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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이이(李珥)와 황희(黃喜) 정승의 자취 - 자운서원, 화석정, 반구정

by 혜강(惠江) 2006. 8. 6.

 

경기도 파주

율곡 이이(李珥)와 황희(黃喜) 정승의 자취 

 - 파주 자운서원과 화석정, 반구정 -


·사진 남상학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출신 문인들과 <뿌리> 동인 몇몇이 어울려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파주 지역을 돌아보았다.  파주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이자 경세가인 율곡 이이(1536∼1584)가 살아온 본향으로 자운서원(紫雲書院)과 화석정(花石亭)이 있고, 조선시대의 청백리 황희(黃喜 1363∼1452) 정승이 여생을 즐긴 반구정(伴鷗亭)이 있어, 파주 지역 탐방은 문학도들에게는 이들의 학문과 시문의 향취를 느끼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다.  

 

  덕성여대 구(舊) 종로 캠퍼스(현 교육대학원, 평생교육원) 정문에서 모인 일행은 통일로를 따라 북으로 계속 달려 파주역을 지나 봉암(줄아위)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법원읍 4거리에서 좌회전, 표지판을 따라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서원(紫雲書院)에 도착했다. 자운서원은 자운산 자락에 싸여 아담한 품 안에 폭 안겨 있는 느낌이었다.
  

종합전시관인 율곡기념관(栗谷記念館) 

  먼저 우리는 자운서원의 현황을 듣기 위해 율곡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율곡 이이(李珥)를 봉안하고 있는 자운서원 경내의 율곡기념관은 율곡과 신사임당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전시실이다.

  율곡기념관 1층에는 율곡 선생과 특히 그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유품 112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임당께서 일곱 살 때 그렸다는 산수화˙포도화 등과 율곡의 누이 매창의 매화도, 그리고 서간문, 유산 분배 기록 등을 진열하였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이 복제품이라 아쉬움이 있었다. 2층에는 율곡선생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전시하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이(李珥, 1536-1584)는 선조 때의 유현으로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이다.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신사임당이다. 13세 때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9회 장원하여 이름이 천하에 떨치고 벼슬은 양과 대제학에 이조, 호조, 형조, 병조판서를 거쳐 찬성에 이르렀다.

   <학규>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집주(小學集註)를 지어 후진을 가르치고, 해동공자(海東孔子)의 일컬음을 얻고, 1584년 (선조 17년) 49 세를 일기로 별세. 파주 자운산(坡州 紫雲山) 자락에 안장되었고, 사후 41년 1624년 (인조 2년)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리고 98년 1681년 (숙종 7년)에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으로는 <율곡전서>가 있고, 시조로는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작품 연시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가 남아 있는데, 기념관에 이 작품의 액자가 걸려 있다.

  구곡(九曲)은 어듸메오 문산(文山)에 세모(歲暮)커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눈 속에 뭇쳐셰라.
  유인(遊人)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 <고산구곡가> 10수 중 마지막 


   43세 때 해주의 고산에서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지은 작품으로, 작자가 대사간의 벼슬에서 물러나 해주 석담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힘쓰고 있을 때, 그곳에서의 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序詩에 이어 관암(寬巖), 화암(花巖), 취병(翠屛), 송애(松崖), 은병(隱屛), 조협(釣峽), 풍암(風巖), 금탄(琴灘), 문산(文山)의 구곡을 노래했는데, 그것은 지명인 동시에 특색도 설명되어 있다. 위 작품의 '문산(文山)'은 지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학문의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암괴석이 뒤섞인 산에 흰 눈이 쌓여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이 경치를 보지 않고는 그 아름다움을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볼 것 없다고 하는 경박함을 탓하고 있다. 곧 성현의 길을 잊고 눈앞의 현실과 이익에 눈이 멀어 학문의 근본 도리를 잊고 있음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실로 정치가로서만이 아니라 학문과 시문(詩文)에 있어 당대에 빼어난 인물이었다.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자운서원(紫雲書院)


   경기도 파주는 율곡 이이(1536∼1584)의 선대가 살아온 본향으로, 자운서원(紫雲書院)은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광해군 때 지방 유림들에 의해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창건된 서원이다.
 
