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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숨쉬고 자연이 살아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

by 혜강(惠江) 2006. 12. 1.

경기 광주

민족사의 중요한 요충지

역사가 숨쉬고 자연이 살아있는 남한산성

 

·사진 남상학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은 1963년 11월 21일 남한산성 성벽을 국가사적 제57호로 지정하였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 도립공원으로 지정(제 158호) 하였다. 최근 들어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남한산성 답사를 원한다면, 먼저 남한산성역사관에 들러 해설자나 전시관에 전시된 전시물을 통해 남한산성에 대한 개요를 알아본 뒤에 방향을 잡는 것이 좋다.  남한산성역사관은 로타리에서 동문 방향으로 200여m쯤 지나 중앙주차장에 인접한 곳에 있어 남한산성의 역사와 산성에 대한 개요를 보여주고 해설해 준다.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남한산성은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행정구역상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한다. 남한산성은 성벽의 주봉인 청량산(497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7),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길이는 9.05km, 높이는 7.3m 이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또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지방도에 걸친 연변은 약 8km에 이르는 긴 협곡을 이루고 있다.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요충지로 기능해 온 장소이다. 원래 2천 여 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왕 때 최초로 쌓은 성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 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또한 신라 문무왕 12년(AD 672) 지금 형태의 토성으로 축성하여 주장성(晝長城), 일장성(日長城)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남한산성은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그리고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조선조 광해군 13년(1621) 처음으로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京都報障地)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고, 이괄의 난을 치르고 후금의 위험이 증가하므로 인조 2년 수어사 이서에게 명하여 수축케 하였는데 2년 만에 준공하였다.

 

   그 후 숙종 때 외성을 축조하는 등 성의 시설물이나 성내의 조영(造營)은 조선말 순조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역사의 파고와 함께 남한산성은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성의 구성은 본성과 외성, 옹성으로 되었으며, 둘레는 11.16km, 성곽의 높이는 3m~7.5m이고 4장대(서장대만 보존), 4문 5옹성, 16암문, 2봉화대가 있고, 성내에는 군포 125, 지당 45, 정호 80, 수대8개소가 있었으며, 유사시에는 임금이 이어(移御)할 수 있는 행궁을 비롯하여 종묘, 사직, 관아, 재옥, 객사, 종각 등이 있었다. 

  남문(지화문)은 성남에서부터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와서 통과하게 되는 문으로 현재는 산설터널을 지나 우측으로 오르면 되고, 서문(우읻문)은 국청사 위쪽에 있는 문이며, 북문(전승문)은 남한산성의 중심지인 종로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된다. 그리고 동문(좌익문)은 광지원 쪽에서 오르는 308번 도로 위족에 높이 자라잡고 있다.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옹성이라고 하는 것은 지형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성벽이 약한 곳을 보완하기 위해 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한층 더 쌓는 것을 말한다. 봉수나 망루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남한산성에는 제1남옹성, 제2남옹성, 제3남옹성, 장경사 신지옹성, 연주봉 옹성의 5개의 옹성이 있다. 복원한 연주봉 옹성은 둘레가 315m에 73개의 여담(낮게 쌓은 담장)이 있다. 

  암문을 통하여 성내로 출입할 수 있었으며, 옹성의 끝부분에는 원형의 석축구조물이 있다. 연주봉 옹성에서 동쪽으로 북장대지와 동장대지를 지나 이어지는 동쪽 산성 끝에는 벌봉이 있어 남한산성을 외성으로 이어진다.  

 
 사찰은 축성 전부터 망월사, 옥정사가 있었으나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하여 천주사 등 6개를 지어 모두 9개의 사찰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모두 폭파되었고, 현재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국청사가 복원되어 있다.

   성내에 경기도가 지정된 문화재로 수어장대, 청량당, 승열전,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이 있고, 문화재 자료로 지수당, 장경사, 기념물로는 망월사, 개원사, 행궁 등이 있다. 남한산성에서 문화재와 기념물을 둘러보려면 관리사무소 옆에 있는 남한산성 역사관에 들러 남한산성의 역사와 문화재의 분포상황을 이해하거나 아니면 홍보팜플릿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성내에 있는 문화재와 기념물들을 살펴보자,  


   수어장대(도유형문화재 제1호)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무망루 전각,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불모로 심양(현 봉천)에 잡혀 갔다가 8년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 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건물은 원래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라 부르던 것을 영조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2층 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 바깥쪽에는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서대라고도 불렀다. 
  청량당(도유형문화재 제3호)은 이 성을 쌓은 팔도 도청섭인 벽암 각성대사와 함께 이회와 그의 부인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다. 이회는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 충직한 인물인데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 후 이회의 무고함이 밝혀진 이후 수어장대 서쪽에 그와 부인의 영혼을 위안할 목적으로 청량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청량당'이란 이름은 이곳 산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며, '청량' 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행궁은 도성 안의 궁궐이 아니라 임금이 거동할 때 머무는 별궁 또는 이궁을 말하며, 조선조의 행궁으로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부안행궁, 온양행궁 등과 함께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 이라 하였다. 이 행궁은 상궐, 하궐로 구분되고 좌전(행궁의 종묘), 우실(행궁의 사직단)이 뒤에 설치되었다. 

 

 

 


   또 행궁 뒤 언덕에는 숙종 때 재덕당이 세워졌고, 하궐 앞에는 정조 때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다. 얼마 전까지 산성호텔이 있던 자리였는데, 이 자리가 원래 내행전, 남북행각, 재덕당, 좌승당이 있던 행궁터라는 것이 발굴조사에 의해 확인되어 복원하고, 행궁을 복원 중이다.

