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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6

매미가 없던 여름 / 김광규 매미가 없던 여름 - 김광규 감나무에서 노래하던 매미 한 마리 날아가다 갑자기 공중에서 멈추었다. 아하 거미줄이 쳐 있었구나 추녀 끝에 숨어 있던 거미가 몸부림치는 매미를 단숨에 묶어버렸다. 양심이나 이념 같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후회나 변명도 쓸데없었다. 일곱 해 동안 다듬어 온 매미의 아름다운 목청은 겨우 이레 만에 거미 밥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걸리면 그만이다 매미들은 노래를 멈추고 날지도 않았다. 유달리 무덥고 긴 여름이었다. - 시집 《대장간의 유혹》(1991)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객관적 상관물인 ‘매미’와 ’거미‘를 통해 권력에 의해 민중이 일방적으로 억압당하는 세력에 대하여 우회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이 시에서 ’매미‘는 약자 또는 억압받는 민중을 상징하고, 이에 대응하여 거미줄을 .. 2020. 4. 18.
묘비명(墓碑銘) / 김광규 묘비명(墓碑銘) - 김광규 한 줄의 시(詩)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묘비명을 보면서 권력의 기만적인 통치술과 그에 아첨하는 세력, 그리고 비이성적인 대중들의 모습을 통하여 현대사회를 비판한 작품이다. 이 시는 ‘시’와 ‘돈’의 대비를 통해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정.. 2020. 4. 18.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 2020. 4. 18.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아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 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 시집 《대장간의 유혹》(1991) :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수록 .. 2020. 4. 18.
상행(上行) / 김광규 상행(上行) - 김광규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 2020. 4. 17.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일러스트=잠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 2020.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