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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정선아라랑의 고장 아우라지와 구절리 레일바이크

by 혜강(惠江) 2006. 7. 8.

정선 아우라지와 구절리 


아우라지엔 정선아리랑 가락이 흐르고 
레일바이크 철길엔 자전거가 달리고 풍경이 흐른다.



·사진  남상학

 





  정선군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가파른 산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기 때문에 여간 농사짓기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북면 여량만큼은 예외였다. 송천과 골지천이 바로 옆에 있는 데다 너른 들이 있어 논농사가 가능한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먹고 남을 식량이 있다 하여 여량(餘糧)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여량 아우라지와 정선아리랑

   아우라지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의 대표적인 가사(歌詞) 유래지로서 아우라지란 두 갈래 물이 한데 모여 ‘어우러진다’는 뜻을 지녔다.  


  정선읍에서 21.8km 떨어진 여량의 아우라지는 백두대간 소황병산에서 발원한 송천(구절리)과 남동쪽 임계에서 흘러온 골지천이 합류하여 어우러진다. 하천은 아우라지에서 만나면서 비로소 강이 된다. 강변에는 자갈밭이 꽤 넓게 펼쳐져 있고, 강물 위에 줄을 매어두고 이 줄을 잡고 오가는 '줄배'가 있다. 물이 차츰 줄어드는 늦가을에는 생나무 등을 잘라 엮어 만든 '섶다리' 비슷한 것을 만들어 다음 해 봄까지 사용했다. 봄이 지나고 큰물이 불어나면 설치한 다리는 물살에 떠내려가고, 그때부터 아우라지 뱃사공의 일거리는 생겼다. 

  아우라지나루는 강의 남북을 잇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으나 여량교가 놓이며 나루 기능이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아우라지 북쪽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장을 보거나 할 때는 나룻배를 이용한다. 지금 아우라지에는 섶다리 대신 돌다리가 있어 물이 많지 않은 날은 돌다리로 강을 건넌다. 
강 건너에 여송정(餘松亭)이 있고, 조금은 조악하게 만든 '아우라지 처녀상'이 있다. 이 처녀상은 합수머리 북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처녀상에는 가슴 아픈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처녀상에 얽힌 이야기

  여량에는 서로 결혼을 약속한 처녀총각이 있었다. 총각은 뗏사공으로, 떼를 팔아 돌아오면 처녀와 결혼하기로 다짐을 하고, 큰 물에 떼를 띄우고 아우라지를 떠났다. 그러나 그 총각은 한 해가 가도, 두 해가 가도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 그 총각은 동강 어딘가의 드센 여울에서 떼가 뒤집혀 목숨을 잃은 듯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차 절망적으로 변했다. 아우라지나루에서 총각을 매일 기다리던 처녀는 결국 아우라지 강에 몸을 던져 죽음을 선택하고 말았다. 1983년경, 여량 사람들은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이 처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처녀상을 세웠다. 

  한편 이 처녀상에 얽힌 또 다른 실제 이야기가 있었다. 한 처녀가 시집을 가기 위해 가마를 탄 채 배에 오르게 되었다. 배에는 하객과 친척들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 줄배가 무게 중심을 잃고 뒤집히는 바람에 가마에 탄 처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 후로 해마다 아우라지에서는 두세 명씩 익사 사고가 생겼다. 아마 억울하게 죽은 처녀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마을 사람들은 생각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처녀상을 세운 이후로는 익사 사고가 신기하게 사라졌다고 전한다.

 

 



아우라지와 뗏목

 

  여량 아우라지나루는아우라지 나루는 강을 건너는 나루의 구실도 하지만 뗏목의 출발지점이기도 했다. 정선은 산이 높고 깊어 예부터 좋은 재목들의 생산지였다. 예전에는 육상 운송로가 좋지 않아 이 무거운 소나무들을 수로를 통해 운반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우라지 나루는 임계 고양산 등에서 벌채된 통나무들의 집결지였다.

