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군사적 요충지 김포(金浦), 그 역사적 현장 - 문수산성, 애기봉, 조각공원,

by 혜강(惠江) 2006. 3. 14.


김포


군사적 요충지, 그 격전의 현장

- 문수산성, 애기봉, 김포조각공원, 덕포진 -

 

·사진 남상학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한나절 가벼운 나들이로 김포를 택했다. 강화도는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그 나들목에 있는 김포는 강화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 그저 지나치는 곳으로 제쳐놓기 일쑤였다. 그러나 김포는 지형적으로 볼 때 강화 못지않게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지질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강화도는 본디 김포반도의 일부였는데, 염하 물에 침식을 당하여 떨어져 나가 섬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김포는 강화의 어머니격으로 강화와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곳이며, 강(한강 하류)을 사이에 두고 강화와 마주보고 있어 군사적으로도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문수산성

 

  먼저 김포하면 떠오르는 것은 문수산성이다. 김포에서 강화로 가다 보면 강화대교를 건너기 바로 전에 오른쪽으로 높이 솟은 산이 문수산

이다.  바로 김포반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해발 376m의 문수산(文殊山)에는 사적 제139호로 지정된 문수산성이 있다. 문수산 정상에 올라가 보면 동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해진 조강(祖江)이 서해와 물을 섞고 조강 너머엔 북한 땅 개풍군이 아랫동네처럼 내려다보인다. 더구나 그 사이에는 장마에 떠내려 온 북한 소를 구해낸 유도(留島)라는 섬이 점처럼 자리 잡고 있다. 

 

    또 서쪽으로는 김포와 강화도를 갈라놓은 염하(鹽河)가 있고, 건너편으로 강화도 갑곶돈에서 월곶돈에 이르는 강화도 동쪽 해안이 눈 아래 들어온다.   문수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물길은 조선 시대에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 배가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들어가는 유일한 뱃길이었다. 그리고 멀리까지 강화도가 손바닥처럼 보이니 강화를 지키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요새는 없을 것이다. 

   이런 지형 때문에 병자호란(1636) 이후 전략적으로 이곳이 주목을 받게 되었고, 뱃길을 감시하고 강화도 수비를 보강하기 위해 숙종 20년(1694) 문수산에 산성을 쌓았다.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수산을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흔히 강화도 쪽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외적을 방어할 필요성 때문으로 축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의 형편으로는 내륙으로부터 강화도가 침공 받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따라서 문수산성은 염하 동쪽을 잇는 덕포진, 군하리 봉수, 대명나루와 함께 염하를 건너  강화도의 진(鎭), 보(堡), 돈(墩)과 톱니가 맞물리고 있다. 
  


  그러나 문수산성이 강화도 쪽에서 내륙으로 침공하는 적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이용된 것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였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갑곶진에 상륙해 강화성을 점령하자 조정에서는 문수산성에 군사를 보내어 프랑스 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화력을 열세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하는 수모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문수산성은 강화대교가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염하를 따라 평지로 이어지다 문수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북쪽 능선을 따라 올라가 다시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도록 쌓아졌다. 이 산성은 둘레가 6201m, 내부 면적이 6만4000평에 이르는 비교적 큰 규모다. 

  모두 돌로 쌓은 산성은 현재 염하와 연해 있는 평지 부분은 모두 파괴되어 성벽이 남아 있지 않지만,  문수산 능선에는 성벽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의 성문은 취예류·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비밀통로인 암문 3개가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육지로 나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마을이 되었으며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벽만 남아있다. 문수산 정상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將臺)가 있었는데 현재는 지름 20㎝ 내외의 원형 주춧돌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도 산허리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촬영금지 팻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요새임이 틀림없다. 정상에 오르려면 통제선 앞에서 인터폰으로 통화해야만 가능하다.  

  산 아래에는 갑곶나루로 배를 띄우던 산성나루가 아직도 잘 남아 있다. 배를 타기 위해 발을 벗고 개펄을 건너야 하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석축으로 선착장을 만든 것이다.

