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중단역 신탄리
경원선 타고 철도 중단역 '신탄리' 까지
- 철마(鐵馬)는 달리고 싶다 -
글·사진 남상학
수락산 아랫동네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도봉산의 모습은 오늘따라 의젓하게 보인다. 역사 깊은 수도 서울의 북방에 든든한 자세로 우뚝 서서 민족의 정기를 일깨우는 듯. 전시작전권 회수 문제로 나라 전체가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싸여 있는 지금 나라의 안위(安危)가 더욱 걱정이 된다.
평생을 군에서 조국 수호를 위해 헌신한 역대 군(軍) 장수들, 국방장관들이 작전권 회수는 시기상조라고 논의 자체를 유보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정부는 진보세력을 등에 업고 '자주'를 앞세워 강행하려는 기세다. 과연 우리가 미국의 도움 없이 자주적으로 국방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아니면 안전 보장을 담보할 수 있을 만큼 북한 집단을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혼란 속에서도 북한산은 아무 말없이 의연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서 응시할 뿐이다.
경원선 기차에 몸을 싣고
수락산 역 근처에서 친구와의 이른 약속을 마치고 나오자 기차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전철을 타고 의정부역으로 이동하여 경원선 열차를 바꿔 탔다. 역 구내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빼들고 갈아탄 통일호 열차는 깨끗하고 쾌적하여 한가하게 여행을 즐기기에는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의정부역을 출발한 기차가 주내, 덕정, 동두천, 동안역을 지나는 동안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들은 옛 시골의 정취 물씬 풍기는 우리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한쪽에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마구 파헤쳐진 모습도 보였다. 기차는 뜨거운 태양 속에 더욱 가물거리는 철로를 따라 전진한다. 이대러 끝까지 가면, 그 끝은 우리의 산하 어디쯤일까?
국민관광지 소요산을 지나
동안역을 지나자마자 간이역인 소요산역에 차가 잠시 멈췄선다. 내리는 손님들의 차림으로 보아 대부분 소요산을 찾는 등산객처럼 보였다. 국민관광지로 사랑을 받고 있는 소요산이 오른쪽으로 올려다 보인다. 산은 언제나 말이 없고 경건하고 엄숙한 느낌이다.
소요산(587m)은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도 수목이 우거지고, 폭포와 산봉우리가 연이어 있어 서 수도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장관을 이루고,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진 계곡과 폭포가 아름답다. 그리고 가을 단풍 또한 유별나서 소요산을 두고 예부터 '경기의 소금강'이라 일컬어 왔다.
또 천년을 넘게 이어온 사찰과 수많은 유적, 명승지가 함께 자리잡고 있으며, 이 곳에 들어와 수도했다는 원효대사에 얽힌 이야기와 그 자취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또 기기묘묘한 암봉과 바위 능선 사이로 골짜기는 협곡을 이루고 있다.
산 중턱의 자재암을 비롯하여, 원효 폭포, 옥류 폭포, 청량 폭포, 선녀탕 같은 폭포와 바위절벽 등이 어울려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준다. 그래서 한가롭게 노닐며, 바람 쐬기 좋은 산이란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 '소요(逍搖)'인 듯싶다. 물이 맑고 계곡이 깊어서 언제 가도 좋은 산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처음 찾았던 당시의 소요산은 한창 물이 올라 싱싱한 모습이었는데, 세월이 훨씬 지나 찾아온 오늘은 삼림이 더욱 우거져 심오한 맛을 풍겨준다. 아마도 나이 들어 찾은 때문인 것 같다.
분단의 상처 안고 흐르는 한탄강
기차는 북으로 달려 초성리를 지나 한탄강을 건넌다. 대지가 온통 푸른 빛인데, 여기에 어울려 한탄강만은 더욱 푸른빛을 띠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탄강은 여느 강과는 사뭇 다르다.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휴전선을 넘어 1백 63㎞의 좁고 긴 골짜기를 따라 철원 지방을 지나고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에 이르러 임진강으로 몸을 들이미는 강이다.
