토요일의 밤하늘』(1958), 『행복의 얼굴』(1964) 등이 있으며, 『보랏빛 소묘(素描)』(1959)는 자작시 해설로서 그의 시작 방법과 시세계를 알 수 있는 좋은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사적(詩史的)인 면에서 김소월(金素月)과 김영랑(金永郎)을 잇는 향토적 서정성을 심화시켰으면서도, 애국적인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민요조를 개성 있게 수용하여 재창조한 대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빈 의자

                      

 

정한모(鄭漢模)

 

 

그날 밤

너를 기다리던

저녁 밥상이

어머니의 가슴 속에서

언제까지나

식지 않는 눈물이듯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책가방을 끼고

계단을 내려간

마지막

네 인사

 

오늘도 너는

빈 의자 위에

착한 그의 눈짓으로

돌아와 앉는다.

 

 

정한모(鄭漢模)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국문학자이다. 호는 일모.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거쳐 1959년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에 서울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6~47년 〈시탑〉·〈주막〉 등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2년 공주사범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8년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1966~88년 서울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방송통신대학 학장,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문화공보부장관 등을 지냈다.

 

1955년 〈사상계〉 7월호에 시 〈음영 陰影〉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쳤다. 그의 시세계는 대체로 첫 시집 〈카오스의 사족〉(1958)에서 2번째 시집 〈여백을 위한 서정〉(1959)에 실린 시를 초기시로, 3번째 시집 〈아가의 방〉(1970) 이후의 시를 후기시로 나누어볼 수 있다.

 

초기시는 밤과 어둠의 이미지로 시대에 대한 절망과 공포를 짙게 나타냈는데, 이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순수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려는 시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후기시에 와서 더욱 두드러졌으며 〈아가의 방〉에서는 아가의 이미지를 통해 불안한 시대의 어둠을 극복하고 재생의 신념을 획득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게 된다. 또한 1975년에 펴낸 4번째 시집 〈새벽〉에서는 아가의 이미지를 새벽과 어머니로 발전시켜 밝은 세계로 노래했다.

 

그밖에 시집으로 〈아가의 방 별사〉(1983)·〈원점에 서서〉(1989) 등과 시선집으로 〈사랑시편〉(1983)·〈나비의 여행〉(1983)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바람과 함께 살아온 세월〉(1983)이 있다. 그는 또한 국문학자로서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한국 현대시 연구에 힘써서〈현대작가연구〉(1959)·〈현대시론〉(1973)·〈한국현대시문학사〉(1974)·〈한국현대시의 정수〉(1979)·〈한국현대시의 현장〉(1983) 등과, 공저로 〈문학개론〉(1964)·〈문학개설〉(1973)·〈한국현대시요람〉(1982)·〈한국대표시평설〉(1983) 등의 문학 이론서를 여러 권 냈다. 1972년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다. ,출처 : 다음백과>

 

 

 

 

 

∼∼∼

 

 

 

 

 

손님

 

 

이성부(李盛夫)

 

 

어느 날 밤

내 깊은 잠의 한 가운데에

뛰어들어,아직도 깨끗한 손길로

나를 흔드는 손님이 있었다.

 

아직도 얼굴이 하얀,

불타는 눈의,

청년이 거기 있었다.

 

눈 비비며

내 그를 보았으나

눈부셔 눈을 감았다.

우리들의 땅을 우리들의 피로

적셨을 때,우리들의 죽음이 죽음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사랑을 찾았을 때,

 

검정 작업복을 입었던 내 친구

밤 깊도록 머리 맞대었던 내 친구

아직도 작업복을 입고

한 손에 책을 들고,

말없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아아 부끄러운 내 어깨 위에

더러운 내 세월의 어깨 위에그

 깨끗한 손길로 손을 얹었다……

 

 

이성부(李盛夫)

 

시인. 민중들의 고통받는 삶을 작품에 그려냈다. 대표작으로 <봄>, <벼>가 있다.

 

민중들의 어렵고 고통받는 삶을 작품 속에서 여러 형태로 그려낸 시인으로, 개인의 행복이나 불행이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 아래 소외된 존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민중시를 썼다. 1980년대 말 이후에는 산(山)과 산행(山行)을 소재로 한 시를 주로 쓰고 있다. 1960년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9년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해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에서 홍보부, 생활부, 사회부, 문화부 부장 및 편집국 부국장을 지내고 1997년 사직했다.

