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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한국영화박물관,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가 한 곳에

by 혜강(惠江) 2018. 1. 12.

 

 

한국영화박물관 (Korean Film Museum)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가 한 곳에

 

 

글․사진 남상학

 

 

 

영화박물관은 한국영상자료원 1층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영화박물관은 한국영상자료원이 2008년 5월, 서울 상암동 DMC 내 종합영상아카이브센터에 개관했다. 한국영화박물관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서울의 유일한 영화박물관이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DMC 단지 내 ‘한국영상자료원’ 1층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영화 매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영화의 역사를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어 누구나 관람 ․ 체험할 수 있는 열려 있는 공간이다. 영화박물관은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로 나뉘고 상설 전시시실은 <한국영화를 보다>라는 이름으로 세부 주제별로 전시실을 꾸몄다. 그리고 기획전시실은 때에 따라 영화에 관한 특별 전시를 한다. 전시실 외에 <에니메이션 및 영상의 원리>, <박물관 속 소극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박물관 입구

1. 영화의 탄생

 

 

 먼저 한국영화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축약하여 보여주는 상설전시관에 들어갔다. 이 코너에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대중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영화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 보여준다.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에디슨이 1893년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하였지만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시네마토그래프’를 영화의 탄생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시네마토그래프를 통하여 <공장에서 나서는 노동자들>이란 활동사진을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서 봄으로써 대중적 보급에 선구적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2. 신기한 경험의 시작, 활동사진 조선에 오다.

 

 

 활동사진이 조선에 처음 유입된 시기는 서구 열강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게 된 1900년 경이다. 조선에 처음으로 활동사진을 선보인 인물은 미국의 여행가 버튼 홈즈였다. 그는 1901년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의 여러 모습을 촬영하였고, 이것을 황실어람에서 보여 주었다. 이 모습을 정면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볼 수 있다. 전차가 달리는 서울 거리의 풍경, 도포에 갓을 쓴 어른과 포대기를 둘러 어린애를 업은 아낙의 모습 등이다. 영화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이 활동사진은 그 시대에 매우 놀랍고 신기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길거리와 관공서, 사람들의 옷차림 등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상물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3. 한국영화 100년의 시간

 

 

 

  이 코너에서는 영화의 탄생 시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 100년의 시간을 연표를 통해 보여준다. 세계 영화사와 더불어 한국영화 역사의 흐름을 10년 단위 나누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4. 근대, 식민, 조선영화 (초창기~1945년 광복 이전까지)

 

 1901년부터 1944년까지 한국영화는 근대, 식민, 조선영화라는 3개의 키워드를 지닌다. 1900년대 초에서 1919년까지 조선영화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영화들이 수입되어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1919년에 이르러 키노드라마(연쇄극)라는 형식으로 최초의 한국영화라 일컬어지는 <의리적 구토>가 만들어져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다. 이것은 본격적인 영화는 아니었지만 극 중에 영화적인 요소가 곁들여짐으로써 최초의 영화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월하의 맹세> <춘향전> <장화홍련전> 등이 발표되어 무성영화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이들 작품 중 <장화홍련전>(1924, 김영환 감독)은 조선인의 자본과 조선인 스태프들이 제작한 최초의 영화였다.

 

 

  그러나 1926년 단성사에서 개봉돼 <아리랑>(나운규)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영화는 수탈과 억압이 자행되던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던 우리 민족의 혼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무성영화는 변사가 극 중 대사를 혼자서 주고받고 해설까지 겸하였는데, 나운규는 감독부터 주연, 변사까지 혼자서 이 일을 다 해냈다. 그는 <아리랑>이라는 작품 속에 저항정신을 깔고 민족의 한과 슬픔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영화인이었다. 암울한 시대에 큰 위안이 됐던 걸작 <아리랑>의 스틸사진과 제작진들이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들은 한국 영화의 개척자 나운규의 삶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시기에 특기할만한 것은 1935년 <춘향전>의 등장이었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로서 이후로 조선의 영화계는 본격적인 발성영화 시대의 개막을 보게 되었고, 시설 근대화와 자본의 대형화를 갖춘 영화 기업이 출현하였고 영화인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조선영화는 군국주의 이념의 선전도구로 동원되었다.

