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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강릉 오죽헌(烏竹軒), 신사임당의 삶과 예술적 향기

by 혜강(惠江) 2006. 5. 1.

 

강릉 오죽헌(烏竹軒) 


율곡 이이(李珥) 선생이 태어난 곳

-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삶과 예술적 향기 짙게 풍겨 -

 

글·사진  남상학

 

 

 

   오죽헌(烏竹軒)은 강릉시 경포호의 서쪽 들녘 너머 죽헌동(軒洞)에 있는 조선 초기의 별당건축으로, 이곳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시대의 가장 큰 학자로 손꼽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난 집이다. 그러나 오죽헌은 그의 친가가 아니라 외가, 곧 어머니이신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친정집이었다.

  이 집은 본래 1452년에 등제하여 1505년 형조참판을 지낸 사임당의 외할아버지인 최응현(崔應賢)의 집으로 그 후손에게 물려져 오다가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申命和)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1975년 오죽헌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화될 때까지는 이율곡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었다.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는 서울로 시집을 갔으나 친정어머니 최씨가 병이 나자 간호를 위해 강릉에 내려왔다가 계속 친정에 머물게 되어 사임당이 오죽헌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사임당 또한 서울 이원수(李元秀)에게 시집을 갔으나 친정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이곳에서 지내는 때가 많았기 때문에 율곡 선생도 이 집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딸만 다섯을 둔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딸에게 재산을 나누어 줄 때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에게 현재의 오죽헌을 물려주었다.

 

 


    오죽헌이란 이름은 뒤뜰에 줄기가 손가락만하고 색이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자신의 호를 ‘오죽헌(烏竹軒)’이라 지은 데서 비롯되었으며, 경내에는 몽룡실(夢龍室), 문성사(文成祠), 바깥채, 안채, 어제각(御製閣), 율곡기념관과 향토민속관, 역사문화관 등이 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주거 건축으로는 역사가 가장 오래 된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오죽헌은 사임당이 율곡을 낳기 전에 용꿈을 꾸었다는 데서 이름 붙은 몽룡실이 대표가 되는데, 온돌방과 툇마루로 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순한 일(一)자형 집으로, 본 살림채는 아니고 별당 건물이다. 본채는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죽헌 양옆으로 600년 된 배롱나무와 화려한 매화, 줄기 검은 오죽(烏竹)이 무리 지어 있어 볼거리가 된다.

    지붕은 양 측면에 합각을 한 팔작지붕으로 내부는 연등천장이나 합각부분만 우물천장으로 구성했다. 대청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은 벽과 천장을 모두 종이로 발랐다. 커다란 장대석을 한 층으로 쌓아 기단을 만들고 막돌 초석 위에 사각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는 익공으로 처리하였다. 주심포(柱心包) 양식에서 이익공양식(二翼工樣式)으로 변해가는 주택 건축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로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몽룡실몽룡실(夢龍室)에서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났다.

 

 


  
    여기서 잠시 율곡 이이에 대하여 살펴보면,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다. 그가 살던 마을의 이름을 따 호를 '율곡'으로 했으며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어머니 사임당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으나 16세의 나이에 어머니 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어머니의 산소를 지켰으며 이 때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배우기도 했다.

  후에 유학으로 전향하여 당시 유명하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학문을 논의했으며, 성혼(成渾)과도 사귀었다. 그는 "뜻이 서 있지 않고는 원하는 생을 살 수 없고,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가지며 살았다.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고 예조좌랑, 이조좌랑, 청주목사,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다.

  한 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해주로 돌아가 석담(石潭) 옛터에 은병정사(隱屛精舍)라는 이름의 주자사당을 세우고 이황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교화에 힘썼다. 이때에 해주 수양산(首陽山)을 중심으로 한 10수의 연시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저서로는 ‘만언봉사(萬言封事)’ '시무육조(時務六條)’ ‘격몽요결(擊蒙要訣)’ ‘자경문(自警文)’ ‘율곡전서(栗谷全書)’ 등이 있고, 큰 변란에 대비해 군대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 배치해야 한다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이'와  '기'라는 두 개의 축이라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한 퇴계 이황과 달리 '이'와 '기'는 하나로 융합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내세웠으며 이로 인해 조선유학은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이후 영남학파는 남인으로 기호학파는 서인으로 맞섰다. 그는 조선 시대의 위대한 경세가(輕世家)이자 대학자로 학문과 정치에 큰 업적을 남겼다. 1548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파주 자운산에 묻혔다.

  바깥채(舊屋)는 바깥주인이 주로 거처하던 곳으로 안채와 바깥 행랑채 사이에 있다.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율곡 선생의 이종사촌 권처균이 거처했던 곳이다. 오죽헌 오른쪽의 작은 중간문을 지나면 안채 건물이 있다. 안채의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판각해 놓은 것이다. 