  뗏목은 직경 약 30㎝, 길이 약 32m의 소나무 150여개를 새끼줄로 묶어서 만든다. 뗏목의 길이는 약 36m에 이르며, 폭은 약 3m로, 뗏사공은 보통 2명이 탔다. 뗏목은 큰 물이 난 후 출발하는데, 물살이 험하기로 유명한 동강의 동서 여울이나 황새여울 등의 거친 물살을 넘어야만 했다. 
  서울에 도착한 뗏목들은 아주 비싼 값에 팔려 '떼돈'을 번다는 단어가 생겼을 정도였지만, 그들은 동강의 거센 여울을 잘 넘어가야만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물을 암만 잘 타는 뗏사공일지라도 때로는 거센 여울에서 뗏목이 뒤집히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송점용이란 떼꾼은 물 좋은 때는 3일 만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스스로 가장 자신 있어하던 신동 운치리 여울에서 빠져 죽고 말았다고 전한다.

  그들은 목숨과 맞바꾸며 동강을 지나 유장히 흐르는 남한강물 위에서 애잔한 정선아라리를 부르며 서울에 도착했다. 대개 아우라지 나루를 떠난 떼배는 서울 마포나루까지 물길이 좋으면 5∼7일, 물이 줄어들면 한 달까지 걸렸다.

  뗏사공들이 가장 큰돈을 만졌을 때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축할 때였다고 한다. 이들은 떼를 팔아 '떼돈'을 벌었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몇몇을 제외하곤 거의 빈 털털이였다. 그들은 정선으로 돌아오면서 남한강가의 주막집과 동강의 전산옥 등에서 정선아라리에 취해, 어여쁜 색시와 놀아나다가 돈을 다 털리고, 또 때가 되면 빈손으로 뗏목을 타는 힘겨운 삶을 살았다. 

  아우라지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 1910년대였다. 사랑하는 사이였던, 여량리의 한 처녀와 구절리 너머 유천리에 사는 한 총각이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싸리골에 동백을 따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밤사이에 비가 너무 많이 내리고 물이 불어나 나룻배가 떠내려갔다. 그래서 안타까움으로 서로 바라만 보게 된 두 사람의 심정을, 당시 아우라지 뱃사공이 정선 아라리로 표현했다. 그 뱃사공은 장구를 잘 치는 지 씨 아저씨(일명, 지장구)라는 사람이다. 지장구는 실제 인물이며, 노랫말 속에 나오는, 올 동백 따러 가기로 했던 아가씨가 바로 아우라지 처녀상의 주인공이다.

 

자료화면

 


정선(旌善) 아리랑의 가락이 흐르고

  <정선 아라리> 중 한 구절이다. 정선아리랑은 ‘아라리’라는 이름으로 정선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 충북지역, 경기도 동부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구비전승되어온민요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 상철 임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물결은 출러덩 뱃머리는 울러덩

   그대 당신은 어데로 갈라고 이 배에 올렀나
   앞 남산의 청송아리가 변하이면 변했지

   우리 둘이 들었던 정이야 변할 리 있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앞남산 살구꽃으는 필락 말락 하는데

   우리 둘에 정이야 들락 말락 하네
   이밥에 고기반찬은 맛을 몰라서 못 먹나

   사절 치기 강냉이 밥으는 마음만 편하면 되쟎소
   육칠월 감자 싹도 삼재팔난을 젺는데

   대한 청년 남아도 망고 풍상을 다 자네
   우릿님 말씨는 얼마나 고운지

   뒷동산 몸푸레 회초리 착착 휘네

   (이하 생략)


   정선아리랑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조선시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가 망한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다짐하던 선비들이 송도(松都)에서 은신하다가 그중 일곱 사람이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으로 은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들은 지난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忠節)을 맹세하여 일생 동안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생활을 했다.  그들은 은거 생활을 하면서 입지(立志) 시절을 회상하며 가족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로 표현하였다.
  이것이 풀이되어 알려지면서 구전(口傳)되던 토착 요에 후렴을 달아 불려진 것이 지금의 정선아리랑이다. 이들이 지어 비통(悲痛)한 심정을 담아 부르던 시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소리 가락에 실려 애절함을 더해갔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던 조선 후기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자 명맥을 이어온 정선의 소리에 “아리랑 아리랑...”이라는 음률을 붙여 부르면서 ‘후렴구’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선아라리’ 또는 ‘정선아리랑’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이 민요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사를 꾸밈없이 노래한 것으로 정선 산간마을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 감정이 담겨 있다.