근대, 식민, 조선영화 시대의 자료들

 

 

 

 

▲ 1940년대쯤 대구 코리아극장에서 사용된 35mm 필름영사기

 

 

5. 해방과 전쟁

 

 

 해방 이후, 1946년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 1949년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 등 한국영화사에 뚜렷한 성취를 남긴 영화가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한국 영화계는 또 다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많은 영화인들은 국방부나 공보처, 미공보원 소속으로 전선에 파견되어 기록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6. 매혹과 혼돈 (한국전쟁 이후의 1950년대)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빈곤하고 무질서한 가운데서도 한국영화의 성장은 멈추질 않았다. 1956년에 개봉돼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킨 영화 <자유부인>이 그 증거다. 남녀가 끌어안고 홀을 누비며 춤을 추는 흑백의 영상물은 굳이 표제를 읽지 않더라도 한눈에 영화 <자유부인>임을 알아챌 수 있다.


 전후의 세태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이 영화는 사치와 향락, 성적・도덕적 타락이 범람하는 서울을 무대로 삼았다. 전쟁 뒤의 폐허 속에서 미군의 주둔으로 나타난 급속한 소비문화 확산은 사회적 혼란기를 맞은 시대적 상황을 작품 속에 투영했다. 영상물 아래에는 당시 소품인 핸드백과 하이힐이 전시돼 있다.

  

7.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960년대)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 불린다. 4.19혁명의 발발로 한국 최초로 민간 자율기관인 영화 윤리전국위원회가 조직되어 문교부의 영화 검열업무가 민간기구인 위원회에 이관되면서 영화 제작이 크게 활성화된 것이다. 1060년 92편이었던 제작 편수는 1969년이 되면서 229편에 이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1969년도 관객수 역시 1억 7천 만 명을 상회하여 1인당 관람 횟수가 6회에 육박한다. 이는 오늘날 한국영화 산업의 통계를 능가하는 수치다. 

 

<춘향전>(홍성기 감독)과 <성춘향>(신상옥 감독)의 대결,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특별 은곤상을 수상한 <마부>(김대진 감독), 당국의 재검열 지시로 상영이 중단되었던 <오발탄>(유현목 감독), 청춘영화의 기폭제가 되었던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독이 구속 기소되었던 <7인의 여포로>(이만희 감독), 60년대 유일의 동시 녹음된 작품 <대원군> 등이 모두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8. 청년문화의 시대 (1970년대)

 

 1970년대 한국의 영화계는 60년대와는 달리 침체기를 맞는다. ‘안방극장’이라 불리며 급격히 보급된 TV의 영향과 경제성장에 따른 다양한 레져문화, 그리고 신군부가 등장으로 더욱 엄격해진 검열과 영화정책의 실패 때문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성(性)에 대한 검열 완화로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영화들이 다수 제작됐다. 특히 이장호, 하길종, 김호선 등의 신인감독들이 청년영화를 기치로 새로운 표현방식과 정서를 가진 영화들을 제작하였다.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은 46만여 명의 관객을 세워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세웠고,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청바지와 포크송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해학과 자조를 띠면서 그려진다. 검열로 인해 30여 분이 삭제되어 개봉되었으나 흥행에는 성공했다. 김호신 감독의 <겨울여자>는 60만 명 이상의 흥행기로글 세운가 하면, <영자의 전성시대> 역시 87일간 상영하여 3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이후 70년대 후반에는 하이틴 영화들과 액션영화들이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9. 변화의 바람 (1980년대)

 

 1970년대 시작된 영화계의 불황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깊어진다. 하지만 영화법 개정과 외화수입의 자율화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전을 거듭하였다. 1980년대 가장 왕성한 활동으로 역작을 쏟아낸 감독은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등이다. 임권택 감독은 <만다라>(1981)·<안개마을>(1982)·<길소뜸>(1985)·<씨받이>(1986)·<아제아제바라아제>(1989) 등으로 국내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장호 감독은 <바람 불어 좋은 날>·<바보선언>·<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5) 등 사회성 짙은 영화를 선보였으며, <꼬방 동네 사람들>로 데뷔한 배창호 감독은 <고래사냥>(1984)·<깊고 푸른 밤>(1985)·<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의 작품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특히 1980년대 후반에는 박광수, 정지영, 장선우, 이명세 등 새로운 감각을 가진 신인감독이 대거 등장했다. 이 시기의 감독들은 훗날 ‘코리안 뉴웨이브(새로운 물결)’라 명명되기도 했다. 이명세의 <개그맨>(1988), 박광수 감독의 <철수와 만수>,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89), <하얀 전쟁>과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모두 이 시기 젊은 감독들의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10. 영상문화의 폭발 (1990년대)