'추가령 구조곡'의 용암지대를 관통하는 관계로 화산 활동에 의한 지각 변동과 침식 작용으로 수직의 절벽을 이룬 곳이 많다. 직탕 폭포, 고석정, 순담 계곡을 거치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한국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인데, 세월의 변화에 따라 1990년대 초반부터 래프팅(급류타기) 명소로 변신했다.
그러나 쉽게 볼 수 있는 군부대와 탱크 저지용 방어선이 분단의 깊은 상처와 함께 지금도 긴장을 풀 수 없는 특수한 지역임을 실감나게 한다. 1960년대 초 서울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시절 나는 군복을 입은 채 상관의 심부름으로 이곳에 위치한 7전차대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군부대 조직 변경으로 부대 이름은 바뀌었으나 막사는 그대로 남아 있어 옛날의 그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기차는 전곡을 지나 연천 못 미쳐 통현리를 지나고 있었다. 이 곳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가면 재인(才人)폭포가 있다. 이 폭포에는 미인 아내를 둔 줄타기 재인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옛날에 아름다운 부인을 가진 줄을타는 재인이 있었다. 재인의 아내를 탐낸 이고을 원님이 잔치를 베풀고 폭포에 줄을 매달아 재인에게 이를 건너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줄을 아슬아슬하게 중간쯤 건너간 재인은 원님이 줄을 끊는 바람에 떨어져 그만 목숨을잃고 만다. 재인의 아내는 남편의 복수를 하기 위해 원님의 시중을 드는척 하다가 코를 깨물고 수절을 했다. 그래서 이 고을은 '코문리'로 불려졌는 데 지금은 '고문리'로, 또 이 폭포는 재인폭포로 불리워지고 있다.
길이가 약 18㎞로서 풍경이 아름답고, 특히 가을철 단풍은 절경을 이룬다. 이 폭포수는 임진강 지류에 들어가 한탄강에 합류되는데, 맑은 물줄기와 깊은 소(沼), 물결 무늬의 검은 석벽으로 신비하고 기이한 경관을 자랑한다.
새하얀 실타래가 절벽에 내걸렸다
천애 가닥 풀어내어 웅웅소리 실려 오고
시공의 날줄 한 올씩 꿰어가는 저 물줄기
- 진용빈의 '재인폭포'
20여 년 전 이 곳을 방문했던 기억을 더듬는 동안 기차는 어느 덧 연천, 대광리를 지나 경원선 기차의 종착역 신탄리에 도착했다. 북쪽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전쟁의 참화를 겪어오던 지역이 아직도 불안한 상태로 평화가 유지되는 탓인지 개발이 안 되어 큰 발전이 없고 역사가 멈춰선 듯 하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옛 시골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경원선 철도는 신탄리에서 멈춰서고
신탄리 역. 휴전선에서 불과 9.5㎞, 북위 38도 13분. 철길은 있되 기차는 더 이상 북으로 달리지 못한다. 아직 가야할 길은 멀고, 기적 소리도 힘차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철길의 흔적은 월정역을 지나 북녘의 안변역을 거쳐 원산역까지 이어져 있어도 기차는 여기서 남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북에 가족과 생활터전을 남겨두고 넘어온 실향민들이 이곳을 자주 찾아오긴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없는 아픔을 안고 돌아서야 하는 곳이다. 더 달리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고 플랫폼에 내려 역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글귀 아래 인근 지역을 안내하는 간판이 앞을 가로막는다. 역사 안에는 실향민의 마음을 달래는 듯 시 한편이 걸려 있다.