  가는 길 : 김포공항에서 48번 국도를 따라 마송, 군하리를 지나 강화대교 바로 앞 성동검문소 지나자마자 오른쪽 문수리라는 작은 강가마을로 빠지는 길(302번 지방도)로 진입하면 오른쪽에 문수산성의 입구에 해당하는 취예루가 보인다. 서울 올림픽대로 끝지점에서 문수산성까지는 30~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애기봉(愛妓峰)에 서면 북한 산하가 한눈에 



  김포 반도 최북단 서부 전선, 무수산 인근 지역인 김포군 하성면에는 병자호란 때 평양감사와 애첩인 애기(愛妓)와의 슬픈 사랑의 일화가 서린 애기봉이 있다. 지척지간으로 북녘 땅을 건너다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기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범해 오자 평양감사는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애첩 기생 애기(愛妓)를 데리고 수도 한양을 향해 피난길에 오른다. 

  피난 도중 감사는 아깝게도 뒤따라오던 청나라 오랑캐에게 붙잡혀 다시 북으로 끌려가고, 애기만이 구사일생으로 강을 건너 김포군 조강리란 마을에 머물게 되자, 날마다 애기는 이 봉우리에 올라와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감사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않자, 애기는 결국 병이 들어 죽어가면서, 고향하늘과 임이 계신 북녘 땅이 잘 보이는 이 봉우리에 묻어 달라는 간절한 유언을 남기고 숨진다.  그 유언을 전해들은 조강리 마을사람들은 감사에 대한 일편단심과 애달픈 사랑을 가엾이 여겨, 애기를 이 봉우리에 묻어줌으로서 애기의 평생 한을 달래 주었다는 이야기다. 

  그 후 오랫동안 이곳은 154고지로 불려왔으나 1966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곳을 방문하여 이 봉우리에 얽힌 이야기를 들고, 애기의 한(恨은 강을 사이에 두고 오가지 못하는 우리 1천만 이산가족(離散家族)의 한과도 같다 하여, ‘애기봉’이라고 명명함이 좋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그 이름을 바꿔 부르게 되었다. 

  이곳 전망대는 북녘 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최단거리 전망대로서, 산 정상 전망대에 올라서면 북녘 산하가 바로 발밑에 펼쳐진다. 북한의 선전마을이 지척에 있고, 그 뒤로 개성 송악산의 연봉이 손에 잡힐 듯 이어져 있다. 같은 산하이면서도 나무가 없는 북녘의 풍경은 자못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전망대 뜰의 우측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로써 ‘애기봉’이라는 쓴 비석이 있고, 또 그 옆으로는 1993년에 세운 망배단(望拜壇)이 있다. 한해에 20여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가며, 명절이나 연말연시에는 망재를 위해 많은 실향민들이 찾아와 안타까운 한을 달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애기봉에는 해마다 성탄절이 가까우면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석탄일에는 대형연등이 불을 밝혀 북녘 땅까지도 밝은 빛을 전한다. 


 
 휴게소 좌측 숲속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김포지구해병전적비가 높이 솟아 있다. 한국전쟁 때 피아간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임을 실감케 한다. 지금도 이곳은 작전지역이라 제한된 구역 이외에는 출입할 수 없으며 통제구역은 철책으로 차단되어 있다.

   애기봉은 아름다운 경치로도 유명하다. 한강과 임진강이 서로 만나 서해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삼각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지형적 특성으로 강 쪽은 절벽을 이루어 마치 부여의 낙화암을 연상케 하고 서해바다 쪽으로 강화도의 해안이 수평선과 맞물려 아름답게 펼쳐진다.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해 서해로 흘러드는 하구여서 강폭이 바다처럼 넓어 특이한 경관을 보여준다. 

  김포 쪽으로 강 가운데 ‘유도’라는 섬이 떠 있는데, 이 섬은 옛날 우리 선조들이 전방의 한강 하구를 이용하여 마포포구까지  뱃길을 이용할 때의 휴식처로 이용되었으며, 지난 1997년도 폭우시 북한의 황소가 떠 내려와 구출한 섬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통제구역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다.

