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호와 평화의 댐
물길 따라 찾아간 '파로호'와 '평화의 댐'
글·사진 남상학
* 파로호비 *
파로호는 강원도 화천군(華川郡) 간동면(看東面) 구만리(九萬里)와 화천읍(華川邑) 동촌리(東村里) 사이 북한강에 있는 다목적댐으로 인해 생긴 인공호수다. ‘아름다운 냇물’이란 뜻을 가진 '화천'의 파로호가 금강산에서 시작하여 휴전선을 뚫고 남쪽으로 흘러 이곳에 이른다. 파로호의 북쪽으로 국민의 성금으로 이룩한 평화의 댐이 있으나, 현재는 전력 생산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홍수 조절 기능과 관광지로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그 파로호와 평화의 댐을 찾아가는 길은 그야말로 여로이다. 호수를 따라 굽이굽이 휘감아 돌아 북쪽으로 달리면 이것이 강원도 길이라는 느낌을 절로 받게 되고 유장한 물의 흐름에 절로 감탄사를 터뜨리게 된다.
5번 도로를 타고 춘천의 의암호를 우측으로 끼고 계속 달리면 춘천호를 지나 화천에 이르고, 화천에서 5번 국도는 북한강을 버리고 북진한다. 여기서 461번을 탄다. 본격 파로호 드라이브는 바로 이 461번 지방도에서 시작이다. 파로호를 발아래 두고 달리고 싶다면 구만리 선착장을 지나 추곡령으로 이어지는 461번 지방도 코스가 좋다. 하지만 호수 전체가 송곳처럼 치솟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차를 타고 파로호의 모습을 온전하게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파로호를 보고 평화의 댐으로 향하려면 진행하는 방향에서 죄측으로 460번 지방도를 타보는 것이 좋다. 강원도 산길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굽이굽이 휘어 감긴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어느덧 파로호의 북쪽 끝에 다다르게 된다. 대이리를 막 지나면 구만리에 이른다. 여기서 우측으로 구만교를 건너 올라가면 이 길이 화천 파로호 뱃터 횟집촌으로 향하는 길이다. 먼저 이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 구만리 고개 마루턱에 있는 파로호 전시관*
파로호 전시관은 산 쪽으로 언덕 위에 있다. 파로호전시관은 2층 건물로 1층에는 휴게실, 2층에는 북한의 실상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북한관이 있으며, 대통령 친필 파로호비, 파로호 전투전적비 등이 있다. 파로호 전투전적비(자유수호탑)에는 "길손이여 자유민에게 전해 다오. 우리는 겨레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곳에 누었노라" 라는 비문이 적혀 있다. 뒤편 오솔길로 100m 쯤 거슬러 올라가면 파로호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2층 규모의 전망대와 파로호가 있다. 구만리고개를 넘어서 호수 쪽으로 내려가면 구만리 선척장이 있고, 선착장에는 큰 배 한 척과 몇 개의 보트가 떠 있다. 그리고 파로호에는 몇 척의 보트가 시원한 물살을 가르며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파로호
파로호는 1944년 북한강 상류의 협곡을 막아 축조한 화천댐으로 인해 생긴 인공호수다. 10억 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규모의 호수로 상류에 평화의 댐이 있다. 화천댐은 높이 86.5m, 제방 길이 435m, 총저수용량 10억 1800만 톤, 시설발전용량 10만 8000㎾ 규모로 1944년에 완공되었다. 이 댐은 저수형 콘크리트 중력식 댐으로서 댐 용적 및 높이, 저수용량 등 수력발전 단일목적으로는 국내 최대이며 최다수의 발전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 화천댐을 막아 형성된 호수 파로호(破虜湖)는 북쪽으로는 평화의 댐까지 이르고 동쪽으로는 양구 북쪽까지 이른다. 호수 주변으로 일산(日山, 1150m)·월명봉(月明峰, 719m) 등 높은 산이 솟아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파로호의 강 양쪽 우거진 숲 속에는 노루, 멧돼지, 고라니, 토끼, 산새들이 낙원을 이루고 있고, 또한 공해 없는 깊은 물에는 잉어, 붕어, 메기, 쏘가리 등 담수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현재 관광지로 지정 개발 추진 중이다. 따라서 이곳은 낚시터로 유명하여 전국에서 강태공들이 몰려든다.