 

1962년 〈현대문학〉에 〈열차〉 등으로 추천 완료되어 등단했고,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되었다. 〈이성부 시집〉(1969), 〈우리들의 양식〉(1974), 〈백제행〉(1976), 〈전야〉(1981)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과 서민의 정한을 담아내는 사실주의 시로서, 민중적 차원의 보편성을 획득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산행에 나서, 사회구조의 부조리와 폭력에 대한 절망, 자기학대와 죄의식이 역사의 상처와 만나면서 어떻게 제자리를 찾는가를 성찰하였고, 이후 산에 얽힌 역사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살이를 온전히 담아내는 시를 쓰고 있다.

 

〈빈산 뒤에 두고〉(1989), 〈야간산행〉(1996), 〈지리산〉(2001),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2005), 〈도둑산길〉(2010) 등은 그 결과물이다. 현재 그에게 있어서 '산'은 한국인의 삶과 역사, 문화의 중요한 무대이자 배경이며 삶의 터전이자 의식 형성의 원형적 상징이다. 시집 이외에 산문집 〈산길〉(2002)을 냈다.

 

현대문학상(1969), 한국문학작가상(1977), 대산문학상(2001), 편운문학상(2005), 가천환경문학상(2007) 등을 수상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꽃으로 다시 살아

 

 

유안진(柳岸津)

 

 

지금쯤 장년고개 올라섰을 우리 오빠는

꽃잎처럼 깃발처럼 나부끼다가 졌습니다만

그 이마의 푸르던 빛 불길 같던 눈빛은

4월 새잎으로 눈부신 꽃빛깔로

사랑하던 이 산하 언덕에도 쑥구렁에도

해마다 꽃으로 다시 살아오십니다.

 

메아리로 메아리로 돌아치던 그 목청도

생생한 바람소리 물소리로 살아오십니다.

꽃 진 자리에 열매는 열렸어야 했지만

부끄럽게도 아직껏 비어있다 하여

해마다 4월이 오면 꽃으로 오십니다.

 

눈 감고 머리 숙여 추모하는 오늘

웃음인가요 울음인가요 저 꽃의 모습은

결 고운 바람결에도 우리 가슴 울먹여집니다.

 

 

 

유안진(柳岸津) 

               

짧고 간결함을 지향하는 극서정시집 '둥근 세모꼴'을 펴낸 유안진 시인.

안동임동초등학교, 대전여자중학교, 대전호수돈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6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마산제일여자중·고등학교와 대전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1970년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서울사범대학 음악대학 강사, 1972년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을 거쳐 1976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신여자대학교·단국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81년부터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아동가족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65, 1966, 1967년 3회에 걸쳐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달〉·〈별〉·〈위로〉가 실리며 등단했고, 1970년 첫 시집 〈달하〉를 출간했다. 이향아·신달자와 함께 펴낸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1986)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주요 작품으로 시집 〈절망시편〉(1972), 〈물로 바람으로〉(1976), 〈그리스도 옛애인〉(1978), 〈날개옷〉(1981), 〈꿈꾸는 손금〉(1985), 〈달빛에 젖은 가락〉(1985), 〈약속의 별 하나〉(1986), 〈풍각쟁이의 꿈〉(1987), 〈남산길〉(1988),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1993), 〈누이〉(1997), 〈봄비 한 주머니〉(2000), 〈다보탑을 줍다〉(2004)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1985), 〈그리운 말 한마디〉(1987), 〈한국여성 : 우리는 누구인가〉(1991), 장편소설로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1990), 〈땡삐〉(1993) 등이 있다.

 

미국 유학 시절 우리 민속의 가치에 눈떠 30여년 간 한국 전통사회의 아동 및 여성 민속을 연구하여 〈한국전통 아동심리요법〉(1985), 〈한국전통사회의 육아방식〉(1988), 〈한국전통사회의 유아교육〉(1991) 등의 연구서와 〈아동발달의 이해〉, 〈아동환경론〉, 〈부모교육론〉 등 다수의 이론서를 출간했다. 1998년 〈세한도 가는길〉로 제10회 정지용문학상, 2000년 〈봄비 한 주머니〉로 제35회 월탄문학상, 2009년 〈성병(聲病)에 걸리다〉로 제7회 유심작품상, 2009년 〈거짓말로 참말하기〉로 제4회 이형기문학상을 수상했다.