  정선 아라리 중에서도 가사에 얽힌 사연도 매우 다양하다. 지금까지 정선아리랑 가사는 1,500 여수가 채집되었으며, 정선아리랑 창기능 보유자는 3명, 교육보조자 3명, 전수장학생 6명을 지정하여 전수활동에 노력하고 있다.

  아우라지 처녀상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 전망이 확 트인 곳에 아리랑 전수관이 있다. 매주 수요일이면 1층에서 일반인 희망자들이 남녀 한분씩의 전수교육 보조자에게 정선아리랑을 배우며, 틀린 곳이 있으면 전수 기능보유자가 그 자리에서 고쳐주기도 한다.
  아리랑 전수관은 전수실과 자료실이 있으며, 2층에는 정선아리랑 공연장, 영상 시설이 있고 넓은 창밖으로 아우라지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마침 수요일에 방문하여 정선아리랑을 배우는 노랫소리를 듣게 된 것이 행운이었다.  

  애틋한 전설이 어린 아우라지는 넓고 맑은 강물과 조약돌이 깔린 강변, 포근한 주변 산세 등이 한데 어우러져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구미(가금)와 여량 사이의 아우라지를 건너는 나룻배의 낭만도 퍽 인상적이다.  아우라지의 배 운항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 매주 월요일은 뱃사공이 쉬는 날이다. 편도 500원.

  지금은 아우라지 강변에 넓은 터와 주차장을 마련하여 오토캠핑장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특히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로 붐벼 예전의 조용함과 고즈넉함은 느끼기 어렵게 되었지만, 이곳을 찾아 정선지방 서민의 애환과 삶의 정서를 담은 아라리 한 자락을 떠올려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구절리와 레일바이크(Rail Bike) 관광열차 타기

  아우라지에서 송천을 따라 8㎞쯤 거슬러 올라가면 구절리역. 서쪽의 발왕산, 다락산, 옥갑산,  등이 동쪽의 고루포기산, 옥녀봉, 조고봉과 노추산을 잇는 대산맥을 각각 좌우로 끼고 있어 심산유곡에서 흘러나온 계류가 모여 송천을 이루고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물줄기가 마치 구절양장(九折羊腸)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에는 이 지역에 탄광이 많아서 정선 일대의 석탄을 비롯한 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1962년 5월 10일, 정선선이 개통되었으나  최근에는 폐광이 되면서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떠나 승객이 감소하여 구절리~아우라지 구간을 운행하던 기차는 우여곡절 끝에 운행을 중단했다. 지금은 증산 -아우라지 구간만 운행되고 있다.

 

 



  어느 해 가을, 내가 처음 구절리를 방문하였을 때 구절리 역사(驛舍)는 폐쇄된 채 잡풀만 무성했다. 나는 그 잡풀 사이로 얼굴을 내민 구절초를 보며 진한 감상에 젖어본 적이 있다.  


   바람은 텅 빈 플랫폼을 지나

   대합실을 빠져나갈 뿐

   인적 끊긴 길가엔 쓸쓸히

   한 무기기, 바위구절초가

   자색(紫色) 옷 차려입고 나를 반긴다. 

