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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들길에서 마을로 / 고재종

by 혜강(惠江) 2020. 4. 12.

 

 

 

 

 

들길에서 마을로

 

 

- 고재종

 

 

 

해거름, 들길에 선다. 기엄기엄 산 그림자 내려오고 길섶의 망초꽃들 몰래 흔들린다. 눈물방울 같은 점점들, 이제는 벼 끝으로 올라가 수정 방울로 맺힌다. 세상에 허투른 것은 하나 없다. 모두 새 몸으로 태어나니, 오늘도 쏙독새는 저녁 들을 흔들고 그 울음으로 벼들은 쭉쭉쭉쭉 자란다. 이때쯤 또랑물에 삽을 씻는 노인, 그 한 생애의 백발은 나의 꿈. 그가 문득 서천으로 고개를 든다. 거기 붉새가 북새질을 치니 내일도 쨍쨍하겠다. 쨍쨍할수록 더욱 치열한 벼들, 이윽고 또랑물 소리 크게 들려 더욱더 푸르러진다. 이쯤에서 대숲 둘러친 마을 쪽을 안 돌아볼 수 없다. 아직도 몇몇 집에서 오르는 연기. 저 질긴 전통이, 저 오롯한 기도가 거기 밤꽃보다 환하다. 그래도 밤꽃 사태 난 밤꽃 향기. 그 싱그러움에 이르러선 문득 들이 넓어진다. 그 넓어짐으로 난 아득히 보이는 지평선을 듣는다. 뿌듯하다. 이 뿌듯함은 또 어쩌려고 웬 쑥국새 울음까지 불러내니 아직도 참 모르겠다, 앞 강물조차 시리게 우는 서러움이다. 하지만 이제 하루 여미며 저 노인과 나누고 싶은 탁배기 한 잔, 그거야말로 금방 뜬 개밥바라기 별보다도 고즈넉하겠다. 길은 어디서나 열리고 사람은 또 스스로 길이다서늘하고 뜨겁고 교교하다. 난 아직도 들에서 마을로 내려서는 게 좋으나, 그 어떤 길엔들 노래 없으랴. 그 노래가 세상을 푸르게 밝히리.

 

           - 시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1997)

 

 

시어 풀이

 

쏙독새 : 새 종류, 입이 크며 부리와 다리는 짧음. 익조(益鳥). 바람개비.

허투른 : 쓸모 없는, 의미나 가치가 없는

붉새 : 노을의 방언(전라).

오롯한 : 모자람이 없이 온전한.

개밥바라기 : 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金星).

고즈넉하다 : 고요하고 아늑하다.

교교하다 : 1. 달이 썩 맑고 밝다. 2. 썩 희고 깨끗하다. 3. 매우 조용하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고요한 농촌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평화롭고 아름다운 농촌의 정경을 감각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함께 교감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다양한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전원적이고 토속적인 농촌 마을의 풍경을 표현하면서 해가 저무는 순간 농촌의 이름다움과 평화로운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세밀하게 묘사를 함으로써 독자들은 시의 배경을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시는 화자의 시선이 이동하는 데 따라 들길에서 마을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작품은 해거름, 들길에 선다는 시구로 조용한 농촌의 저녁 무렵을 배경으로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을 형상화하면서 시작된다. 화자는 해걸음 들 길 위에서 망초꽃, 철새인 쏙독새의 울음소리, 논에 심은 벼의 생명력을 발견한다. 또랑물에서 삽을 씻는 노인의 모습에서 쌩쌩할 내일을 예감하고 더욱 푸르게 자라게 될 벼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들 묘사는 들길의 풍경과 벼가 푸르러 가는 들녘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화자의 시선은 대숲 둘러친 마을 쪽으로 이동한다. 연기 오르는 집의 모습을 발견한다.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저녁 풍경이다. ‘저 질긴 전통이, 저 오롯한 기도는 오랜 세월 우리의 삶의 방식으로 이어져 온 저녁연기를 성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마을에 밤꽃 향기가 가득하다. 이어 시적 화자는 마을에 가득한 밤꽃 향기의 싱그러움에 갑자기 들판이 넓어져 보여 가슴 뿌듯해 지면서 쑥국새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 쑥국새 울음소리가 한()을 풀어내는 소리처럼 들려 서러움을 느낀다. ‘강물조차 시리게 우는 서러움은 공감각적 표현으로 서러운 정서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화자는 하루를 접으며 노인과 탁배기 한 잔 나누고 싶은 마음을 느낀다. 하루의 농사일을 마무리한 노인과 탁배기 한 잔을 나누고 싶어 하는 심정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장면은 화자와 노인과의 교감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화자의 속마음도 암시하고 있다. 화자는 사람과의 유대관계가 돈독한 시골의 인심을 길은 어디서나 열리고 사람은 또 스그로 길이다.’라며 고즈넉한 저녁에, 들에서 마을로 내려서는 길에서 그는 노래가 세상을 푸르게 할 것이라 이야기한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전원적 공간은 우리 모두가 유전자처럼 물려받은 향토 문화의 보고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경관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경관 속에 온전히 담겨 있는 자연의 이치,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묘사함으로써 우리네 삶의 한 전형을 창출하고 있다.


  이 시는 산문시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시는 연으로 나눠지지 않고 전체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산문적 형식에도 불구하고 반점과 온점을 활용하여 자연스러운 운율을 드러낸다. 시선의 이동을 통해 시상이 전개되고 있으며, 이러한 화자의 시선은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 대한 애정 어린 태도를 전제로 하고 있다. 단순히 배경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연의 이치와 생명력의 힘에 대한 예찬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작자 고재종(高在鍾, 1957 ~ )

 

 

 시인. 전남 담양 출생. 1984실천문학신작 시집 시여 무기여동구 밖 집 열 두 식구>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지금까지 주로 농촌의 풍경과 삶을 배경으로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담은 작품을 발표했다. 절제된 언어 표현과 토속어 구사, 음악성을 특성으로 하는 시를 주로 창작해 왔다. 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1987), 새벽 들(1989), 쌀밥의 힘(1991), 사람의 등불(1992), 날랜 사랑(1995),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1996),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1997),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2001). 쪽빛 문장(2004) 등이 있다.

 

 특히, <들길에서 마을로>의 시인 고재종은 농촌의 정경을 질박한 언어로 형상화하는 농촌 시들을 다수 남기고 있다. 이러한 시들을 통해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한다. 이 시를 수록하고 있는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은 총 4부로 짜여있는데, 각 장들의 시에는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과 이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이 드러나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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