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선교장(船橋莊)
조선말 대표적인 사대부집 전통한옥
강원 강릉시 운정길 63 (운정동 431)
글·사진 남상학
* 선교장의 건물
강릉에서 벚꽃길을 따라 경포로 향하다 보면 왼편으로 작은 마을이 하나 나타난다. 넓은 대지와 여러 채의 건물로 인해 작은 마을처럼 보이나 실은 개인주택이다. 선교장(船橋莊)이라고 하는 이곳은 조선시대 상류계급이었던 전주(全州) 이씨 일가의 호화주택인데, 그 크기는 개인 주택으로는 강원도에서 가장 넓다고 알려져 있다.
선교장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은 예전 경포호가 지금의 크기보다 훨씬 더 넓었을 때 배를 타고 건넌다고 하여 이곳을 ‘배다리마을’(船橋里)이라고 부른 것이 인연이 되어 ‘선교장(船橋莊)’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금도 넓게 보이는 경포호가 예전의 4분의 1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예전에는 얼마나 크고 넓었는지 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선교장 입구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면 관람객이 10명 정도 되면 해설사가 따라 붙는다. 해설사는 입구에서 선교장의 유래를 설명해 주었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 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에 의해 처음 지어져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나날이 발전되어 증축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모두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으로서 1965년 국가 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개인소유 국가 문화재로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300여년전 안채 주옥을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사당들이 세워졌고, 큰 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대장원을 연상케 한다. 특히 독특한 구조와 아름다운 풍경이 사람들의 눈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활래정이 있어 조선의 수많은 묵객이 이곳에 머물며 시화, 서화를 남겼다고 한다.
가운데로 훤히 뚫린 길 뒤편으로 멀리 가옥들이 즐비하다. 입구를 들어서면 '물레야물레야'의 영화촬영지라는 기념비가 서있고, 우측으로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작은 수중 정원이 앙증맞게 앉아 있는데 푸른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연못에는 지난 해 꽃을 피워 올린 꽃대의 마른 가지가 무수히 솟아 있다. 그 연못의 한 끝으로 우아하게 활래정(活來亭)이라는 정자가 서있다. 이름만으로도 마치 날아갈 듯한 유연함이 묻어나온다.
주자(朱子)의 시‘위유원활수래(爲有源活水來)’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이 활래정은 손님 접대를 위한 다실까지 갖춘 마루와 온돌방이 물위에 떠 있어서 시원한 정자의 멋을 한껏 뽐내고 있다. 연못 속에 네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은 연못에 떠 있는 수중 정자를 연상케 한다. 인공 연못을 파고 이곳에 정자를 지어 연꽃이 핀 연못과 함께 경포 호수의 경관을 바라보며 관동팔경의 멋을 즐긴 조선의 선비와 풍류가 엿보인다.
연꽃이 피어 있는 활래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꽃동산이 된다고 한다. 노을 지는 저녁나절 연분홍 연꽃잎에 녹차를 두었다가 이슬 떨어지는 아침에 연꽃이 봉오리를 피우면 향긋한 연꽃향이 스민 녹차로 차를 마시는 선비들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귀한 손님이 오면 이곳에선 연꽃차를 대접한다고 한다.
활래정의 장지문을 지르면 두 개가 될 수 있는 온돌방이 물 위에 떠 있는 마루와 합쳐져서 "ㄱ" 자형을 이루고 방과 다실을 연결하는 복도 옆에는 손님에게 차를 접대할 때 차를 끓이는 다실이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옛날에는 연못의 한가운데의 작은 섬(정원)에 다리를 놓아 다닐 수 있게 했다고 하니 그 멋스러움은 가히 짐작이 간다.
이 연못을 지나 본채 쪽으로 들어가면 바깥 행랑이 길게 늘어서 있고 행랑채 중간에 솟을 대문이 있는데 이 대문에는 세로로 ‘선교장(船橋莊)’이라고 쓴 작은 현판과 가로로 ‘선교유거(仙橋幽居)’라고 쓴 큰 현판 두개가 걸려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안채, 서쪽으로 사랑채가 있다. 현재 이 집 주인이 살고 있는 안채는 행랑의 동쪽에 있는 평 대문으로 들어가는데, 안채는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분되는데 현재에도 전주이씨의 후손이 선교장을 관리하며 안채에 살고 있다. 안방은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 되는 부인이 거처하며 건넌방은 큰 며느리가 거처하는 방이라고 하며, 상당히 넓은 부엌이 대가족을 거느렸던 살림 규모를 보여 준다.
동별당과 서별당이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서재와 서고로 쓰였다는 서별당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안채의 부엌과 'ㄱ'자형으로 연결되어 이 집 주인이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는 동별당만 남아 있어서 대가족 제도 하에서 부부만의 공간을 별도로 마련했던 다감한 모습을 살피게 한다.
일자형으로 길게 늘어선 행랑채는 20개도 넘는 방과 부엌, 곳간, 마구간으로 이루어 졌는데 현재 각 방은 민속유물을 전시하는 전시방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금의 선교장에는 건물 외에도 옛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여러 생활 자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랑채에는 열화당(悅話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또한 눈길을 끈다. 이내번의 후손으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신조로 삼았던 처사 이후가 순조 15년(1815)에 이 사랑채를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세상의 일은 잊어버리자, 어찌 다시 벼슬을 구하랴, 친척의 정겨운 이야기를 즐기며, 거문고와 책을 벗하여 온갖 시름을 잊어버리자." (世與我而相遺,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시의 구절처럼 형제, 친척들이 모여 즐겁게 담소하는 장소로 썼다고 한다.
돌계단 위에 높직이 올라선 이 열화당은 보기에도 시원하고 처마가 높아서 별도의 차양을 달았는데 녹색을 띄는 차양은 전통양식을 벗어나 있다. 설명인즉 구한말 이곳을 찾은 러시아 공사가 지어 선물했다는 것이다. 호의로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전통 양식의 한옥에는 그리 어울려 보이진 않는다.
선교장의 주변으로는 아름드리 해송의 숲이 우거져 선교장의 격조를 높여주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전통 한옥은 아무래도 소나무와 어우러져야 제멋이 난다.
선교장의 안쪽으로는 한국의 전통 탈과 장승을 깎는 곳이 있다. 자그마한 전통찻집을 겸하고 있는 이곳에서 목기를 깎는 모습과 다양한 모양의 탈을 감상할 수 있다.
선교장을 마주하고 있는 곳에는 방짜유기를 만드는 곳이 있다. 방짜유기는 우리의 옛 선조들이 놋그릇으로 만든 유기제품을 말하는데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망치와 정으로만 두드려 만든다. 그 정성도 대단하거니와 만들어진 놋그릇과 놋수저는 손으로 두들겨 만든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선교장의 전체적인 특징은 옛날의 양반집들과는 달리 일정한 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러우면서도 건물 모두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추운 지방의 건물양식과 따뜻한 지방의 건물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살림집들은 대부분 지역적인 특색이 있는데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지방의 건물과 따뜻하고 넓은 들판에 있는 집들의 모양이 서로 다르다. 하지만 선교장은 이 두 가지의 특색이 하나로 혼합되어 사랑채의 높은 마루와 넓은 마당은 시원한 느낌을 주고 안채의 낮은 마루는 아늑한 느낌을 준다.
새로 지은 민속자료전시관은 고가(古家)와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건물이어서 조화스럽지 못한 느낌이 있다. 그 주변의 새로 지은 음식점, 민속품 판매점과 함께 고색창연해야 할 선교장의 풍경을 훼손시키는 듯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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