 

 

 

 

  

∼∼∼∼

 

 

 

 

 

 

진혼의 노래

 

 

이한직(李漢稷)

 

 

겨레 위(爲)하여

목 놓아 외친 소리메아리 되어

강산(江山)을 뒤흔드네

가시를 들고

횃불을 높이 든 이그 듯 깊이 받들어

우리 피도 뿌리리.고이 잠들라

동지(同志) 품에 안겨서먼동이 트기 전에

가고만 사람들아젊은 넋들아목숨을 던져

네가 싸워 이긴 것우리 거두리.

값진 피 식기 전에이웃 위하여

의로움 위하여그 젊음 걸었던 일

헛되게는 않으리고이 잠들라

태극기에 쌓여서먼동이 트기 전에

가고만 사람들아젊은 넋들아

 

 

이한직(1921-1976)

1921∼1976. 시인.

호는 목남(木南). 경기도 고양 출신. 아버지는 진호(軫鎬)이며, 어머니는 김숙경(金淑卿)이다. 1939년 경성중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법학과에서 수학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때 종합잡지 ≪전망 展望≫을 주재하였으며, 6·25 때에는 종군 문인으로 공군에 소속된 창공구락부(蒼空俱樂部)의 일원으로 활약한 바 있다.

 

또한, 서울이 수복되어 환도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조지훈(趙芝薰) 등과 함께 ≪문학예술 文學藝術≫의 시 추천을 맡아보았으며, 1957년에는 한국시인협회에 관계한 바도 있다. 그 뒤 1960년 문공부의 문정관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그곳에 눌러앉았다.

 

그의 문단 활동은 1939년 학부재학 때 ≪문장 文章≫의 추천제에 응모하여 그해 5월호에 시 <풍장 風葬>과 <북극권 北極圈>이 뽑히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 추천자인 정지용(鄭芝溶)은 그의 작품에 대하여 “패기도 있고 꿈도 슬픔도 넘치는 청춘이라야 쓸 수 있는 시”라고 하면서 “선이 활달하기는 하나 치밀하지 못한 것이 흠”이라는 것과 외국어를 많이 쓴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 ≪문장≫에 시 <가정 家庭>과 1940년 3월호에 <놉새가 불면>을 발표하였다.

 

그는 등장 초기부터 경향시의 정치 지향성과 모더니즘계 시에 대하여 모두 반발하면서 그 나름대로의 순수시를 쓰려는 자세를 보였다. 추천완료 소감으로 발표한 <나의 작시설계도(作詩設計圖)>(문장, 1939.9.)에서 이러한 자세를 표명한 바 있다. 그는 과작(寡作)의 시인으로 생전에는 시집을 내지 않았으나 죽은 뒤 1976년 ≪이한직시집≫이 발간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4월(四月)

 

 

박화목(朴和穆)

 

 

4월은

거칠은 계절풍이 부는 가운데도

굳은 땅을 뚫고 짓누른 돌을 밀쳐 제치며

어린 푸른 싹이 솟구치는 달이다.

 

사월은

정녕 생명의 외침을

아무도 막아내지 못하는 달이다.

 

사람 뒤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고……

 

그 누가 착하고 어진 우리를 억누르고

한 몸의 영화를 그 속절없는 부귀를

누리려고 했던가?

썩은 권력은 언제든지 허물어지고 마는 것을……

 

한 겨우내 죽은 듯

침묵 속에서 살아온 뭇 생명들

이제 활활히 분화처럼 활활히 솟구치나니아

진정 4월은

부활의 달.

 

 

박화목(朴和穆)  아동문학가·시인.


널리 알려진 가곡〈보리밭〉의 작사가이다. 호는 은종. 평양신학교 예과를 거쳐 만주로 가서 하얼빈[哈爾濱] 영어학원, 봉천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뒤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해방직후 월남하여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아동문학위원, 1947~50년 기독교방송 방송부장 등을 지냈다.

 

1946년〈죽순 竹筍〉 동인으로 활동했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중앙위원,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위원,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41년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겨울밤〉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온 후, 초기에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시를 주로 썼으나 1948년 이후 동화 창작에도 관심을 가졌다.