그런데 파로호의 명칭에는 너무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깨뜨릴 파(破)’, ‘사로잡을 로(虜)’를 사용, 6·25전쟁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을 전멸시킨 승리의 뜻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지어서 지금까지 부르고 있는 것이다. 1951년 5월, 중공군 10, 25, 27연대와 우리 해병 1연대 장병들이 격전 끝에 중공군을 수장시키는 승전고를 올림으로써 화천저수지가 오랑캐를 크게 무찌른 호수라 하여, 고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破虜湖)로 명명, 친히 휘호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파로호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비극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어느 새 야생동물과 물고기의 천국으로 변한 아름다운 산천,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우리 땅을 과거의 뼈아픈 역사만을 강조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이런 비극을 청산하고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오늘 우리 민족의 발걸음을 가볍게 할 필요는 없을까 하고 혼자 생각해 본다.
또 파로호는 우리들의 머릿속에 평화의 댐과 밀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온 국민이 성금을 내 북한의 수공을 막아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시기를 보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 오정희의 소설 <파로호>는 그런 시기의 한 편린과 함께 파로호가 안고 있는 역사를 잔잔한 물결처럼 보여 준다.
작품 속의 화자 혜순이 향토 사학자 김선생을 좇아 선사 유적지를 돌아보며 인간의 위선과 역사에 대한 몰이해, 수몰 지구에 고향을 둔 사람들의 애타는 심정 등을 파로호의 물결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물결에서 작가가 보아내는 것은 유물로 발견된 돌에서 느끼는 깊은 슬픔과 지극한 그리움 같은 것이다.
*물고기의 산란을 위해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수초섬
파로호는 1987년 북한의 수공(水攻) 위협에 대비키 위해 착공된 평화의 댐 공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담수를 대량으로 빼내, 이 지역 어민들의 어로에 지장이 초래되고 지역상권이 위축돼왔는데, 이번에 내린 풍족한 비로 인해 파로호의 수량이 오랜만에 적정 담수량을 확보한 상태이다.
*파로호에서 운항하는 유람선
그런데 선착장에는 보트 외에 대형 유람선 한척이 운항 중이다. 이것은 화천군에서 건조한 것으로 그 규모는 80t급으로 대형버스 2대, 승용차 2대, 승객 100여명을 태울 수 있다. 유람선 운항 구간은 경치가 수려하기로 소문난 화천군 구만리 배터에서 평화의 댐에 이르는 24㎞. 왕복 운항시간은 3시간. 평화의 댐은 화천읍에서 육로로 40㎞나 떨어져 있는데다, 접근도로가 험난하고 좁을 뿐만 아니라 겨울철에는 통행이 어려워 수도권 관광객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며, 보다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호숫가에는 관광식당촌이 형성되어 있어 강변횟집( 033442-5007 ), 서울횟집, 어부횟집( 033-442-3123 ) 등이 영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서 좌측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멀리 화천댐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파로호에서 잡아 올린 각종 민물고기로 매운탕을 해준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먹을 수 없는 쏘가리 매운탕도 있다.
평화의 댐으로 가는 길
구만리 선착장에서 다시 나와 구만교를 건너 460번 도로를 우회전하면 88공원 및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이 나온다. 이곳은 화천읍에서 약 6km 떨어진 곳으로 평화의 댐 진입로에 위치하고 있다. 화천발전소 앞으로는 북한강이 흐르고 강변에는 크고작은 자갈이 깔려 있어 낵시, 캠핑 등 여름피서지로 적합하다. 화천 체험학습장 내에 있는 향토민속자료전시관에는 의류, 화폐류. 혼례, 제례, 농기구, 수렵구 들을 전시하고 있다.