돌아서야 할 운명의/ 변방마을 삼거리에 바람이 분다//
고대산 정상에 눈발 성성이고/ 죽은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검은 새 한 마리 날아가 버렸다//
낙엽 구르고 억새 서걱이는/ 레일 없는 철길//
아물지 못하는 전쟁의 탄흔들이/ 아픈 역사를 노래한다//
북으로 더 못가고/ 그렁거리던 통일호 열차가/ 잡목숲 산을 돌아 남으로 간다//
고향의/ 강 하나 산 하나 사람 하나 품고/ 살아온 사람들//
이산의 아픔으로/ 실향의 그리움으로/ 시인의 가슴으로/
다음 역 이정표 없는 철도 중단역에서/ 머뭇거린다//
아~ 지금은/ 북천을 가리웠던 구름이 바람에 밀려/ 북녘 산하가 햇살에 비추인다
- 이돈희 시 '신탄리’에서
서울에서 철원, 안변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경원선은 1914년 개통되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북한에 속했다가 1951년 서울 수복 때 탈환했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주민을 제외하고는 옛 기억에 남아 있는 철길에서 먼 발치에서나마 고향의 모습을 상상하기 위해 찾아오는 실향민들이 대부분이다. 그 외에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고대산(832m)을 오르기 위해, 혹은 연인들이 호젓한 기차 여행의 추억을 위해 이곳 신탄리에 내린다.
성큼 다가온 북녘땅이 한눈에
신탄리 역 뒤쪽에 있는 해발 832m의 고대산은 금학산(947.3m), 지장봉(877.2m), 북대산, 향로봉, 종자산 등 이름난 산들이 있고, 그 산줄기 북쪽은 철원읍의 넓은 평야지대가 자리잡고 있어서 이 지역은 사실상 휴전선 남쪽의 전략적 요충지임이 분명하다. 고대산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철원평야와 백마고지를 볼 수 있다.
백마고지 전투, 아 얼마나 빛나는 전투였던가. 6·25전쟁 당시 보병 제9사단이 철원평야 북서쪽에 있는 395고지에서 중국군과 벌인 이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 계속되었던 것이다.
당시 395고지는 전술적 중요성 때문에 치열한 쟁탈전의 대상이 되었고, 심한 포격으로 고지의 모습이 백마(白馬)와 같다 하여 백마고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고지가 철원을 방어하고 주요 도로를 확보하는 데 유리한 위치에 있어서 한국군과 중국군은 12번이나 빼앗고 빼앗기는 혈전을 벌였다. 중국군은 제38군 소속의 제112~114사단을 투입한 결과 사망 8234명, 포로 5097명, 귀순 57명의 희생을 내면서 물러났다. 반면 한국군 제9사단은 3428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고지를 지켜냈다. 아까운 생명이 희생된 지역이다.
이 승리는 우세한 포병화력과 공군의 항공 근접지원, 예비대의 적절한 운용 외에도 백마부대 장병들의 감투정신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고대산에 서면 백마고지 너머 북한 땅이다. 언젠가는 가야할 북녘 땅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대산을 찾고 있는 것은 험한 산이 아니어서 가족 단위의 등산에 알맞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북쪽과 근접하여 대치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기도 하다.
실향민의 아픔을 달래는 곳
역사를 빠져 나오니, 이 곳 주민이 아닌 탐방객들이 꽤 여럿 눈에 띄었다. 안보가 걱정이 되어 방문한 사람이거나 그리움에 못 이겨 찾아온 실향민일 것이다. 종전엔 신탄리역의 탐방객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갑자기 붐비기 시작했다고 역사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주머니가 귀띔해 주었다.
한번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의 화해분위기로 돌아선 남북관계의 영향으로 철도 중단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을 복구한다고 떠들썩한 때였고, 또 요즘에 들어서는 안보에 대한 염려로 최전방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통일에 대한 염원과 통일 후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는 있다. 따라서 민족공조에 대한 매력을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으로 남쪽에서 아무리 양보하고 화해무드를 조성하려고 애를 쓴다 해도 그들을 신뢰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안보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며, 다시는 전쟁이 이 땅에서 재발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하다. 그래서 이곳 신탄리는 적막하다. 따라서 신탄리는 여전히 경원선의 조용한 간이역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주머니의 소개를 받아 실향민들이 저주 들른다는 식당을 찾았다. 역사에서 50m 거리의 '경춘막국수집'. 실향민들이 기차를 타고 와서 동동주 한 사발과 막국수로 배를 채우고 실향의 아픔을 달래는 곳이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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