  애기봉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북쪽의 선전용 확성기에서 나오는 도전적인 선전방송이 귀를 찢었으나 상호 협정에 의하여 방송은 멎고,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고 적막하다. '돌아오지 않은 해병' 촬영지이기도 하다.

  김포에서 국도 48호선을 따라 강화 쪽으로 17㎞를 달리면 군하삼거리가 나오며 우측으로 5.6㎞를 더 가면 출입통제소에 다다른다. 신고서만 작성하면 자동차로 출입이 자유롭다.(도보, 자전거, 오토바이 등 불가). 매주 월요일은 휴무여서 피하는 것이 좋다.  

 


'통일’을 주제로 꾸며진 김포조각공원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에는 김포조각공원이 있다. ‘통일’을 주제로 하여 1998년에 문을 연 조각공원은 30개의 조각품이 설치됐다.  민족 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이다.  격전의 현장은 아니지만 민족 분단의 현실 아래에서 북쪽과 마주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을 감안할 때 분단의 비극 그 현장에‘통일’을 주제로 조성 되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조각공원을 둘러보는 감회 역시 조국의 안보와 연결 지워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이곳 조각공원에 설치된 세계의 유명 작가들의 조각은 2㎞에 달하는 산책로를 따라 자연과 어우러지게 배치돼 있어 환경친화적인 것이 특징이다. 아름다운 자연풍경 속에서 인간이 만든 창조적인 조형예술품을 감상함으로서 문화 예술의 안목을 키워나가는 삶의 체험장이기도 하다. 산책로 주변에는 야생화와 울창한 소나무가 있어 삼림욕도 겸할 수 있다.  

  산책로가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산등성이를 오르면서 일본 조각가 스스무 신구의 ‘숲의 전설’이라는 작품이 가장 초입에 전시돼 있다. 바람개비 같은 조형물인 숲의 전설은 모양은 같지만 서로 판이하게 움직이는 한반도의 현실을 상징화한 작품이다.  이어서 일본의  우제길의 ‘자연 속에서’는 12개의 수퍼미러에 일곱 가지 무지개 채색을 한 것으로 미래적 꿈과 희망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구퍼미러는 바람에 의해 회전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다니엘 뷔렌의 ‘숲을 지나서’는 환경의 조화와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작품이다. 3.1운동 당시 33인을 의미하는 33개의 줄무늬는 입구쪽의 오랜지 색은 통일의 염원을, 출구 쪽의 청색은 통일된 그날의 희망을 담았다고 한다.  

  
이 작품들을 지나면 약간 넓은 공터에 큰 건물이 서 있는 게 보인다. 이 건물은 관람객들이 잠시 쉬어가라고 만든 아트홀쉼터. 공원에 설치된 모든 조각품들을 축소시킨 모형물들이 전시돼 있다. 해당 작품을 만들게 된 의도와 작품의 의미도 따로 설명해 놓았다.

  
 아트홀 옆 뜰에는 프랑스 장 피에르 레이노의 '깃발'이 서 있다. 나란히 하늘로 치솟은 두 개의 깃대는 한민족의 동질성과 동시에 평행선으로 걸어가는 남과 북의 현실을 암시한다. 아마 작가는 묻고 있을 것이다.'왜한민족의 상징이 두 개여야 하는가'라고.  