 

시로는 〈잔상 殘像〉(시작, 1954. 4)·〈나의 영토〉(영문, 1956. 11)·〈고구마 식구〉(현대문학, 1964. 12)·〈나는 한 그루의 푸른 수목이 되고 싶다〉(시문학, 1966. 4) 등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시인과 산양〉(1958)·〈그대 내 마음의 창가에 서서〉(1960)·〈주의 곁에서〉(1961) 등과 동시집으로 〈초롱불〉(1957)·〈꽃잎파리가 된 나비〉(1972) 등이 있다. 1972년 한정동아동문학상, 1980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았다. <출처 : 다음백과>

 

 

 

 

  

∼∼∼

 

 

 

 

 

소리치는 태양

 

 

송욱

 

 

배운 대로 바른 대로 노한 그대로

물결치는 대열을 누가 막으랴

주권을 차지한 그대들이여

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태양

 

새로운 지평선에 피를 흘리며

세계를 흔들었다

맨주먹으로―

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태양

 

정의는 오로지 벌거숭이다

어진 피, 젊은 피, 자라는 피다

용감하게 쓰러진 그대들이다

남산도 북악도 모두 보았다

 

한강이 목놓아 부를 이름

들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태양

새로운 수평선에 피를 흘리며

세계를 흔들었다

맨주먹으로―

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태양

 

배운 대로 바른 대로 노한 그대로

물결치는 대열을 누가 막으랴

막바지서 뛰어난 민족정기여

역사를 차지한 그대들이여

영원히영원히 소리칠 태양

 

 

송욱

시인∙문학평론가∙영문학자. 사회세태 및 모순된 현실에 대하여 풍자적 경향을 보여줬다. 대표작으로 <하여지향>, <월정가>가 있다.


1942년 경기중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鹿兒島] 제7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와 구마모토의과대학[態本醫科大學]을 다녔으며, 8·15해방이 되자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 편입해서 1948년에 졸업했다.

 

6·25전쟁 때 해군에 입대,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했다. 1954년부터 죽을 때까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1972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0년 〈문예〉에 시 〈장미〉·〈비오는 창〉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다.

 

1954년 첫 시집 〈유혹〉을 펴냈고, 1961년에는 영미 주지주의 영향을 받은 시 〈하여지향 何如之鄕〉과 〈해인연가 海印戀歌〉 등을 수록한 제2시집 〈하여지향〉을 펴냈다. 이어 1971년에는 이데아와 관능, 사상과 육체의 조화를 밀도 있고 간결하게 읊은 제3시집 〈월정가 月精歌〉를 펴냈다. 평론집 〈시학평전 詩學評傳〉(1963)과 〈문학평전 文學評傳〉(1969)은 동양과 서양의 문학사상과 작품을 비교·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밖에 시집으로 〈나무는 즐겁다〉(1978)·〈시신(詩神)의 주소〉(1981) 등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문물(文物)의 타작〉(1978)이 있다. 1963년 한국출판문화상과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출처 : 다음백과>

 

 

 

 

∼∼∼

 

 

 

 

 

 

조가(弔歌)

-4·19 젊은 넋들 앞에 -

 

 

장만영(張萬榮)

 

 

분노는 폭풍 폭풍이 휘몰아치는 그날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유령처럼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던 독재의 꼴을

총탄에 쓰러진 젊은 영혼들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여기 새로 만들어 놓은 제단이 있다.

여기 꺼질 줄 모르는 성화가 있다.

여기 비통한 가지가지 이야기가 있다.

 

아무런 모습으로라도 좋다.

먼 하늘 반짝이는 저 별들처럼 나와

가벼운 속삭임으로라도 좋다.

아아 나에게 슬기로운 역사를 말해 주려무나.

 

슬픔은 독한 술 ―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구나.

이윽고 봄이 오면 꽃도 피겠지 꽃도 지겠지.

그 때마다 나는 새로운 슬픔에 사로잡혀

사랑과 우정을 넘어 통곡하리라.

 

 

장만영(張萬榮)

호는 초애(草涯). 아버지 완식(完植)과 어머니 김숙자(金淑子) 사이에서 태어나 1927년 황해도 배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자키 영어학교[三峻英語學校] 고등과에 입학해 2년 다녔으나 부모의 뜻에 따라 그만두고 귀국했다. 김억과는 두터운 사제관계를 맺었으며, 신석정·오장환·서정주 등과 교류했다.