   호젓한 곳으로 유폐되어

   오랜 적조와 적막에 깃들여진
   오, 아리따운 넋들

   얼굴에 왈칵 눈물이 솟아

   흩어진 방울방울

   피눈물 같은 슬픔 

   그리운 사람 모두 떠나고

   공복(空腹)이 가득한 거리 
   날아들던 산새마저 어디론가 자취 감추면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또 어이 할 건가 

   그윽한 여향(餘香) 잊을 수 없어

   허전한 가슴에
   바위구절초 한 아름 안고

   잠을 청했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 졸고 ‘구절리 바위구절초’의 일부

 

 



  한 때 인간의 발길이 부산하던 역 주변과 거리는 적막에 싸여 있어 ‘이렇게 나그네의 심사를 울적하게 만들 수 있구나’ 생각하며 세월이 덧없음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이곳의 명물이 된 레일바이크 관광열차 때문이다. 강원도 정선군이 정선선 폐철로를 활용해 개발한 레일바이크가 운영 10개월 만에 순수 운영수입 10억 원을 돌파하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바로 구절리는 구절리~아우라지 구간(7.2㎞)을 달리는 레일 바이크의 출발지다.

 

  주말마다 예약이 완료되는 등 레일바이크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지난 10개월 동안 지역경제 파급효과만 5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선군은 이처럼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7월부터는 야간 운영을 계획하는 동시에 레일바이크 견인용 객차를 제작하고 있다.

  또 관광객을 위하여 구절리역에 카페‘여치의 꿈’을 열었다. 폐객차를 개조하여 여치 암수 한 쌍이 어우러진 모습을 현상화한 카페다. 폐객차 2량을 2층으로 개조해 1층은 스파게티 전문점, 2층은 카페로 구성하였다.

 

  레일바이크란 탑승객이 페달을 이용하여 철도 레일 위를 시속 15~20㎞의 속도로 운행할 수 있도록 제작한 철로 자전거로써, 남녀노소, 온 가족 누구나 손쉽게 즐길 수 있는 레저스포츠다. 기존 정선역의 종착역인 구절리에서 송천 계곡을 끼고 아우라지역까지 달린다. 정선 아리랑의 비경을 간직한 아우라지와 청정계곡을 철길 따라 물길 따라 달리며 감상하는 맛이 새롭다. 김종기 시인은 <레일바이크 -송천 계곡을 달리며>에서 레일바이크를 달리는 맛을 이렇게 썼다.


   숲을 열어젖히고

   골짜기를 풀어헤치는

   줄, 줄 탱탱한 평행  
   

   페달을 밟을수록

   두 날개가 너울거린다
   오른쪽 날개는

   푸른 벼랑을 살그니 미끄럼 치고 
   왼쪽 날개는

   거친 여울을 가벼이 슬어내린다.

   햇살이 햇살을 튕기고

   바람이 바람을 휘감고
   물결이 물결을 헹구는

   가슴이 가슴을 흔드는

   파랗구나 눈부신 웃음

   치솟는 숨결 빛나는 땀방울
   질주하는 모든 목숨들의 자유가

   아 ~~~ 투명 투철하구나. 


   2인승, 4인승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은 4인승이 좋고, 어르신은 2인승을 타는 것이 편하다. 중간에 레일바이크 휴게실(간이역)에서 잠시 쉰다. 소요시간은 약 40~50분.  요금은 2인승이 15,000원, 4인승은 20,000원이며, 주말이나 공휴일, 성수기에는 예매(www.ktx21.com 1544-7786, 전화 033-563-1066, 8787)하는 것이 좋다. 아우라지역에서 구절리까지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정선군은 2005년 7월 1일 첫 운행을 시작한 레일바이크에 모두 14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리면서 운영수입이 10억 원을 넘어섰다고 30일 밝혔다. 이에 따라 60∼70년대 석탄산업 호황기 때 석탄을 실어 나르면서 정선지역 경제를 이끌었던 정선선 북면 구절리∼아우라지 7.2㎞의 산업철도가 이제는 관광철도로 지역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한편 아우라지역에는 천연기념물인 어름치가 여울살 자갈에 산란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어름치 카페’를 금년(2006년도)에 오픈 예정으로 막바지 단장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정선군 김상섭 관광기획계장은 "정선 레일바이크는 정선지역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감상하면서 철도 레일을 달리는 웰빙관광 상품으로 관광객들에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라고 말했다. 걷기 위험한 철길을 레일바이크로 달리면 마치 기관차 운전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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