 
 산길을 따라가면 바로 길 우측으로는 고조 니시노(일본)의 ‘산들거리는 속삭임’이 먼저 우리를 반긴다. 삼각대 위에 설치된, 비철금속 가운데 가장 견고하고 가벼운 티타늄으로 된 양날개는 아주 가는 바람에도 산들거리며 춤춘다. 자연의 미동이 얼마만큼 우리에게 기쁨과 사고를 자아내게 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산책로의 왼편으로는 솔 레위트(미국)의 '불규칙한 진보'와 한국작가 조성묵의 '매신저'가 있다. 앞에 보이는 피라미트처럼 쌓아올린 것이 미국작가의 작품이며, 뒤쪽으로 주인을 기다리는 듯 비어있는 의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줄리안 오피(영국)의 '모던-자연'으로 시선의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현대인의 얼굴을 상징하는데, 이 얼굴이 자연녹지 공간과 얼만큼 조화되며 대치되는가를 묻고 있다. 작가는 이 문명의 굴레에 씌워진 현대인의 얼굴을 통해 분단의 역사 또한 인간의 굴레임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조각공원의 산책로는 소나무 숲 사이로 나 있다. 길이 숲으로 들어가자 조각품도 길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갔다. 울창한 소나무 숲은 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정신을 말끔하게 씻긴다.

 

   일정한 간격으로 상하운동을 반복하는 유영교(한국)의 '개화'는 흑백의 논리처럼 단순하다. 이 움직임은 분단 이후 계속되어 온 실리 없는 남과 북의 대화를 암시한다. 동시에 꽃이 피는 형상을 만들어 내는 움직임의 효과를 통해 토일이라는 내일에의 희망을 담고 있다. 

  산책로는 평지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가 하면 아기자기한 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조각품들은 보통 길 좌우로 설치됐는데, 어떤 경우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20~30m쯤 길에서 벗어나 설치되기도 했다. 


  조각품 곁에는 거의 모든 곳에 벤치가 구비됐다. 걷다가 지칠 때면 벤치에 편히 앉아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팔각정을 지어 놓기도 했다.  위의 신현중(한국)의 '회복된 낙원'은 산책길을 가로질러 설치되었다. 두 마리 공룡의 대칭적 자세와 청홍의 대비는 남북의 대치 상황을 상징한다. 언제 마주하고 있는 공룡의 대칭적 자세가 풀고 비상의 꿈을 펼칠 것인가.  

 

  산책길을 따라 주변 조각품을 감상하다 보면 다시 아트홀로 오르게 되는데, 그 길목에 실비 플레리(스위스)의 ‘무제’라는 제목의 구찌 산발(샌들) 한 짝이 나온다. 숲 속에 버려진 신발 한 짝은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을 단적으로 암시한다. 한 켤레를 갖추어 신고 몸단장을 하고 나설 날이 언제 올 것인지 우리의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그리고 구소련 태생의 미국작가 이리야 카바코프의 ‘두 얼굴’은 남과 북의 서로 다른 얼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하늘을 향한 상단부의 얼굴이 온화한 자유세계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면, 측면의 일그러진 얼굴은 이념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세계의 얼굴이다. 아울러 이것은 또한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는 야누스의 얼굴이 아닐까.

   한국 조각가 전수천의 ‘자연과의 대화’은 스테인레스 수퍼미러로 만든 것으로, 거울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자연의 흡입과 방출이라는 이원적 효과를 근간으로 구상한 것이다.  모든 작품을 여기 올리지 못하지만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숲속에 설치되어 자연친화적인 분위를 자아낸다. 작품을 꽉 막힌 미술관에서만 감상하는 고장관념의 틀을 완전히 깨드린 시도이며, 또 작품의 전체적인 의도가 분단의 현실을 인정하고 토일을 염원하는 쪽으로 맞춰진 점에서 의미가 깊다.
                

  - 이 작품은 빔 델브와(벨기에)의 '바람의 장미'로 인체의 중앙부인 골반을 상징화한 것이다. 골반이 인체의 상하를 나누는 통로의 역할을 하듯 남과 북을 잇는 통일의 메시지로 표현하고 있다. 중앙부에 설치된 회전팬은 인간이 태어나 땅을 떠나려 끝없이 애쓰지만 결국은 땅에 묻힌다는 진리를 강조하면서 구원에 대한 구도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계단으로 올라 아트홀에 들러 축소된 작품의 모형 앞에서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면 작품의 제작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통일의 염원을 담은 대부븐의 저 작품들처럼 하루 속히 통일의 그날을 기원해 본다.  한편 김포조각공원은뿐만 아니라 사계절용 다목적 눈썰매장도 있으니 가족과 함께 한나절을 보내기에는 이만 한 곳도 드물 것이다.