 

1944년 아버지가 물려준 배천온천을 운영하다가 1948년 출판사 산호장을 차렸고, 6·25전쟁 때는 종군작가단에 가담한 문인들과 어울려 〈전선문학〉을 펴냈다. 1954년 〈서울신문〉 출판국장 및 〈신천지〉·〈신문예〉 등의 주간을 맡았다. 1959년 한국시인협회 부회장과 1966년 회장을 지냈으며, 1968년 신시60년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32년 도쿄[東京]에 유학하고 있을 무렵 김억의 추천으로 〈동광〉에 시 〈봄 노래〉가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모더니즘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 시를 발표했으나, 당시의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이 도시적·이국적 서정을 노래하고 있는 데 반해 그는 농촌과 자연을 소재로 동심의 세계를 즐겨 다룬 점이 특징적이다. 1937년에 펴낸 첫 시집 〈양 羊〉 이후 시집 〈축제〉(1939)·〈유년송 幼年訟〉(1948) 등에 실린 시들은 이러한 동심의 세계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들이다. 이중 〈아직도 거문고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가을 아침 풍경〉·〈달·포도·잎사귀〉 등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전원적 소재와 감각적 묘사에서 신석정과 비슷하고, 또 시적 대상을 이미지화한 점에서 김광균 등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제4시집 〈밤의 서정〉(1956)을 펴낸 이후에는 동심의 세계보다 각박한 현실에서의 체험을 주로 읊었다. 그밖의 시집으로 〈저녁 종소리〉(1957)·〈장만영시집〉(1964)·〈어느 날의 소녀에게〉(1977) 등이 있다.

 

 

 

 

 

∼∼∼

 

 

 

 

 

 

합장(合掌)

 

 

김윤식(金潤植)

 

 

괴로운 계절(季節)의 흐린 하늘 아래서

떨어져 고웁게도 조국(祖國)의 품에 안기

앳된 꽃봉오리여.

 

동(東)녘은 저리 시원스레 밝아오니, 이제사

목놓아 울리라……울리라.

 

숨 막힌 어둠

신음(呻吟)도 절(絶)한

밤을 향(向)해 횃불을 들고

뜨거운 청춘(靑春)의 가슴채로

자유(自由)의 종을 난타한

기쁨이여,

자랑이여.

 

그대 거룩히 뿌린 선혈

다시는 어느 누구도 범치 못할

정의(正義)의 기치(旗幟)여,

영원(永遠)히 겨레 위에 펄럭이라.

 

아아 거룩한 피로서 꾸며진 아름다운 화완(花宛)

떨어진 꽃봉오리 멍든 가지에,

다시난만(爛漫)히 꽃이 피는 봄. 봄.

 

이 꽃밭, 예서 봄을 누릴

가고 오는 사람들이여

백도화(白桃花)송이 같은

4월의 눈망울로,

 

아아 장(壯)히도 바로 적은 역사의 글귀

눈부신 태양(太陽)으로 우리의 하늘에서

앳된 영혼이여

자랑하라,

빛나라.

 

 

 

김윤식(金允植)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국문학자. 1936년 경상남도 진영에서 태어나 마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195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6년 논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현대문학〉에 〈문학사방법론 서설〉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의 문학연구는 한국 근대문학에서 근대 또는 근대성이 가지는 의미를 밝히는 데서 시작된다. 첫번째 연구대상은 1920~30년대의 근대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이었다. 시·소설·비평 등 전영역을 포괄해 연구했으며, 이광수·염상섭·임화·이상·김남천·이원조 등 수많은 문인들이 그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근대한국문학연구〉(1973)·〈한국근대문학의 이해〉(1973)·〈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6) 등이 이에 대한 연구서이다. 김현과 함께 펴낸 〈한국문학사〉(1973)에서는 기존의 문학사와는 달리 근대문학의 기점을 영·정조로 거슬러 올라가 국문학계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주로 소설을 대상으로 기성작가는 물론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문학사적인 안목에서 분석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황홀경의 사상〉(1984)·〈80년대 우리 소설의 흐름 1·2〉(1989)·〈우리 소설을 위한 변명〉(1990) 등이 있다.<출처 : 다음백과>

 

 

 

 

 

∼∼∼

 

 

 

 

 

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

-4·19의 힘을 보아라

 

윤후명

 

거리에 불붙은 4월의 혼을 보라.