   자운서원은 율곡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기호 사림(畿湖士林)의 본산이다. 1615년(광해군 7)에 율곡의 애제자 김장생(金長生)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1649년(효종 즉위년) 왕이 '자운서원(紫雲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내렸다. 율곡의 학문을 이어받은 김장생과 박세채(朴世采)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던 곳이다. 

 

   그러나 1871년 '한 사람 한 서원'이라는 원칙의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의해 황해도 배천 문회서원 만을 남기고 자운서원은 폐쇄되었다. 1970년에 사당만 복원하였으며 근래에 들어와서 강당을 복원하고 선학 후 묘(先學後廟, '앞에는 강학의 배움터, 뒤에는 사묘의 예배터')의 정통적 서원 구조를 살리게 되었고 1973년 7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최근래에 건립된 자운서원 정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자운서원 강당이 나온다. 좌우에 300년이 훨씬 넘는 거대한 고목 느티나무가 시립을 하듯 서있다.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된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7호))가 강당 왼편 뒤, 내삼문 앞에 위치해 있다. 이 비는 자운서원에 배향된 율곡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한편 자운서원의 건립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예서체로 되어있는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썼다. 상단에는 김수항(金壽恒)이 [紫雲書院 廟庭碑](자운서원 묘정비)라는 전액(篆額, 머리글)이 쓰여 있으며 비문 끝에 쓰인 "崇禎 五十六年 癸亥"(숭정 56년 계해)라는 연기로 보아 1683년(숙종 9)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내삼문의 솟을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높은 지대 위에 아담하게 앉은 사당이 있다. 자운서원이라는 현액을 달고 있는 서원은 사괴석 담장을 둘렀으며, 건물구조는 익공계 형식에 팔짝 지붕이다. 정면 3칸의 정남향의 집이라 햇살을 따스하게 받고 있었다. 서원을 둘러보고 나서 서쪽 협문으로 나오니 바로 위쪽이 약수터다. 약수터에서 약수 한 모금으로 갈증을 해결하니 '물이 곧 약(藥)'이다.

 


율곡 선생 일가의 묘역(墓域)

   경내의 뒤쪽 언덕에는 자운산 자락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율곡 선생 일가의 선영(先塋)이 있다. 자운서원과 경기도 율곡교육연수원 사이에 자리 잡은 선생 일가의 묘역에는 율곡선생과 신사임당을 비롯한 일가 묘소 13기가 집결해 있다.  

  
   묘역의 입구, 선생의 시호 '문성공'에서 이름을 딴, 문성문(文成門)을 들어가 5분 정도 올라가면 멀리 해지는 임진강을 바라보는 자리에 일렬로 정렬된 5기의 묘소가 눈에 들어온다. 맨 위가 율곡 선생 부인 노 씨의 묘, 두 번째가 율곡 선생의 묘, 세 번째가 율곡 선생의 맏형 부부 이선과 곽 씨 합장묘, 다음이 율곡 선생의 부모인 신사임당과 부친 이원수의 합장묘, 맨 아래가 율곡선생님의 맏아들 이경임의 묘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기타 누님과 매형, 조카, 후손의 8기 묘소는 좌우로 자리하고 있다. 살아서도 화석정 아래 마을에서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 대가족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기를 희망했던 율곡은 죽어서도 함께 모여 있었다. 특이한 점은 율곡선생님 내외의 묘가 부모의 묘보다 위에 있다는 점이다.


 


율곡 이이(李耳) 선생의 신도비(神道碑)(향토유적 제6호)  


  서원이 있는 경내에 들어서면 왼편 언덕 위에 세워진 율곡 선생의 덕을 기리는 신도비가 눈에 들어온다. 자운 서원에 들어서면 왼쪽 언덕에 세워져 있는 이 신도비(神道碑)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였던 율곡 이이 선생(1536~1584)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이다. 율곡 선생이 돌아가신 후 47년이 지난 1631년(인조 9년) 4월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이항복이 짓고 신익성이 썼으며, 전액(篆額 : 전자(篆字)로 쓴, 비갈(碑碣)이나 현판의 제액(題額)을 말함)은 김상용이 썼다.