 

 1990년대 한국영화는 새로운 환경을 맞았다. 비디오 시장이 확대되고 케이블TV가 출범하게 되자 많은 기업들이 콘텐츠 확보를 위해 영화산업에 진출하였다. 기업들의 자본과 함께 한 젊은 영화인들은 기존 영화의 제작 관행을 바꾸었고, 이전과 다른 상업영화를 통해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멀티플렉스(거대 영화관)의 등장은 영화 소비의 양식을 바꾸었다. 이 기간 한국영화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을 제작하였을 뿐 아니라 주요 국제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등 해외로 진출하게 되였다.

 

 

 

 

  영화산업의 구조변화에 따라 영화 관객층도 변하였다. 신세대 관객들은 1980년대의 사회적인 영화보다는 코미디류의 영화를 선호하였다. 김의석 감독의 <결혼이야기>(1992), 강우석 감독의 <미스터 맘마>(1992)·<마누라 죽이기>(1995), 신승수 감독의 <아래층 여자 위층여자>(1992)·<가슴달린 남자>(1993) 등이 그것이다.


 또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는 판소리와 한(恨)이라는 소재를 통해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1994) 같은 여성영화도 등장하였고, 홍콩영화의 영향을 받은 어두운 갱 영화도 등장하였는데, 그 예가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1994)·<본투킬>(1996), 김영빈 감독의 <김의 전쟁>(1992)·<테러리스트>(1995)이다. 그리고 청소년층에 맞는 액션영화인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1990) 시리즈도 흥행적으로 성공한 영화이다.


  사회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작품으로는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1990)·<그 섬에 가고 싶다>(1993)·<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1991), <꽃잎>(1995), 월남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지닌 정지영의 <하얀 전쟁>(1992)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또 국가폭력으로 인한 구성원 개인의 파멸을 극명하게 보여준 이창동의 <박하사탕>(1999)도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와는 달리 새롭게 등장한 젊은 감독으로는 이명세 감독의 <나의사랑 나의신부>(1990)·<첫사랑>(1993),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1994), 김홍준 감독의 <장미빛 인생>(1994),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민용 감독의 <개 같은 날의 오후>(1995) 등이 이 시기에 등장한 감독들의 작품으로 주목할 만하다.


 또 1997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에 오른 <편지>(1997), 1998년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로맨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도 주목을 받았다. 특히 <8월의 크리스마스.는 일본으로도 수출돼서 긍정적인 성과를 이루었으며,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의 한 장면 

 

 임권택 감독의 액션영화 <장군의 아들>의 한 장면



11. 새로운 한류시대를 열다 (2000년대)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영화 산업은 양적, 질적 성장을 이어갔다. 1990년대부터 하나둘 사라져가던 단관극장들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멀티플렉스 상영관들로 변신했다. 영화의 흥행은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마케팅, 개봉시기의 적절성, 그리고 독점적 스크린 확보와 같은 배급과 상영의 완성도가 결정했다.

 

 2000년대 전반기에는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춘향뎐>(임권택),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실미도>(강우석)를 비롯하여 〈친구〉(곽경택),〈쉬리〉(강제규),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살인의 추억〉(봉준호), 〈조폭마누라〉(조진규), 〈가문의 영광〉(정흥순), <웰컴 투 동막골>,〈왕의 남자〉(이준익) 등 초특급 히트작들이 매년 배출되었다.

 

 

 

 

 

 2000년 후반에도 봉준호의 〈괴물〉(2006), 윤제균의〈해운대〉(2009) 등 관객 1,000만이 넘는 영화도 지속적으로 등장하여 한국영화산업 분위기를 고취하였다. 하지만 마케팅 비용도 회수하지 못한 영화도 상당수 나와 흥행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추어 2000년대 한국영화는 그 소비층을 국내로 국한시키지 않고 좁게는 아시아 넓게는 전 세계로 확장하여 ‘한류의 시대’를 맞게 됐다. 칸 국제 영화제에서 〈취화선〉(2002, 임권택)으로 임권택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하고, 박찬욱 감독의〈올드보이〉(2003)가 심사위원대상, <밀양>(이창동>이 여우주연상(전도연), <박쥐>(박찬욱)가 심사위원상, <시>(이창동)가 각본상, <하하하>(홍상수)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대상을 받은 것은 한국영화가 해외에서도 크게 위상을 높이는 게기가 되어 새로운 영화의 한류시대를 예고했다. 상상을 뛰어 넘는 영상문화의 급속한 발달 속에서 한국영화의 역사는 어떻게 변화할지 미지수이다.