   또 숭열전(도유형문화재 제2호)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 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이서의 영혼을 함께 모시고 음력 9월 5일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인조 16년(1638)에 지었으며 정조 19년(1795)에 숭열이라고 사액되었다. 완풍군 이서는 성을 쌓는데 총 책임자로서 공이 커 여기에 모시게 하였으며, 본당은 좌우측에 아래 단이 둥근 형태를 한 방풍벽을 갖춘, 맞배지붕 형식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침괘정(도유형문화재 제5호)은 군기 제작소로 알려졌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시진이 중수하고 '침과정' 이라는 편액을 걸어다. '枕戈'(침과)란 戈, 즉 '창을 베개 삼는다'는 뜻이다. 현재는 '침괘정'으로 통용되고 있으나 정확한 표기는 '침과정' 이 옳다. 왜냐하면 '戈' 는 '괘' 로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의 호칭대로 적는 지명관례상 '침괘정' 이라 표기 하였다. 건물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양식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이다.

   연무관(도유형문화재 제6호)은 군사들의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 규모는 100평이며, 처음에는 연무당 또는 학무당이라 불리던 것을 숙종이 당시의 수어사이던 이재호로 하여금 개축케 한 후 연병관이라는 편액을 내렸고, 22대 정조 때 다시 수어영이라 개칭하였다.

 

 

 

   현재 건물의 중앙에 ‘연무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에서 군사들의 훈련과 무술 시합을 열어 뛰어난 무인의 인재를 뽑아 중앙으로 보냈으며 활쏘기 연습을 하던 활터가 있었다고 한다.

   현절사(도유형문화재 제4호)는 병자호란 후 심양에 끌려가 충절을 지키다가 그곳에서 비운을 맞은 삼학사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다. 삼학사는 남한산성이 청 태종의 12만 대군에 완전 포위당한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최후의 1인까지 끝까지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들이다. 이러한 정신은 의리와 명분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치는 조선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후에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도 함께 배향 되었다.

   지수당(도유형문화재 제14호)은 현종 13년(1672)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당시 고관들이 한유하던 낚시터이다. 건립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의 연못만이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이 있다. 정자의 남쪽으로는 서에서 동으로 성을 관류하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장경사(도문화재자료 제15호)는 성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로서,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50m거리의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찰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 사찰이다. 사찰내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누(鎭南樓),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는데, 그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하게 지어진 고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망월사(도기념물 제111호 11)는 장경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9개 사찰 중 가장 오래된 고찰로 망월암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 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 불상과 금자 화엄경 한 벌, 금정 하나를 이리로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4종의 복원된 건물의 규모가 옛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현재 부분적으로 복원되었다. 대웅전, 금당, 요사체 2동, 13층 적멸보궁탑과 병풍석은 망월사의 자랑이다. 

  개원사(도기념물 제119호)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승군 본영을 두었던 절로서 벽암 각성선사가 조선 8도의 도총섭이 되어 승려들을 지휘하여 남한산성을 축성하였으며, 그 후 수도를 방어하는 호국승군의 도장이 되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인조 15년(1637) 이래 대장경이 보관되어 왔으나 1907년 8월 1일 일제의 산성의 무기 수거와 화약 현지 폭파 사건을 맞아 법당 누각 등의 부속건물들이 모두 전소되어 개원사는 하루아침에 폐사의 비운을 맞고 말았다.

 

   원래 군기고지, 누각지, 종각지 등에는 주춧돌이 남아있어 개원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짐작케 한다. 이 외에도 남한산성 안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또 이곳에는 산성로터리에서 가까운 곳에 만해 한용운(卍海韓龍雲) 기념관이 있다. 이곳에선 만해의 민족혼과 독립사상, 종교적인 삶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이 기념관은 전보삼(全寶三, 신구대학 교수) 관장이 독립운동가이자 불교 대사상가인 한용운 선생을 평생 모시고자 1998년 집과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 인제에 가면 백담사와 백담사 입구에 '만해마을' 이 있지만, 이곳은 한 개인이 전 재산을 털어 의욕적으로 마련한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 기념관에 들어서면 ‘님의 침묵’, ‘나룻배와 행인’이라는 시가 적힌 시비(詩碑)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특히 '님의 침묵'을 새긴 시비는 그 형태가 톡특하여 더욱 흥미를 끈다.  계단 입구 옆에는 만해의 흉상이 자리잡고 있다. 연건평 120평의 전통 한옥 2층 건물로 1층 전시실에는 일제 강점기 동안 금서였던 ‘음빙실문집’, ‘영환지략’, ‘월남망국사’ 등 만해가 평소에 즐겨보았던 수택본들이 있다. 
 

 

  또 이곳에는 해공신익희 선생 동상을 비롯하여 천주교 남한산성순교비 등 순교유적이 있어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기에 좋다. 

 

 

 

   남한산성의 매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인 교육의 장소로서 호국 정신을 고취할 수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수도권 최대의 자연 소나무 생태를 보존하고 있는 자연휴양지라는 점, 셋째는 삼림욕을 하며 먹거리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문화휴양지라는 점이다. 

   역사가 숨고 자연이 살아있는 곳. 울창한 소나무 숲을 따라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성곽과 옹성을 따라 거닐면 일반 유원지와는 색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광주시는 남한산성을 가족 단위로 즐길 수 있도록 5개 등산코스를 지정해 권장하고 있으며,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끼고 있는 동문코스 산책을 권장한다. 

   특히 남한산성은 서울 강남, 강동구와 경기도 성남, 분당, 구리시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리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남한산성 서문일대는 한밤중에 보려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휴식의 편안함 속에서 선조들의 발자취를 밟아보는 재미가 남한산성에 있다. 산성 안에는 토속음식을 비롯한 갖가지 음식을 내는 식당이 있어 주말이나 야간을 이용하여 찾는 손님들이 많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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