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호국불교의 도량, 강화 전등사(傳燈寺)를 찾아서

by 혜강(惠江) 2006. 11. 25.

 

국불교의 도량 

강화 전등사(傳燈寺)를 찾아서

글·사진 남상학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은덕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의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등사 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은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성은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부우·부소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토성 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은 성 안팎을 할석으로 겹축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를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전등사를 감싸고 있는 정족산성 안에 궁궐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때는 고려 왕궁의 원찰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마니산에서 남쪽으로 자락을 이어온 정족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자리에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그런데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보여진다. 풍수가들 은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라고 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 왕씨가 송나라에서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여 이곳에 보관했으며, 이와 함께 불전에 옥으로 된 등잔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사찰의 이름을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는 것이 가장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현재의 가람은 고려 충렬왕 때를 기원으로 보는 경향이 높다.

  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火魔)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또한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또한 전등사는 조선 말기에 접어들어서도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전등사는 남문과 동문이 있다. 이 두개의 문은 모두가 사찰의 일주문과는 거리가 먼 산성의 대문이다.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들어가나 울창한 숲길을 조금만 올라오면 전통찻집인 죽림다원(다래헌) 앞에 닿는다.

 

  죽림다원 앞으로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전등사에서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건물이 대조루인 셈이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를 지나면 바로 정면에 대웅보전이 1미터 정도 높이로 다진 터 위에 올라앉아 있고, 동쪽으로는 요사채 서쪽으로는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 극락암, 적묵당, 종각이 나란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서북쪽 정족산 중턱에 삼성각이 있고 그 아래 장사각과 선원보각 터가 있다. 
  

  전등사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곳이 바로 대웅보전이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졌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건물에 겹처마 팔작지붕과 배흘림 기둥을 갖고 있는데, 지붕의 곡선이 심한 것이 특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절을 짓는 도편수가 정을 주던 아랫마을 주모가 그가 맡긴 돈을 챙겨 달아나자,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얼핏 보면 원숭이 같기도 하여 전설을 모르고 가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또한 네 곳 중 다른 세 곳은 나부가 두 손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반해, 정면 왼쪽의 나부상만은 한손을 내리고 있다. 마치 벌을 받다가 잠시 딴청을 피우는 모습이어서 나부상을 만든 목수의 재치와 익살을 느끼게 한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목조로 된 석가여래 삼존(본존, 아미타, 약사여래)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보물 제179호로 지정된 약사전은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에는 향로전이 있다. 향로전은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은 상임법사실로 쓰고 있다.

 

  약사전 옆의 서남쪽에 세워진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명부전에서 위로 오르면 삼성각인데 삼성각에 오르면 서해바다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등사 대웅전 뒤쪽에 있는 삼성각에서 서쪽으로 5분만 걸어가면 정족산 사고인 장사각과 선원각이 있다. 정족산 사고는 1678년(조선 숙종4년)부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장소이다.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 전투의 승리는 단순히 프랑스군을 강화도에서 몰아냈다는 것보다는 정족산 사고에 보관되어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대웅전 앞마당의 오른쪽에는 400년이 된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옆에 큰 바위를 방패삼아 종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범종은 중국 북송의 철종 소성(紹聖) 4년(1097, 고려 숙종 2년)에 회주(懷州) 수무 현백암산 숭명사에서 주조된 철제종이라 전해진다. 중국의 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보물 제3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종은 본래부터 전등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일제가 세계 제2차대전시 약탈하여 부평(富平) 병기창에 놓아두었던 것을 광복 후 독실한 불교신자에 의해 다시 전등사에 보관되어 현재에 이른 종이다. 

 

  이 종의 형태는 정상에 쌍룡(雙龍)을 갖추고 용두 주변에는 16개의 연꽃잎을 돌렸으며, 종의 몸체에는 위쪽에 8잎을 돌리고, 그 밑으로 여러 개의 옆띠로 위아래를 구분한 다음 종선(縱線)으로 위아래 각 8개의 네모 구획을 마련하였다. 이 네모 구획과 구획 사이의 길쭉한 공간에는 명문(銘文)을 양각하였다. 이곳에 있는 종은 실제로 타종을 하지 않는다. 대신 이 대조루 오른쪽에 또 하나의 종루가 있다.

 

  범종을 모신 종각을 내려서면 적묵당, 적묵당은 스님들이 참선하던 선원이었다. 지금은 스님들의 숙소로 쓰이며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죽림다원은 본래 전등사에 구성되었던 승병의 초소가 있던 자리였다. 이곳 승병들은 죽림다원에 본진을 두고 전등사 및 삼랑성 일대를 지켰다. 지금은 관람객들의 휴식처 겸 다원(茶園)으로 운영된다. 전통찻집인 죽림다원 앞에는 학 조각이 여러 마리 걸려 있어 주변 경치와 잘 어울린다.

  또한 죽림다원 앞에서 남문 쪽 방향으로 키 큰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정작 은행 알은 한 톨도 열리지 않는다는 전설의 나무다. 옛날 관음보살이 현신해서 전등사를 관의 핍박으로부터 구했다는 것이다. 

 

 은행나무 옆에는 회전식 윤장대(輪藏臺)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 전경신앙(轉經信仰)이 남긴 유일무이한 유물인데 윤장대는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다. 전경신앙은 경을 경통(經筒)이나 윤장에 넣고 돌리는 행위로부터 성립된다. 경륜(經輪)을 돌리면 세세생생 쌓은 죄와 업장이나, 마귀의 장애, 몸과 마음의 병, 기근, 원한 등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현세에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고, 형통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신통력이 있다는 말에 어른이나 아이나 장대를 잡고 열심히 돌리고 있는데 타종교를 두고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글쎄 .... 어찌 보면 탐방객들마저 장난삼아 돌리는 놀이감 정도로 대하는 것 같다.  

 

  또 죽림다원에서 동문에 이르기 전에 양헌수승전비가 있는데 인천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헌수승전비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873년(고종 10)에 건립된 것이다. 이때는 아직 양헌수 장군이 살아있을 때였지만 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외침을 물리친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양헌수 장군은 1838년(헌종 4)에 무과에 급제한 이래,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중군을 거쳐 어영대장·금위대장·형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장공이며 저서로는 <하거집(荷居集)>이 있다.

 

 

 

 

◆여행정보

 

* 맛집 : 전등사를 둘러보고 식사를 하려거든 초지대교 쪽 해안으로 나오면 강화도 초지대교 주변에서 횟집들을 만날 수 있다. 우선 초지진 근처 대선정(시래기밥,  032-937-1907 ), 초지대교 초입 오른쪽에 황산도횟집( 03...) 을 찾거나 선착장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황산도로 가면 된다. 여기는 배를 가진 어부들이 운영하는 간이횟집들이 즐비하다. 내 단골이며 인심 후한 집 수복호( 032-937-5259 ).


* 주변여행지간거리 : 함허동천(5분), 동막해수욕장(10분), 초지진(7분), 마니산(30분)


* 가는 길 : 자가용이라면 올림픽대로를 따라 김포공항 방면으로 달리다 강화로 진입하는 48번 국도를 따라가면 된다. 버스를 타고 우선  신촌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강화버스터미널까지(05:40~22:00, 10분 간격, 1시간 10분 정도 소요)간다.  여기서 전등사(온수리터미널)까지 가는 버스는  새벽 6:40부터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