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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오봉산 자락 소양강 품에 안긴 청평사(淸平寺)

by 혜강(惠江) 2007. 1. 19.

 

청평사

오봉산 자락 소양강 품에 안긴 청평사

당나라의 평양공주와 그를 사랑한 상사뱀의 전설로 유명 

· 사진 남상학

 

 

 

 

 

  호반의 도시 춘천. 언제 가 보아도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찾아가 볼만한 곳이 청평사라고들 한다.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우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저수량을 자랑하는 소양강댐이 여행의 출발지가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소양강이라는 이름이 주는 전원적인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청평사 여행은 소양강과 함께 한다. 청평사는 소양강의 아늑한 품에 안겨 있다. 중북부 내륙에서 최고의 경관으로 일컬어지는 오봉산이 소양감 댐에 한쪽 자락을 담그고 있는 바로 그곳이다. 오봉산(779m)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소양강댐이 생기면서 부터다. 옛날에는 경운산이라 불리다가 다시 청평산이라 불리었는데, 소양강댐이 생기면서 댐 쪽에서 보이는 봉우리가 다섯이어서 오봉산이라 불리고 있다. 

 

   청평사로 가는 길은 두 갈래. 소양강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길과 춘천에서 양구로 가다가 배후령에서 내려와  오봉산을 넘어 오는 길. 또는 좀 더 가서 오음리에서 부용계곡을 따라난 고개를 넘는 길이다. 오음리에서 청평사입구의 야영지까지는 아스팔트 차로가 나 있다. 이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또 가장 가볼만한 코스가 소양강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여정이다. 이 경우 댐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셔틀버스로 댐 위로 올라가서 선착장에서 배를 탄다.(주차요금 4,000원) 

 

 

 

   소양강에서 배를 타면 10분정도 지나 청평사 나루에 닿는다. 이제는 상업단지가 되어버린 사하촌(寺下村)인 청평리를 지나 왼쪽으로 시원스런 계곡에 걸쳐있는 청평교를 지나 오른다.

 

 

 

   조금 오르다 보면 가장 먼저 한 여성상 조각을 마나게 된다. 그 여성상은 당나라의 평양공주와 그를 사랑한 상사뱀의 전설을 알려주는 공주상(公主像)이다.  청평사에 얽힌 슬픈 설은 내력은 이렇다. 당나라 평양공주에게 사랑하는 청년이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당태종의 노여움을 사 그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죽어서도 공주를 잊지 못한 청년은 상사뱀이 되었고, 평양공주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그 탓에 공주는 점점 야위어 갔으나 달리 해결방법이 없었다. 공주는 중국의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드렸으나 허사였다. 


   이때 신라에서 온 구법승의 말들 듣고 공주는 이곳 청평사까지 오게 된다. 공주와 시녀는 청평사 아래에서 여장을 풀고 상사뱀에게 "내가 절에 가서 밥을 얻어 올 터인즉 몸에서 잠시 내려올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상사뱀은 슬며시 몸을 풀고 내려오더란다. 절에서는 마침 가사불사 법회 중이어서 공주는 목욕재계하고 가사를 꿰맨 다음 법당에 들어가 염불을 하고 있었다.   공주를 기다리던 상사뱀은 기다림에 지쳐 마침내 공주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갑자기 물이 불어나 막 절문으로 들어서려던 뱀을 쓸어 가버렸다. 뱀은 물에 쓸려 내려오다 구성폭포에 와서야 물속에 비친 평양공주를 진짜로 착각해 물속으로 들어갔다.


   법회를 마치고 돌아온 공주는 폭포에 죽어 있는 뱀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시원하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했다. 공주는 뱀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묻어주고 본국의 아버지께 이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 당태종은 재상 춘축랑에게 금덩어리 3개를 보내 법당을 세우게 했다. 공주는 또 이곳 구성폭포 위에 삼층석탑을 세우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얼마간 머물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때부터 이 탑을 공주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전설로 인하여 청평사에는 전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공주상 바로 위에는 길옆에 거북바위가 우리를 맞이한다. 큰 바위 두 개가 겹쳐 있는 모습인데 암수 두 마리의 거북처럼 보인다. 

