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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6

수선화, 그 환한 자리 / 고재종 수선화, 그 환한 자리 ​ - 고재종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샛노란 꽃을 밀어올리다니 네 오롯한 호흡 앞에서 이젠 나도 모르게 환해진다 거기 문득 네가 있음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 시집 《앞 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1997) ◎시어 풀이 하르르 : 얇고 성기며 풀기가 없어 매우 보드라운 모양. 오롯한 : 모자람이 없이 온전한. 엄정(嚴正) : 1.엄격하고 바름. 2. 날카롭고 공정함.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작품은 수선화를 의인화하여 수선화가 피어나는 순간을 통해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과 숭고함을 감각적인 언어로 형상.. 2020. 4. 12.
감나무 그늘 아래 / 고재종 감나무 그늘 아래 - 고재종 감나무 잎새를 흔드는 게 어찌 바람뿐이랴. 감나무 잎새를 반짝이는 게 어찌 햇살뿐이랴. 아까는 오색 딱다구리가 따다다닥 찍고 가더니 봐 봐, 시방은 청설모가 쪼르르 타고 내려오네. 사랑이 끝났기로서니 그리움마저 사라지랴. 주먹 송이처럼 커갈 땡감들. 때론 머리 위로 흰 구름이고 때론 온종일 장대비를 맞아보게. 이별까지 나눈 마당에 기다림은 왠 것이랴만, 감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그래그래, 밤이면 잠 뒤척여 산이 우는 소리도 들어보고 새벽이면 퍼뜩 깨어나 계곡 물소리도 들어보게. 그 기다림 날로 익으니 서러움까지 익어선 저 짙푸른 감들, 마침내 형형 등불을 밝힐 것이라면 세상은 어찌 환하지 않으랴. 하늘은 어찌 부시지 않으랴. - 시집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2001) .. 2020. 4. 12.
들길에서 마을로 / 고재종 들길에서 마을로 - 고재종 해거름, 들길에 선다. 기엄기엄 산 그림자 내려오고 길섶의 망초꽃들 몰래 흔들린다. 눈물방울 같은 점점들, 이제는 벼 끝으로 올라가 수정 방울로 맺힌다. 세상에 허투른 것은 하나 없다. 모두 새 몸으로 태어나니, 오늘도 쏙독새는 저녁 들을 흔들고 그 울음으로 벼들은 쭉쭉쭉쭉 자란다. 이때쯤 또랑물에 삽을 씻는 노인, 그 한 생애의 백발은 나의 꿈. 그가 문득 서천으로 고개를 든다. 거기 붉새가 북새질을 치니 내일도 쨍쨍하겠다. 쨍쨍할수록 더욱 치열한 벼들, 이윽고 또랑물 소리 크게 들려 더욱더 푸르러진다. 이쯤에서 대숲 둘러친 마을 쪽을 안 돌아볼 수 없다. 아직도 몇몇 집에서 오르는 연기. 저 질긴 전통이, 저 오롯한 기도가 거기 밤꽃보다 환하다. 그래도 밤꽃 사태 난 밤꽃 .. 2020. 4. 12.
첫사랑 / 고재종 첫사랑 -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 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恍惚)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 출전 시집 《쪽빛 문장》(2004) ◎시어 풀이 난분분(亂紛紛) : ‘난분분하다’의 어근. 눈이나 꽃잎 따위가 흩날리어 어지러운. 덴 : 불이나 뜨거운 기운으로 살이 상한.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한겨울에 나뭇가지에 눈이 쌓이는 풍경을 소재로 아름다운 눈꽃을 피워내듯, 시련과 고난 그리고 헌신으로 피워낸 아름다운 첫사랑을 .. 2020. 4. 11.
날랜 사랑 / 고재종 날랜 사랑 - 고재종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 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婚姻色)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 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流彈)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 시집 《날랜 사랑》 (1995) ◎시어 풀이 혼인색 : 양서류·조류·어류 등의 동물에서, 번식기에 나타나는 피부의 빛깔 유탄(流彈) : 빗나간 탄환.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봄날 산란기를 맞아 수면 위로 뛰어올라 여울물을 차고 상류로 올라가는 은피라미 떼의 역동적인 생명력에 대한 예찬을 감각적인 시어를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1연은 은피리미 떼의 생명력과 아.. 2020. 4. 11.
사랑시[47] : 날랜 사랑 - 고재종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47] 날랜 사랑 - 고재종 ▲ 일러스트=클로이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 2008.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