여기서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면 소위 딴산천이 나온다. 산이라기보다 섬같이 물가에 떠있는 조그만 동산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바위가 울산에서 금강산으로 가던 중 금강산 일만 이천봉이 다 채워졌다 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한다. 딴산의 모습도 이채롭지만 산그늘과 강물이 시원해 가족 단위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국내 최북단에 위치한 해산터널
풍산리를 지나며 본격적인 평화의 댐 드라이브 코스가 펼쳐진다. 평화의 댐으로 가는 길은 평화를 수호하는 것만큼이나 굽이굽이 이어지는 힘든 길이다. 화천에서 평화의 댐으로 이어지는 아흔아홉 굽이의 중간 길목에 있는 해산 전망대에 서니, 구름이 어깨에 닿을 듯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화천~해산터널~평화의 댐~양구까지 진입도로는 구절양장(九折羊腸) 고갯길의 연속으로 산악 드라이브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해발 700m에 직선거리 1,986m의 국내 최북단에 위치한 해산터널은 국내에서 두 번째로 긴 터널이다. 이 터널을 지나 조금 진행하면 해산전망대가 있다. 산 정상에서 무공해 해산 느타리버섯을 구입할 수 있다.
*물이 많아지면 비수구미 마을은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는 평화의 댐 말고 유명한 명소가 또 하나 있다. 강원도에서도 오지 중에 오지 마을로 손꼽히는 ‘비수구미마을’. 오직 세 가구만 사는 초미니 마을이다. 북한강 상류에 있는 강원도 화천군 동촌2리 비수구미 마을은 ‘육지 속 섬마을’이다. 일제 시대 화천댐이 지어지면서 댐 상류에 있는 마을이 강에 갇혔기 때문이다.
파로호변의 수하리 선착장에서 주민들의 통통배를 불러야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화천댐 배수 공사로 파로호 상류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마을까지 육로로 연결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물이 많아져서 다시 배가 없으면 오도 가도 못하는 ‘섬’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듣는 파로호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일제가 강제로 만든 화천댐은 이 일대의 마을을 모조리 수장해버리고 말았다. “아주 예전에는 이 파로호 밑바닥에서 많은 사람이 살았지. 아이들 학교도 몇 개나 있었고, 이름난 양조장이 셀 수도 없이 많았지.” 댐이 세워지고 뭍이 물에 잠기자 사람들은 눈물로 호수를 채우며 고향을 등졌다. 다만 산을 태워 밭을 일구던 화전민만이 산등성이에 남아 생계를 유지했다.
*비수구미 마을의 민박집
비수구미민박 파로호까지 왔다면 비수구미마을에서 1박을 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세 가구가 모두 민박을 하지만 장윤일 씨가 운영하는 비수구미민박이 가장 낫다. 객실료는 인원에 상관없이 방 하나에 무조건 3만원. 5000원짜리 백반에는 구수한 청국장과 열 가지 이상의 반찬이 정갈하게 차려져 나온다. 앞쪽에 1급수 계곡이 흘러 물놀이에도 좋고 어항을 이용해 어름치, 꺾지 같은 물고기를 잡을 수도 있다.
안보관광지로 변신한 평화의 댐
*댐의 동쪽 끝에 세운 평화의 댐 표지판
한국전쟁 때 치열한 싸움터였던 강원도 화천군은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영령들이 골짜기마다 숨 쉬고 있는 곳이다. 평화의 댐은 그 화천군에 자리 잡고 있다. 화천읍 동촌리에 있는 평화의 댐은 북한의 임남댐(일명 금강산댐) 붕괴에 대비하기 위해 북한강 최상류 물줄기를 막아 만든 댐으로, 1987년 공사를 시작하여 1989년에 1단계 공사가 완료했으나, 2002년 초 임남댐 정상 부위의 훼손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긴급 보강공사와 2단계 증축공사를 마쳤다.
그 결과 평화의 댐은 증축공사를 통해 댐 높이가 80m에서 125m로 높아졌고, 저수량도 5억 9천만 톤에서 26억 3천만 톤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임남댐보다 1천만톤이나 많아 임남댐이 붕괴되는 최악의 상황에도 하류에 있는 화천댐을 정상 운영하면서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평화의 댐 저수용량은 소양강댐(29억t), 충주댐(27억 5천만 톤)에 이어 세 번째이다. 높이도 소양강댐보다 2m가 더 높은 국내 최고의 댐에 해당한다.