 

 

칸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취화선>의 임권택, <올드보이〉의 박찬욱, <하하하>의 홍상수 감독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밀양>(이창동>의 여우주연상(전도연)

 

▲ 2017년에 개봉한 <택시운전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취재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해외에 알린 외신기자인 위르겐 한츠페터와 그를 도운 택시운전사, 그리고 광주

시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절찬리에 상영되었다.

 

 

12. 아카이브 (archive)

 

 

 

  아카이브란 소장품이나 자료 등을 디지털화하여 한데 모아서 관리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손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모아 둔 파일을 뜻한다. 이 코너에서는 한국영화와 관련된 영화음악을 듣고, 포스터를 감상하며, 한국영화에 관한 역사, 작품, 감독과 배우, 기네스 등 한국영화 정보를 메뉴별로 선택하여 해당 내용을 검색해 볼 수 있다.


 촬영 장비와 영화 대본, 감독들의 소장품 등 한국영화박물관의 전시품들은 대부분 영화를 아끼는 이들로부터 기증받은 것들이다. 전시품마다 기증자의 이름이 표기돼 있다. 어른 몸체만 한 35밀리 영사기는 대구에 소재한 코리아 극장에서 기증했다. 극장 뒤편 어둠 속에서 ‘촤르르’ 필름 감기는 소리를 내며 환하게 불을 밝혔을 이 영사기는 전시품 중 가장 덩치가 커 외양만으로도 큰 존재감을 나타낸다.



13. 한국영화 100선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 100선’도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국내의 대표적인 영화사연구자, 비평가 등 영화인들의 설문을 거쳐 영화를 선정했다. 한국영화 초창기부터 2012년까지 개봉한 장편영화 중 대중 의식을 잘 반영하였거나 사회의 독특한 맥락에서 사적 가치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 등이 선정 기준이었다.

 

 

          

   

   

 1위에 오른 작품은 김기영 감독의 <하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1위에 오른 작품은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등 세 편이었고, 4위에는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 5위는 강대진 감독의 <마부>(1961), 6위는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 7위는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8위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 9위는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1983),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 가 차지했다.

 

 

  

 

▲ (차례대로) 4위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5위 강대진 감독의 <마부>,  6위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 (차례대로) 7위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 8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9위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감독별로 보면 임권택 감독(7편), 이만희 감독(6편)의 작품이 가장 많았다. 임권택 감독 작품은 <짝코>(1980) <만다라>(1981) <길소뜸>(1985) <티켓>(1986) <씨받이>(1986) <서편제>(1993) <춘향뎐>(2000) 등 모두 모두 7편이 올랐고, 이만희 감독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마의 계단>(1964) <검은 머리>(1964) <귀로>(1967) <휴일>(1968) <삼포가는 길>(1975) 등 6편이나 올랐다.


 그리고 4편의 작품을 올린 감독은 신상옥, 김기영, 김수용, 이장호 감독이었다. 신상옥 감독은 <지옥화>(1958) <로맨스빠빠>(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를, 김기영 감독은 <하녀>(1960) <고려장>(1963) <화녀>(1971) <이어도>(1877)를, 김수용 감독은 <혈맥>(1963) <갯마을>(1965) <산불>(1967) <안개>(1967>를, 이장호 감독은 <별들의 고향>(1974)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바보선언>(1983)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 등의 작품을 한국영화 100선에 올려놓았다.


그 외에도 1960년대 유현목 감독은 <오발탄>(1961) <김약국의 딸들>(1963)을, 1970년대 김호선 감독은 <화분>(1972) <바보들의 행진>(1975)의 하길종 감독, <영자의 전성시대>(1975) <겨울여자>(1977)를, 1980년대  이두용 감독는 <최후의 증인>(1980) <피막>(1980)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을, 배창호 감독은 <꼬방동네 사람들>(1981)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을, 박광수 감독은 <칠수와 만수>(1988) <그들도 우리처럼>(1990)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을,  이명세 감독은 <개그맨>(1988)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등의 작품을 올렸다.   