 

 



    문성사(文成祠)는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1624년 인조가 율곡선생에게 내린 시호 '문성'(文成)에서 따온 것이며, ‘문성’의 뜻은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 없이 통했으며,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政事)의 근본을 세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율곡 이이 선생 영정은 1975년에 표준영정으로 선정된 것으로, 이당 김은호가 그렸다. 영정은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다. 현판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그밖에 어제각(御製閣)은 정조 임금이 1788년 율곡 선생의 친필『격몽요결(擊蒙要訣)』과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고, 책에는 머릿글을,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학문을 찬양하는 글을 써서 소중히 보관하라는 분부를 내리자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1975년에 대대적인 오죽헌 정화사업이 있었는데, 이 때 율곡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를 비롯해 자경문, 율곡기념관 등이 신축되었다.  

 

 



   또 율곡 기념관은 《율곡전서》를 비롯한 율곡의 저서와 율곡의 간찰이 전시되어 있다. 간찰은 짧은 글이긴 하나 율곡이 그의 신변적인 내용을 직접 쓴 것이어서 율곡의 서정과 생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유품이기도 하다.

  신사임당의 유품으로서는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 〈산수도 山水圖〉, 〈초충도 草蟲圖〉, 〈노안도 蘆雁圖〉, 〈연로도 蓮鷺圖〉, 〈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초충8곡병풍> 등이 있다. 그 중 초충도에서는 사임당의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초충 8곡 병풍>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여덟 폭으로 된 병풍 그림이다. 현재는 열 폭으로 꾸며져 있으며, 양 쪽 가장자리의 나머지 두 면에는 그림이 아닌 '신경'과 '오세창'의 발문(跋文)이 적혀 있다.  

  이 그림은 화면의 중앙에 곡선의 가지가 두 줄기로 좌우 대칭으로 안정적인 구도를 보이며, 줄기에 열려있는 가지의 빛깔도 곱다. 여기에 나비와 벌, 방아개비 그리고 개미 등 곤충의 움직임이 생동감 있게 어우러져 있어 화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각 작품들은 가지, 오이, 수박, 산차조기, 맨드라미, 원추리, 양귀비 등의 식물과 나비, 벌, 매미, 방아깨비, 사마귀, 메뚜기, 쇠똥구리, 잠자리, 하늘소, 개구리, 도마뱀, 들쥐 등과 같은 곤충이나 파충류, 동물들이 아주 단순한 구도로 어우러져 균형과 변화를 꾀하고 있다. 단순한 주제와 간결한 구도, 신사임당 특유의 섬세하고 여성적인 필치와 단정한 채색에 서정 어린 정취가 매우 돋보인다.

  풀과 벌레를 소재로한 그림들 외에도 현재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세의 시인과 학자들은 그녀의 그림을 한결같이 극찬하고 있는데, 그윽하고 정갈하다는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명종 때의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안견의 다음 간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아버지 평산 신씨와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 태어난 다섯 딸 중 둘째였으며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교경전과 문장, 글씨, 그림, 바느질과 자수에 능했다고 한다. 19세의 나이에 덕수 이씨 원수와 혼인하였으며 선과 매창, 번, 이, 우 등 자식 일곱을 두었다.

  사임당의 자녀들 가운데 그의 가르침과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셋째 아들 이이였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렇게 현모로서의 사임당은 아들 이이를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을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훌륭하게 키워냈다.

 

 

 

  조선 중기의 예술가인 그는 모든 여성의 사표(師表)로 덕과 학문, 예능을 고루 갖춘 여류문인이자 화가, 서예가였다. 또한 그는 사대부 부녀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이자 어진 부인으로 우리 겨레의 영원한 어머니이며, 우리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현모양처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의 글 한 편을 소개하면,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이 시는 사임당이 38세 때 강릉 친정으로 어머님을 찾아뵙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오죽헌 쪽을 바라보면서 지은 글입니다.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의 글을 소개하면,

   千里家山萬疊峰(천리가산만첩봉)  산첩첩 내 고향 천리건마는 
   歸心長在夢魂中(귀심장재몽혼중)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寒松亭畔孤輪月(한송정반고륜월)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鏡浦臺前一陣風(경포대전일진풍)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沙上白鷺恒聚散(사상백로항취산)  갈매기는 모래위에 모였다 흩어지고 
   波頭漁艇各選(파두어정각서동)  고깃배는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何時重踏臨瀛路(하시중답임영로)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綵服斑衣膝下縫(채복반의슬하봉)  색동옷 입고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할고

   - 思親(사친) -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쓴 글이다. 이런 작품으로 보아 신사임당에게 어머니의 세계가 그만큼 영향이 크게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조 때부터 그는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이 때 강릉에서 낳았다. 이이를 낳으며 꾸었던 태몽의 일화 또한 예사롭지 않다. 

   사임당이 33세 되던 해 이른 봄 밤, 꿈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다 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였으며, 다시 그 해 12월 26일 새벽에도 검은 용이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 문머리에 머무르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셋째 아들 율곡이었다고 한다. 몽룡실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1551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묻혔다.

  율곡기념관에는 또 조선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때의 묵매 양식을 잘 보여주는 매창(율곡의 누이)의 매화도와 한 송이의 국화가 단정하게 그려진 옥산 이우(율곡의 아우)의 국화도가 전시되어 있으며, 초서에 뛰어났던 이우가 소년기에 쓴 귀거래사가 전시되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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