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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행주산성에 서면 항전(抗戰)의 외침 들리는 듯

by 혜강(惠江) 2006. 11. 1.

 

고양  행주산성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장군의 승전지

- 행주산성에 서면 항전(抗戰)의 외침 들리는 듯 - 

 

 

·사진 남상학 

  

 


   행주산성(幸州山城)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에 있는 산성으로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124.8m의 덕양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해발 70~100m의 능선을 따라 부분적인 토축을 했는데, 그 길이는 약 1km에 이른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다. 1992년에 토성의 412m를 복원했다. 

 

 



  성의 남쪽은 한강이 인접해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가 조성되어 있다.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급경사로 요새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산성의 정상에서는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땅이었으며, 서해안과 연결된 수로의 거점지역으로 남북 교통의 요충지대다. 

  1990년 12월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생토암반을 정리하여 성 내부 쪽에 2단의 석렬(石列)을 쌓고 성 바깥쪽에는 기둥을 세워 그 사이에 5~10m 두께의 점토와 산흙을 겹겹이 다져 쌓는 판축법(版築法)에 의하여 성이 축조되었다.  시굴·조사의 대상인 대첩비휴게소에서 충장사(忠莊祠)에 이르는 구간의 밑바닥 부분의 너비는 6.26m, 높이 2.8m, 성벽 정상부의 너비는 2.3m가량 된다. 건물지의 존재를 시사하는 초석과 문터도 확인되었다.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토기편과 기와편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또 물고기뼈 무늬를 새긴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서 고려시대까지도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유물을 통하여 볼 때 성곽의 축조 시기는 7~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은 한강 유역에 있는 다른 산성들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중요한 방어요새의 역할을 한 곳으로, 덕양산 정상에 지어진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과 승병을 포함한 2천3백명으로, 왜군 3만 여명을 크게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곳이다.


  권율 장군은 중종 32년(1537년) 당시 영의정 권철의 아들로 태어나 46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에 의주 목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특별 천거로 광주 목사를 맡으면서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선조 25년(16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로 있던 권율 장군은 이 터에서 3만 왜군을 막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수원 독산성에 포진하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총 지휘관이 되어 선조 26년(1593) 2월 11일 승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을 포함 한 장병 만 여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진주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우리나라의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재주머니 던지기'라는 전법이 쓰였다. 아낙네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고는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싸움을 거들었는데,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권율 장군은 뛰어난 명장으로 이름을 남기고, 선조 32년(1599년)에 세상을 떠났다. 

  노란 은행잎이 눈부신 행주산성의 정문격인 대첩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우측 언덕 위로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 장군의 동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동상 뒤로 둥글게 처진 병풍석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맞서 하나가 되어 싸웠던 의병이라든가 관군 등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그 옆길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권율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충장사가 있는데, 이 충장사는 1842년 행주나루터에 창건하고 권율장군의 영령을 모셨던 기공사가 6.25때 소실되면서 1969에서 1970년 정부의 행주산성 정화사업 추진시 건립되었다. 행주산성의 입구인 대첩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충장사의 현판은 한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이다. 권율 장군의 영정 앞에 서면 옷깃이 절로 여며진다. 이 충장사 외각에 중건비가 있는데 이 중건비는 1845년 기공사에 세운 것을 이전한 것이고 1963년 경기도 재건운동 본부에서 세운 비가 자리잡고 있다. 

   충장사를 나와 걷다보면 1980년에 건립한 대첩기념관이 있는데, 원래 이 자리에 군무기고와 군량창고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곳에서 독산성의 전투도나 행주대첩 기록도, 그 당시에 쓰였던 무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길이가 5.6m에 달하는 로켓무기의 일종인 대신기전(大神機箭), 방아쇠를 당겨 활을 발사하는 수노(手弩), 사정거리가 200보에 달했다는 각궁(角弓) 등 갖가지 전통 병기가 전시돼 있다. 

  덕양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덕양정과 진양정이라는 두 정자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행주산성 정화사업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본디 행주산성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은 아니다. 덕양정에 서면 햇살에 부서지는 한강 하구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또 1602년 건립한 행주대첩비가 비각 속에 남아 있으며, 1963년에 세운 대첩비도 서있다. 이 비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썼다.

  덕양산 정상에는 1602년 권율장군의 휘하장수가 세웠다는 초건비와 1970년 문화재 정화사업으로 세운 15.2m의 높이의 대첩탑이 존재하고 있다. 그 옆쪽으로 충의정이라는 영상교육관이 자리 잡고 있다. 영상교육관인 충의정에서는 임진왜란과 행주대첩, 권율 장군의 생애에 관한 영상물을 상영한다. 

  덕양산 정상에서 좌우를 둘러보면 이곳이 왜 전략적 요충지인지 짐작하게 한다. 그게 무엇인지 딱히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더욱이 행주대교 북단이 행주나루터였음을 감안하면 이곳은 김포 강화 해주 개성 등 서해에서 수도 한양으로 들어오는 해상교통의 길목이었을 테고 임진강을 통해서는 경기 이북의 내륙으로도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전진기지의 역할도 했을 것이다. 적이 강화만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진격할 때 덕양산이 수도 방어의 외곽기지로서 갖는 중요성은 꽤 클 것 같다. (
문의 행주산성 관리사무소, 전화 031-974-7237) 

 
 이곳은 자유로가 개통되고 신행주대교가 완공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져 휴일이면 많은 나들이객들이 찾아온다. 행주산성 입구나 행주내동에는 맛집이 즐비하여 찾는 사람이 많다. 먹거리로는 주로 숯불갈비, 매운탕, 장어구이, 닭백숙, 도토리묵, 해물파전 등으로  해울한정식( 031-978-7400 ), 장군집(한식,  031-972-6740 ), 행주산성장원가든( 031-973-5275 ) 등 많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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