  조각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다 보면 청소년수련원과 눈썰매장이 보인다. 청소년수련원은 하루에 5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농구장, 축구장, 테니스장, 야외공연장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겨울철에 이용하는 눈썰매장은 하루에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어 이곳 조각공원에는 사계절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신미양요 때의 격전지 덕포진

  

 김포의 격전지라면 찾아가야 할 곳이 더 있다. 덕포진이 그곳이다. 한강의 가장 아래쪽 김포군 대곶면 신안리. 바다에서 본다면 한강에서 들어가는 초입에 덕포진이 있다.  서해로부터 강화만을 거쳐 서울로 진입되는 입구이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는 곳이다. 건너편으로는 강화 초지진이 아스라이 눈에 잡히고, 한강물이 바닷물과 섞이는 포구가 눈앞으로 펼쳐진다.

  덕포진은 조선 숙종 때 임진왜란을 겪은 뒤 선조에 의해 왜구의 해상 침입로인 김포 앞바다를 수호하기 위해 구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영조 때 종 삼품의 수군첨사가 주둔하는 한양 주변에서 가장 큰 수군진지가 되었다.  그 후 덕포진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에는 강화도 광성보와 덕진진과 함께 프랑스함대와 미국 함대와 필사적으로 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세월과 함게 땅에 묻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덕포진이 발견된 것은 1980년. 그로부터 10여년에 걸쳐 옛 모습대로 복원이 되었다. 발굴 당시 탄약고 및 포대에 불씨를 공급하기 위한 불씨 보관 장소, 파수청지가 발굴되었고 소포, 중포, 포탄 및 상평통보가 출토되었는데, 이 때 발견된 대포 6문중 1문이 덕포진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덕포진에는 현재 학생들의 야외수련장과 야영장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포대와 포대사이를 연결하는 성벽 위로 산책로가 아주 잘 꾸며져 있다. 뱃사공 손돌의 전설이 서려있는 손돌묘까지 포대를 따라 산책삼아 걷기 좋다. 

  한참을 걷다 보면 덕포진이 얼마나 중요한 요새인지 실감하게 되어 우리 조상들의 호국의식이 마음에 와 닿는다. 덕포진 내에는 작은 규모의 야영장도 있어 여름철에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더위를 식힐 수 있다. 이곳은 굳이 역사의 현장이 아니라도 바다를 내려다보며 거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고 상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산책을 하며 느끼게 되는 단상(斷想) 하나 - 해안을 따라 설치된 철조망이 가슴을 저며 온다. 언제까지 우린 저 경계의 사슬을 풀 것인가. 저것이 걷히는 날, 우린 몸도 마음도 온전한 자유를 구가할 수 있으리라. 왜구의 침탈, 서양(프랑스, 미국)의 야욕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우리 민족의 아픔은 하루 속히 치유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아이들과 함께 찾는다면 초입에 있는 덕포진 교육박물관을 들러보면 좋다. 덕포진은 현재 사적 제292호로 지정되어 있다.

 

덕포진 찾아오는 길

서울에서 가려면 올림픽대로 끝부분인 개화로타리에서 48번 국도를 타고 김포읍을 지나 누산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초지대교 방향 352번 지방도로로 10km를 계속 직진하다가 덕포진삼거리(대명리)에서 우회전 한다. 거기서 표지판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된다. 만약 조각공원을 보고 나온다면 월곶에서 조금만 서울 쪽으로 나와 오리정에서 13번 도로로 우회전하여 진행하면 대명리에 이른다.

 



  인근 대명포구 어시장에서는 어부들이 직접 잡은 생선을 구입할 수 있다. 이 생선들은 값이 매우 저렴할 뿐만 아니라 생선의 종류도 철마다 다르다. 봄에는 주꾸미, 낙지, 숭어, 여름에는 병어, 밴댕이, 준치, 가을에는 꽃게, 새우, 겨울에는 동어, 삼시기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