평화의 댐이 준공됨에 따라 북한강 상류 지역의 집중 호우나 임남댐 붕괴 등이 일어나더라도 하류 지역의 홍수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평화의 댐은 저수를 통해 홍수 방지 기능만 있을 뿐 발전 기능은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평화의 댐은 홍수에 대비하여 항상 댐을 비워놓는 홍수조절 전용 댐으로이지만, 주변관광지 개발에 따라 이제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되고 있다. 따라서 평화의 댐은 철의 삼각지 - 평화의 댐 - 양구 펀치볼 전적비 - 고성 통일전망대 등 통일안보관광지를 잇는 순환코스의 요충지이다.
*평화의 댐을 친환경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장쾌한 물소리의 벽천, 잔잔한 수면과 아담한 소폭포를 지닌 연못 등 편안한 휴식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수자원공사에서 마련한 '평화의댐물문화관'은 '자연 속의 평화의댐', '물은 귀중한 자원' '평화의댐과 임남댐' '주변둘러보기' 전시 코너와 영상실로 꾸며져 있다.
한때 냉전과 타락한 정치의 상징이었던 평화의 댐은 최근 ‘효자 댐’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한편에서는 지역경제를 살리는 탁월한 관광자원으로 또 한편에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물난리를 막는 든든한 물막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2006년 강원도에 폭우가 내렸을 때 평화의 댐이 제구실을 톡톡히 했다. 국민의 눈총을 받던 애물단지가 보물단지로 바뀐 셈이다.
무명용사가 숨진 현장엔 비목공원(碑木公園)이 세워지고
평화의 댐 물문화관 앞의 경사면을 내려가면 무명용사가 숨진 현장이다. 이곳에 비목공원을 조성햐여 한국전쟁 당시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 넋을 기리고 있다. 1964년 백암산 비무장지대에 배속된 한 초급장교는 따스한 석양이 빨간 단풍에 물들기 시작한 초가을 오후 순찰 중에 잡초만 우거진 비무장지대의 양지 바른 산모퉁이에서 이끼 낀 돌무더기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팻말처럼 보이는 썩은 나무 등걸을 바라보며 그 돌무더기가 어느 무명용사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전우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녹슨 철모와 이끼로 뒤덮인 돌무덤, 그 옆을 지켜선 새하얀 산목련 속에서 초급장교는 돌무덤의 주인도 자신과 같은 또래의 젊은 무명용사였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화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그 곳에서 한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가곡 ‘비목(碑木)’은 그렇게 채 꽃피우지 못하고 산화한 젊은 무명용사를 기리기 위해 탄생된 헌시이다. 이 시에 작곡가 장일남씨가 곡을 붙인 노래가 바로 국민 가곡 ‘비목’이다.
* 승리의 상징인 V자 장승 뒤로 돌무더기 위에 세워진 십자가와 그 뒤로 숭고한 죽음을 기리는 기념탑이 우뚝 서있다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가곡 ‘비목’을 나지막이 흥얼거리며 나무 위에 힘없이 걸쳐 있는 녹슨 철모를 보고 있노라니, 둔탁한 무엇인가가 정수리를 치는 느낌이었다. 돌 대신 나무로 대신한 호국 전사들의 비, 비목나무 하나하나에 그들의 혼이 숨어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 온다.
이미 평화의 댐은 인기 관광코스로 자리 잡았다. 설악산을 들렀다 서울로 돌아가는 관광객이 자주 찾는다. 하루 평균 300명, 1년에 11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 평화의 댐을 찾은 관광객은 먼저 댐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감탄한다.
그리고는 첫 마디가 “이 댐 만들 때 나도 돈 냈어. 성금 안내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얼마나 겁을 주었으니까. 사연이야 어찌됐든 우리나라 건축물 중에 평화의 댐처럼 ‘주인’이 많은 건축물도 없다. 대한민국 인구 절반이 이 댐의 지분을 주장한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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