  높이 223㎝, 너비 109㎝, 두께 39㎝의 비석 앞뒤 좌우로 빽빽하게 율곡 선생의 공덕을 빈틈없이 새겨 넣었다. 재질은 대리석이고 앞 뒷면에 글이 써졌으며, 앞면에는 몇 군데 총알 자국이 남아있다.

 


율곡이 시정(詩情)에 잠겼던 화석정(花石亭) 


  자운서원에서 약 8km쯤 떨어진 임진강변에는 율곡선생이 작시, 묵상하였던 정자인 '화석정'이 있다. 자운서원을 나와 오른쪽으로 계속 나가면 왼쪽에 미군부대를 지나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적성 쪽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가파르게 깎여진 언덕을 올라가면 철망으로 둘러쳐진 초병의 벙커를 먼저 보게 되는데 길을 잘못 들었나 하는 착각이 든다.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꽃돌 정자'라는 이름의 화석정(花石亭)은 율곡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康平公 李明晨)이 1443년(세종 25)에 세운 뒤 증조인 이의석(李宜碩) 대에 증축하여 대물림하여 온 정자이다. 이후 이곳은 율곡의 학문과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화석정은 그 뒤 80년여 년이 지나 1673년(현종 14) 이후지(李厚址) 등 율곡의 후손들에 의해 복원되었으나, 또 한 번 6·25 전쟁 때 불타 없어지게 되었는데 1963년 파주의 유림들에 의해 복원됐고, 1973년 정부의 유적 정화사업 때 정비했다. 지금의 화석정 현판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다.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따라 서울 수진방의 친가로 올라온 어린 율곡은 나이 여덟 살 때 이곳 화석정에 올라와 시를 지었다 한다. 그 시가 화석정 안에 걸려 있다. 

 林亭秋已晩(임정추기만) 숲 속 정자엔 가을 이미 깊은데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의 회포를 달랠 길 없도다.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저 멀리 강물은 하늘 맞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타는 듯 붉도나.

 

 山吐孤輪月(산토고윤월)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색홍하처거) 먼 아아,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처량한 울음소리 저녁 구름 속에 그치네.


  외로운 나그네가 기러기에 빗대어 고독을 달래듯이 율곡은 어린 나이에 벌써 세상의 시름을 달래고 있다. 선생은 화석정 인근의 전원을 개간하여 형제 등 일가가 모두 한 곳에 모여 대가족을 이루면서 살기를 희망하였고, 인근의 냇가나 임진강가에서 벗들과 어울려 시를 지으며 산수에 취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훗날 선생께서 벼슬에서 물러나서도 이곳에 들러 자주 시를 지으며 사색에 잠기곤 했다.
화석정의 뜰에는 이 정자를 지은 율곡의 5대조 이명신이 심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500여 년 된 거대한 느티나무가 관광객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펼쳐주고 있다. 화석정은 말없이 흐르는 강변을 굽어보는 절경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북녘에서 흘러 안으로 휘어진 임진강을 달래며, 갈라진 한반도의 반쪽 북녘 땅을 저 멀리 바라보며, 율곡의 화석정은 우국(憂國)의 한을 안고 가슴 아프게 그렇게 자리 잡고 있다.

 

 

임진강변의 반구정(伴鷗亭)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90) 

 

 


  화석정 아래로 난 도로가 바로 37번 국도. 이 도로를 타면 쉽게 자유로까지 올 수 있고, 자유로 문산 IC로 나오면 임진강변에 황희 선생 영당지가 있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황희 선생 영당지는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며 청백리의 표상인 방촌 황희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1976년 8월 27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방촌기관과 반구정이 있다.(문산에서 서북쪽으로 3킬로 지점).