 

 

 

   이어 구성폭포(九聲瀑布)를 만난다. 높이 7m에 이르는 구성폭포는 벼랑에 단아한 모습으로 걸려있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상사뱀에 얽힌 전설로 발길을 멈추게 한다. 평양공주를 사랑하다 죽임을 당한 청년이 뱀이 되어 평양공주의 몸에 붙어 다니다가 이곳 구성폭포에 와서야 물속에 비친 평양공주를 진짜로 착각해 물속으로 들어갔다는 바로 그곳이다. 

 

   아홉 가지의 청아한 소리를 낸다는 구성폭포는 규모는 그리 큰 편이 아니어도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폭포의 모양은 퍽이나 아름답고 위용이 있다. 청평사로 오르는 길가에 바로 있어 잠시 폭포 아래로 내려가 쉬기에도 좋다.

 

 

 

  구성폭포 위에서 계곡을 건너 산비탈을 잠시 오르면 일명 공주탑이라 불리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널찍한 바위 위에 서 있다. 이 탑은 청평사 초입 오른쪽 능선에 서 있는데 전망이 빼어나다. 굽이굽이 계곡을 빠져나가 봉긋봉긋 둘러선 아득한 산봉들을 마주하고 있다.

 

  탑은 본래 그 자리에 있던 화강암이 바위를 지대로 삼고 중층의 기단을 마련, 그 위로 탑신의 몸돌을 올렸으나 3층 몸돌 은 제짝을 잃고 최근에 다듬은 돌로 올렸다. 아래층 탑신에 비해 2층 탑신이 급격히 줄어들어 체 감률이 어색하다. 4단으로 된 지붕돌 받침은 비교적 날렵한 느낌을 주어 고려시대 초기의 탑 양식을 보이고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55호이다.


 

 

  구성폭포에서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에 오래된 누각이 있고, 연이어 각산당(覺山堂) 석진대사(石眞大和尙)의 사리탑과 비(碑), 그 옆으로 청평사를 가장 아름답게 꽃 피웠던 조선 성종 때의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의 부도(浮屠)가 눈에 띈다. 이자현은 청평사를 가꾼 사람이어서 고승들에게만 주어지는 부도탑을 범인이었던 그에게도 주어진 것 같다. 

 

 

 
  부도탑을 지나면 길옆 오른쪽으로 작은 연못이 있다. 오봉산(779m)이 비치는 영지는 청평사를 찾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귀한 역사적 선물. 조사 결과 ‘원형대로 보존돼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연못’으로 밝혀진 이 영지를 만든 이는 고려 때 학자인 이자현. 겉보기엔 별반 특별한 것도 빼어난 것도 없지만 실상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고려시대의 인공연못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사각형 모양이 되도록 사다리꼴로 석축을 쌓고 가운데는 바위 세 개를 놓아 작은 섬을 만들었으며, 계곡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연못에 오봉산이 비치도록 했다. 이 정원이 오늘날 고려 정원의 기초이자 모범이며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전해져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수원 정원'(文殊院 庭園)이다. 오봉산의 봉우리를 품에 담고 있어 영지(影池)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연못을 지나면 높게 솟은 기암괴봉 아래로 소박한 느낌의 크지 않은 청평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단을 오르기 전 왼쪽으로 수령 250년 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돌계단을 오르면 우측에 키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일주문인 양 서있다. 

 

 


   이를 지나면 바로 청평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전문(廻轉門, 보물 164호)이다. 청평사의 회전문은 절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려는 의미의 문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앞면의 가운데 1칸은 넓게 드나드는 통로이고 양쪽 2칸은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건물 안쪽은 벽이 둘러진 공간에 사천왕상 등의 입상을 놓을 수 있게 했으며, 윗부분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만든 홍살을 설치하였다. 

 

 


    평양공주가 구성폭포로 들어간 뱀을 피해 청평사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 뱀이 다시 공주를 찾아왔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져 뱀을 되돌아 나가게 했다는 바로 그곳이다. 회전문이란 ‘회전하는 문’이란 뜻이 아니라 뱀이 되돌아 나갔다는 데서 그 이름이 연유한다. 회전문 옆쪽에는 범종각이 있다. 