내가 그날 보았던

짓붉은 피의 뜨거운 여울

두 주먹에 정의를 불끈 쥔

거대한 항거를 보라.

헛되이 만용을 부리지 않고

그들은 역사와 힘으로 싸웠다.

핍박을 향하여 내던진

장엄한 희생을 보라.

그 쾌적한 울분이여

핍박을 향하여 온 몸을 바친

아, 우리들의 큰 희생이여

4월 하늘을 갈라낸

그들의 함성을 들어보라.

뜨거운 피의 여울을,

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

그 힘을 보라.

 

 

 

윤후명(尹厚明)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소설가이다. 본명은 상규(常奎). 1980년대의 일반적 소설 경향이었던 시대적 부채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추구했다. 1959년 부산 서면의 개성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법무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영등포중학교를 졸업했다.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62년 용산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더욱 문학에 심취했다.

 

1965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연세춘추〉에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1969년 강은교·김형영·박건한·임정남 등과 시 동인지 〈70년대〉를 창간했다. 이후 10여 년 간 삼중당·샘터·삼성출판사·계몽사·현암사 등 출판사에 근무했다. 1977년 첫 시집 〈명궁〉을 출간했다.

 

시를 쓰던 그는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이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후 단편 〈높새의 집〉·〈갈매기〉·〈누란시집〉 등을 발표하였고, 1980년에 단편 〈바오밥나무〉·〈모기〉 등을 발표하면서 전업작가를 선언하였다. 같은 해 김원우·김상렬·이문열·이외수 등과 소설 동인지 〈작가〉를 창간하였고 소설에 주력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1980년대 그의 작품세계는 직접적인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시적인 문체와 독특한 서술방식으로 환상과 주술의 세계를 자유롭게 비상하며 사랑에 대한 탐구에 천착했다.

 

1990년대에는 자전적 색채가 짙은 여로형 소설을 선보였는데, 삶의 본질적인 쓸쓸함을 이야기하면서 무미건조하고 숨막힐 것 같은 일상생활에서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인 고대의 풍경이나 관념적인 환상세계로 탈출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1983년 〈돈황의 사랑〉으로 제3회 녹원문학상, 1984년 〈누란〉으로 제3회 소설문학작품상, 1986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창작문학상, 1994년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로 제39회 현대문학상, 1995년 〈하얀 배〉로 제19회 이상문학상, 2002년 〈나비의 전설〉로 제9회 이수문학상, 2007년 〈새의 말을 듣다〉로 제10회 김동리문학상을 받았다. 〈문학아카데미〉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9년에 한국소설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저서에 소설집 〈돈황의 사랑〉(1982)·〈부활하는 새〉(1985)·〈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1987)·〈원숭이는 없다〉(1989)·〈별까지 우리가〉·〈약속없는 세대〉·〈알함브라의 궁전〉 (1990)·〈비단길로 오는 사랑〉(1991)·〈협궤열차〉(1992)·〈여우사냥〉(1997)·〈가장 멀리 있는 나〉(2001)·〈삼국유사 읽는 호텔〉(2005) 등이 있고, 시집으로 〈명궁〉(1977)·〈홀로가는 사람〉(1986, 무용가 김미숙, 사진작가 김수남과 공동작업)·〈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1992)가 있다.

그밖에 산문집 〈내 빛깔 내 소리로〉(1987)·〈이 몹쓸 그립은 것아〉(1990)·〈꽃〉(2003), 동화 〈한국전래동화집〉(1986)·〈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1992)가 있다. 1993년 〈돈황의 사랑〉이 프랑스 악트쉬드출판사에서 프랑스어로 번역·출간되었다.<출처 : 다음백과>

 

 

 

 

∼∼∼

 

 

 

 

 

 

진혼가(鎭魂歌) 

 -4월혁명 희생학도 위령제노래

 

 

조지훈(趙芝薰)

 

 

1절

가슴을 치솟는 불길을 터뜨리니

사무친 그 외침이 강산(江山)을 흔들었다선

혈(鮮血)을 뿌리어 우리가 싸워 이긴 것아!

민주혁명(民主革命)의 깃발이 여기 있다

가시밭을 헤쳐서 우리 세운 제단(祭壇) 앞에

울며 바친 희생들아 거룩한 이름아!

 

2절

뜨거운 손을 잡고 죽음으로 맹서하던

티 없는 그 정성을 하늘도 흐느꼈다.