  이곳은 조선 세종조의 영의정이며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방촌(尨村) 황희(黃喜 1363∼1452)의 유업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조 원년(1455)에 유림들이 반구정(伴鷗亭), 앙지대(仰止臺), 경모재(景慕齋), 방촌영당(尨村影堂)을 짓고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2000년 황희선생 유적지 성역화 사업의 하나로 방촌기념관이 완공됐다. 황희의 일대기를 비롯해 삶과 사상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만든 각종 유품과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자료 중에는 황희의 탄생과 연결지어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예감한 용암폭포에 얽힌 탄생 일화도 있다.

   그는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20여 년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조선 초기의 역사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또한 황희 정승은 오늘날까지도 청렴의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며 맹사성과 함께 청백리의 대표주자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햇볕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그의 벼슬길도 순탄치 만은 않았다. 60여 년의 관직 생활 중 두 번이나 좌천되고, 세 번의 파직, 서인으로 강등되기를 한번, 귀양살이 4년, 등 우여곡절의 벼슬 생활이 연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종도 다 같은 임금의 백성이라며 모든 백성에게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허락했던 진정한 인간 주의자 황희 정승이었다. 인물이 드물고  나라가 어수선한 요즘 황희 정승 같은 인물이 더욱 그립다.

   한국전쟁 중에 모두 소실된 것을 그의 후손 장수 이씨 가문에서 부분적으로 복구해오다가 근래에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앙지대 등의 목조건물을 개축하였다. 널찍한 경내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경모재, 방촌영당, 양지대 등의 건물과 황희 정승의 동상이 차례로 보인다. 그리고 오른편 임진강변의 언덕 위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작은 정자가 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변 기암 언덕에 위치한 반구정(伴鷗亭)은 방촌 황희 선생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라 하여 이름 지어졌다. 허목(許穆)의 『伴鷗亭記』(반구정기)에는 이렇게 묘사해 놓고 있다.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기러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20리이다"

  그는 아마도 이곳에서 갈매기를 벗 삼고, 주변에 떠있는 고기잡이 배를 바라보며 한가로이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의 몇 안 되는 시조 작품 가운데 "고기 낚는 늙은이"는 이런 생활의 단면을 보여준다.

  뫼헤는 새다 긋고 들해는 가리 업다.
  외로운 배에 삿갓 쓴 저 늘그니
  낙대에 마시 깁도다 눈 깁픈 줄 아는가.

 
(주) 뫼헤는 : 산에는/ 긋고 : 그치고/ 들해 : 들에
      가리 : 가는 사람/ 낙대 : 낚싯대/ 마시 : 맛이 


  그는 이 작품 외에도 <강호의 봄> <임> <태평가> 등의 작품과 여러 편의 한시를 남겼다. 반구정에 올라 임진강을 내려보려 했으나 강변은 온통 철조망으로 차단되어 있다. 고기 잡는 이도 없고, 갈매기도 없다. 

 

 


   다만 행주산성 밑 강가로부터 이어지는 이 철조망은 오두산 전망대를 거쳐 동서를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으로 연결된다. 민족분단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지금 율곡의 화석정과 황희 정승의 반구정은 그렇게 냉가슴 앓으면서 임진강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길게 뻗은 철조망 너머 

  검푸르게 흐르는

  녹슨 세월 

  우거진 갈대숲은 울고 있구나 
 

  강과 강은 흘러

  하나로 이어지고

  하염없는 시간을 청둥오리 떼
  텅 빈 벌판을

  날아갔다 되돌아오고, 
 

  만조가 되면  

  돌아온다던 약속 믿고  

  다시 찾아와 마디마디 
  슬픔을 깨무는

  칠순의 어머니 

 

  갈갈이 찢긴 산허리  

  돌아갈 수 없는 강가에서 

  기어이 그 날은 오리라  

  목 메인 채       
 

  해 지는 저녁노을 

  꿈속에서도

  부둥켜안고 불러보는

  너의 이름

 

  오두산 강기슭에 

  길게 뻗은 철조망 너머  

  우거진 갈대숲은 울고 있구나. 
                    
    
 - 졸고(拙槁) <오두산에서> 전문>


 

 

  반구정에 올라 나는 시 한 편을 되뇌며,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즐기던 황희 정승과는 사뭇 다른 감정으로, 멀리 희미하게 시계(視界)에 들어오는 북녘땅을 주시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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