1990년대는 장선우 감독이 <우묵배미의 사랑>(1991), <경마장 가는 길>(1991) <꽃잎>(1996)을, 정지영 감독은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을, 홍상수 감독은 <돼지가 우물에 바진 날>(1996> <강원도의 힘>(1998)을 올렸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김기덕 감독의 작품들이 눈에 띤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 중에는 <박하사탕>(1999) <밀양>(2007) <시>(2010)가,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 보이>(2003)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가, 김기덕 감독의 <빈집>(2004) <피에타>(2012) 등이 100선 목록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00편의 주옥같은 영화가 퍼즐 조각처럼 한데 모여 파노라마를 이뤘다. 무명옷의 조선악극단 배우부터 현재의 스타들까지 총출동한 대형 화면에서는 금방이라도 불꽃 튀는 연기 열전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이들 영화들의 제목만 봐도 한국영화사의 찬란한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빛날 영화들을 하나씩 새기다 보면 추억과 감동이 느껴진다.

 

 

 

 

14. 애니메이션 및 영상의 원리 체험

 

 

 

 

    한국영화박물관에서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직접 그려보면서 애니메이션 원리를 이해하는 체험도 가능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대형 원기둥 앞에 아이들이 몰려 있다. 언뜻 보면 놀이동산의 놀이기구와 비슷해 보이지만 원기둥 모양의 이 통은 조이트로프(zoetrope)라는 애니메이션 기구이다.

15. 기획전시- 김기영(金綺泳) 감독의 타계 20주기 기념전 

 

 

  김기영 감독의 타계 20주기 기념 전시 '하녀의 계단을 오르다' 기념전이 열리고 있는 기획전시실도 둘러보았다. 이번 전시에는 김기영 감독의 사진과 육필 콘티, 영화로 제작되지 못한 시나리오 등 유품과 함께 '하녀'(1960) 등 주요 작품에 대한 평론가와 감독들의 음성해설을 감상할 수 있다. 작품 속 공간을 재현해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재현 섹션도 마련되어 있다. <하녀> 속 미장센을 재현한 공간, <화녀>. <충녀> 속 스테인드글라스를 활용한 어트랙션을 함께 선보이고 있다.


 김기영 감독(1919~1998)은 1955년 최초로 동시 녹음 영화 〈주검의 상자〉(1955)로 데뷔한 이후〈양산도〉(1955)〈봉선화〉(1956),〈여성전선〉(1956), <황혼열차〉(1957), 〈초설〉(1958), 〈십대의 반항〉(1959) 등의 작품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 중에서 〈십대의 반항〉은 오영진의 시나리오로 10대 비행청소년들의 반항과 갈등을 예리하게 파헤친 역작이다. 이 작품으로 김기영은 국내상을 휩쓸었고, 당시 아역배우였던 안성기가 제4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소년특별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기영의 1960년대 이전 작품들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분위기를 강렬하게 풍기는 경우가 많았으나 1960년 발표한 〈하녀〉(1960)를 기점으로 그의 영화적 스타일과 감수성은 크게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비판적 리얼리즘의 성향에서 독창적인 표현주의로 감독의 색깔이 바뀌어 김기영은 ‘개성파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하녀〉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적 특징은 실내극영화의 중요한 특징과 일치한다. 등장인물이 가족이라는 소수로 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 내에서 생긴 문제를 배경으로 심리적 상태나 그 변화를 그려나가기 때문이다. 특히 〈하녀〉는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매우 이질적인, 그로테스크하고 음산한 알레고리의 공간을 구성해 낸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녀>를 포함하여〈화녀(火女)〉(1971),〈충녀(蟲女)〉(1972) 등 ‘삼녀'시리즈를 내놓았다.


 이후 그는 표현주의 영화의 특징을 〈아스팔트〉(1964),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1966), 〈렌의 연가〉(1969), 〈파계〉(1974), 〈육체의 약속〉(1975), 〈이어도〉(1977),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1979〉, <육식동물〉(1984) 등 자신이 감독한 31편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드러냈다.



여행정보

 

주소 :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400 (지번 : 상암동 1602) / 전화 : 02-3153-2072

가는 방법 : 지하철 6호선 디지털미디어시티역 2번 출구. 지선버스 7711, 7730번 환승.

간선버스 171, 271, 470, 710번, 지선버스 7013, 7019, 7715번 누리꿈스퀘어 하차

영업시간 : 월~금 10:00 ~ 19:00 (마지막 주 수요일 21:00까지), 토~일 10시~18

휴무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 연휴, 추석연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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