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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비운의 한이 서린 사릉(思陵)을 찾아서 - 단종의 비 정순왕후

by 혜강(惠江) 2006. 8. 6.

남양주 사릉

비운의 한이 서린 사릉(思陵)을 찾아서

- 단종의 비(婢)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생애

 

·사진 남상학

 

 



   비가 그친 하늘은 청명하고, 초록 풀잎들이 더욱 새롭고 싱그럽다. 언제 한번 들러보리라 생각했던 곳, 경기도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면(眞乾面)에 있는 사릉(思陵)을 평소 가까이 지내는 벗님들과 함께 찾았다. 평소 공개하지 않는 능이었지만 관리사무소의 배려로 입장할 수 있었다.
  
아늑한 소나무 숲 속의 한적한 분위기

   유난히 많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사릉은 서울에서 좀 떨어져 있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전체적으로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주변에 동구릉, 홍유릉 등 살아서 크게 이름을 떨쳤던 왕들의 능이 즐비해서 아무래도 이곳을 찾는 사람의 발길이 뜸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공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되었든 이런 한적함이 인파에 시달리며 사는 우리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위안의 쉼터가 되기도 한다.

 

  관람객이 없는 경내에는 잡풀을 뽑느라 여념이 없는 여인네들뿐, 어디선가 뻐꾸기의 울움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 넓지 않은 경내의 높직한 언덕 위로 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능은 다른 곳에 비해 야트막한 것이 이곳에 묻힌 인물의 한 많은 일생을 그대로 말해주는 듯했다. 전체적으로 조촐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이다.

 

 


정순왕후(定順王后)의 기구한 삶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 65에 위치한 사릉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능이다.  여산 송씨 판돈녕  부사인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1453년(단종 1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던 중에 정순왕후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한 뒤 단종을 상왕으로 모시면서 의덕대비(懿德大妃)가 되었고, 단종이 다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면서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봉되는 신세가 되었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한 이후 열 여덟 어린 나이에 홀로된 정순왕후는 82세(1521년, 중종 16년)로 승하할 때까지 한 많은 일생을 보내야했다. 궁궐에서 추방된 후 여막에서 동냥으로 끼니를 이었고, 염색업으로 여생을 보내면서도 세조의 도움을 끝까지 거부하는 청빈한 생활을 했다.


  평생을 소찬(素饌)으로 보내다 죽은 뒤,  승하 당시(중종 16년) 부인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상태이었기에, 이곳 경기도 남양주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 정씨가(鄭氏家) 묘역에 묻혀 부인의 묘로 초라하게 조성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상(追上)되어 단릉의 형식으로 능호를 사릉이라 명명하였다. 

 

  처음 대군 부인(夫人)의 예로 장사지낸 뒤 후에 왕후의 능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에 차등을 두었고, 다른 능들에 비해 조촐하게 꾸며졌다. 따라서 병풍석과 난간석 모두를 생략한 채 봉분만 솟아 있고, 봉분의 주위에도 석양과 석호를 한 쌍씩만 둘러 세웠다.  사릉은 현재 사적 제2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배지 영월에서 일생을 마친 단종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은 영월에 있다. 단종은 문종의 외아들로 세종 23년(1441)에 태어나 12세인 1452년 어린 나이로 조선 제6대 임금으로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즉위 3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후 1457년 세조에 의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고, 그 해 10월 24일 관풍헌(觀風軒)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했다.  

 

  그가 유배당한 청령포는 영월 읍내에서 남서쪽으로 2㎞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뒤쪽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육육봉이 솟아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청령포에는 당시의 건축양식으로 재연해 놓은 단종어소(御所, 단종이 머물던 터)와 영조 2년에 세운 금표비(禁標碑)가 있는데, 이 금표비에는 '왕이 계시던 곳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의 글이 음각되어 있다. 이곳에서 단종은 2개월 정도 지내다 홍수로 인해 읍내 관풍헌으로 거소를 옮겼다.  

 

  단종이 죽임을 당한 당시는 후환이 두려워 그 누구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지 못했는데, 호장 엄홍도가 강물에 떠다니던 시신을 둘러 업고 장릉에 암장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곳 장릉 경내에는 배견정, 단종역사관, 재실, 엄홍도정려각, 배식단사 및 배식단, 단종비각, 정자각 등과 우물인 영천(靈泉)이 있다. 울창한 노송의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조선 왕조실록에 '장릉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 있다'고 쓰여 있어 경이로움을 한껏 더해준다. 사적 196호   

 

 

영월 단종의 능인 장릉

 


사릉의 유지에 대해 계속되는 논란  

    능 뒤쪽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은 송화가루를 날리기 직전의 한창 물오른 모습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능을 돌아본 뒤 소나무 숲길을 걸어 내려오며 한때 왕비의 신분이었던 자신이 어린 나이로 영월로 유배당한 남편을 그리며 가슴 아파했고, 끝내는 남편과 사별한 채 살아야 했던 정순왕후의 기구한 삶이 어떠했을까 한 동안 뇌리를 사로잡았다.

 

   이런 사정 때문이었을까. 숙종 24년에 단종 복위와 더불어 정순왕후로 추봉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1986년부터 사릉이 일반에게 공개된 이후, 멀리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 장릉과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을 한 곳으로 모으자는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 사춘기 소년 소녀로 생이별한 지 500여 년, 이제라도 두 분의 한을 풀어 드리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 묻힌 단종을 정순왕후 곁으로 모셔와 진정한 의미의 복위를 이루어 주자는 의견도 있고, 반대로 사릉을 장릉 옆으로 이전하자는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문화재는 제 자리에 원형대로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에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입구에서 능으로 향하는 우측에는 문화재청에서 관리 운영하는 묘원(苗園)이 있어, 이곳 묘포(苗圃)에서는 인멸되어 가는 각종 보호수의 배양과 다른 능, 원에 필요한 다양한 나무와 꽃들을 재배하고 있다. 사릉을 찾는 이들은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갖고  이 들을 덤으로 감상하기를 권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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