더운 피를 쏟아내고 네가 죽어 이룬 것

아! 민주혁명(民主革命)의 꽃잎이 만발했다

어둠을 밝혀서 네가 세운 공화국(共和國)을

못 보고 간 동지(同志)들아 꽃다운 넋들아!

 

후렴

고이 잠들라 조국(祖國)의 품에 안겨

역사(歷史)를 지켜보는 젊은 혼(魂)은 살아있다.

 

 

조지훈(趙芝薰)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했다. 본관은 한양. 본명은 동탁(東卓). 8·15해방 직후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헌영과 전주이씨(全州李氏)인 어머니 사이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동진(東振)은 요절했으나 〈세림시집〉을 펴낸 시인이었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뒤, 3년간 영양보통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올라와 1939년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 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었고, 이때 〈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화엄경〉 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 당시를 즐겨 읽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다 8·15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와서 명륜전문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1946년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및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종군했고,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면서 시쓰기보다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 힘썼다. 그뒤 1965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찬위원,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토혈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 안장되었고, 1972년 서울 남산에 시비가 세워졌다.

                                               

193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시 〈고풍의상 古風衣裳〉· <승무>·〈봉황수 鳳凰愁〉가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어 〈백지〉에 〈계산표〉·〈귀곡지 鬼哭誌〉·〈진단서〉 등을 발표했는데, 이 시들은 회고적·민속적인 것을 소재로 민족적 정서와 전통에 대한 향수를 읊은 것이다. 특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되는 〈승무〉는 그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시로, 섬세한 미의식과 불교세계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준다.

 

고전적인 시의 리듬과 외형률의 조화를 꾀하기 위해 형용사와 파생부사를 많이 사용했고, '나빌레라'·'서러워라'·'별빛이라' 등의 고전적인 시어를 쓴 점이 특징이다. 그밖에 불교적 인간의식을 보여준 시로 〈고사 1〉·〈고사 2〉·〈낙화〉 등이 있고, 박목월의 〈나그네〉에 화답하는 시 〈완화삼〉을 발표했다. 1946년 박두진·박목월 등과 시집 〈청록집〉을 펴낸 뒤로는 '청록파' 시인으로 불렸다. 이어 시 〈색시〉(죽순, 1949. 4)·〈편지〉(민성, 1949. 11)·〈그리움〉(문예, 1950. 6) 등을 발표하고, 시집 〈풀잎단장〉(1952)·〈조지훈시선〉(1956)을 펴냈다.

 

그는 불교의식이나 서정세계만을 읊은 것이 아니라 현실사회를 시 창작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말 민족의 참상을 보면서 쓴 〈동물원의 오후〉에는 시대적 처지가 역설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시적 감회는 6·25전쟁중 종군작가로 참전하면서 쓴 〈다부원에서〉·〈패강무정 浿江無情〉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다부원에서〉는 전쟁 후 황폐화된 다부원에 무수히 널린 시체더미를 목격하고 전쟁의 비참함과 파괴성을 읊은 시이다.

 

'4월혁명의 사회시'라는 부제를 붙인 시집 〈여운 餘韻〉에는 자유당 말기 정치풍토의 고발과 4·19혁명의 정치적 개선을 읊은 〈터져오르는 함성〉 등의 시가 실려 있다.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박두진은 그를 "투명한 감성, 밝은 지성, 예리한 감각과 윤택한 정서를 통하여 한국의 현대시사에 하나의 불멸의 업적을 남겨놓았다"고 평가했다.

 

그밖에 시집으로 〈역사 앞에서〉(1959), 수필집으로 〈창에 기대어〉(1958)·〈시와 인생〉(1959)·〈돌의 미학〉(1964)·〈지조론〉(1963), 평론집으로 〈시의 원리〉(1953)·〈한국문화사 서설〉(1964) 등이 있다.<출처: 다음백과>

 

 

 

  

진달래

-이영도 -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硏)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이영도 시인이 쓴 <진달래>는 4.19혁명에서 희생된 꽃다운 젊은 넋에 대한 추모와 회한(悔恨) 를 노래한 시이다.  이별과 한의 정서를 지닌 진달래에 4·19혁명에서 희생된 젊은이들의 피흘림(한)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는 의로운 젊은이들의 죽음에 꽃을 바치는 추모의 의미를 갖는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