 

   회전문을 지나면 넓은 회랑이 있고, 회전문에서 다시 일직선으로 계단을 오르면 그 안으로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왼쪽엔 관음전, 오른쪽엔 나한전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대웅전 왼쪽 위로 극락보전이 있는데 극락보전 옆에는 수령 800년이 된 주목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중창기(重創記)에 의하면 이 절은 973년(광종 24) 영현(永賢)이 창건하고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 하였으나,  1068년(문종 2) 이의(李顗)가 중건,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다. 이의의 아들 자현(資玄)이 관직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없어졌다고 하여 산 이름을 청평이라 하고 사찰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으로 하고 중창하였다.

 

  그는 전각 여러 채를 짓고 견성(見性).양신(養神) 등 여덟 암자를 새로 세웠으며, 청평산 골짜기 전체를 사찰 경내로 삼아 정원으로 가꾸었다. 1550년(명종 5) 보우(普雨)가 청평사로 개칭하고 절을 넓혀 번창시켰다. 

 

   그 후 6 ·25전쟁으로 구광전(九光殿)과 사성전(四聖殿) 등은 소실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전각들을 짓고 회전문을 보수하고 범종각과 요사채를 새로 지었다. 지금은 그 규모가 작지만, 본래는 221칸의 절방이 있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정원만도 3km에 달했다고 전한다. 현재 보물 제164호인 청평사 회전문과 극락보전 등이 있다. 

 

 

 

  절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76살이 되었다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나이에 비해 건강한 할머니는 청평리에서 '할매집'을 운영하며 이곳에서 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청평사 내력에서 절에 얽힌 전설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설명해 나갔다. ‘점심을 먹었냐’고 하기에 아직 못 먹었다고 했더니, ‘그런 줄 알았으면 절밥을 드릴 걸’하고 아쉬워하며 자기집 식당은 좀 멀다며 제일 맛있는 집이라며 청평교 옆 ‘오봉산장’(033-244-6606, 6607)을 안내해 주었다. 

 

 

 

   시장했던 탓인지 식당 아주머니가 추천해준 ‘더덕백반’은 더덕구이뿐만 아니라 산나물이며 반찬의 맛이 모두 일품이었다. 포만감을 지닌 채 따스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우린 청평사 선착장에서 소양호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다.(관리사무소 033-241-9251)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1급수 청정성을 자랑하는 소양강 댐 물이 전과 다르게 흙탕물로 변해 있는 것이 궁금했다. 최근 큰물이 진 적도 없지 않은가. 선장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댐의 담수 중간층(110~135m)에 고여 있던 흙탕물이 최근 기온이 떨어지면서 낮아진 수면 온도와 결합되는 소위 '전도현상(Turn-over)'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지난 해(2006년) 7월 인제 지역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소양강댐에는 19억t의 흙탕물이 상류에서 유입되어 이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고, 이런 전도현상은 평년 같으면 보통 11월 말부터 시작하여 2월쯤 절정을 이루다가 사라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런 현상이 자연현상이며 또 자연재해로 인하여 심화되었다 하더라도 이쯤 되면 관계당국은 흙탕물 저감대책을 새워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청정수로 손꼽히던 소양강 댐이 이 지경이라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깨끗한 경관을 기대하고 왔던 관광길이 흙탕물로 기분을 잡치는 것은 고사하고, 이 물은 우리 국민의 소중한 식수원이 아닌가 말이다. 

 

 

<여행정보>

* 도선시간 : 청평사행 배는 오전 10시부터 매시간 정각 출발, 소양호행은 매 시간 30분에  출발 
* 이용요금 
  수로이용객은 어른이 6,300원(도선료 4,000 + 관광지입장료 1,000 + 문화재관람료 1,300)  청소년은 5,500원, 어린이는 3,000원. 육로이용객은 여기서 도선료를 빼면 된다. 관광지 내
주차료는 승용차 기준 2,000원.
* 도로안내 
 (1) 서울>46번국도>청평>가평>강촌>새 우회도로인 의암대교>의암터널>팔미리 I.C>우회전>
 계속 직진>동면 감정리 삼거리 오음리 방면>좌회전>200m>우회전>소양댐 밑 세월교>우회전>1km>소양댐 입구 주차장>선박이용 
 (2) 서울>춘천>오음리 방면>46번국도>오음리>청평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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