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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북한강변의 마현마을 다산 정약용 유적지

by 혜강(惠江) 2006. 12. 9.

남양주 마현마을

북한강변에 자리잡은 다산 정약용 유적지

 

·사진 남상학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로 많이 알려진 곳은 강진의 다산초당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최고의 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은 서울에서 가까운 남양주의 능내다. 이솟에 다산생가인 여유당과 다산유물관과 문화관, 사당,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양수리에서 가까운 마현마을(마재)이 바로 그곳이다.

 

  마현은 그 모양이 혹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어 마치 한강물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보인다.  이곳 유적지는 그 규모면에서 강진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그러나 다산초당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 강진으로는 쉽l게 달려가면서도 정작 이곳을 찾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필자가 이곳을 찾은 것은 겨울로 접어든 어느 늦은 오후, 날씨마저 우중충한 때여서인지 유적지는 한적하고 고즈넉했다. 

 
  1972년 경기도 기념물 7호로 지정된 유적지는 다산이 초년과 말년을 보냈던 생가 여유당(與猶堂)과 다산의 업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다산유물관이 있고, 생가와 북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생가 뒤쪽의 나지막한 산허리에 그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이 묘역에 서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멀리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져 있다. 

 

 


   
 이 유적지는 남양주시가 1925년 경인지방 대홍수로 무너져 터만 남아 있던 생가를 1987년에 복원한 것이다. 이 마을에서 다산(茶山 丁若鏞, 1762∼1836) 선생은 태어났다. 그는 조선후기의 대학자로서 어려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하였고, 이벽에게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여 실학과 서학적 분위기속에서 성장하였다. 

 
  조선의 기품 있는 선비이자 실학자인 다산 선생은 22세에 벼슬길에 올랐다. 1789년(정조 13)에 문과급제 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천주교인이라 하여 충청도 해미로 귀양 갔다가 10일 만에 용서되어 풀려났다. 또한 거중기와 녹로(도르래)를 만들어 수원성 수축에 있어서 공정을 단축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후 경기도 암행어사를 거쳐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 신부의 변복 잠입. 사건이 터지자 형인 정약전과 함께 이 사건에 관련되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801년(준조 1)  신유박해 때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된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 이 해 10월 다시 전라남도 강진으로 옮겨졌다. 이때 선생이 지내던 곳이 바로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이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5백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으니, 18년 동안에 걸친 강진 유배기는 저술기간이었다고 할 만하다. 특히 이 시기의 경세학과 더불어 다산사상의 도축을 이루는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다산은 후학을 가르쳤고, 책도 많이 썼다. 오랜 유배생활에 들어가며 그는 조선사회의 현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여러 사상과 학문을 검토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1818(준조 18)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마현 마을 고향집으로 돌아와 저술생활로 평생을 보냈으며 1836년(헌종 2) 75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조선의 개혁을 꿈꾸다 결국은 오랜 유배생활 끝에 고향인 이곳에서 숨을 거두고 땅에 묻힌 것이다.  여기서 잠시 그의 생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762(영조 38)∼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 · 사암(俟菴) · 여유당(與猶堂) · 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 ( 正祖 )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 ( 西學 )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 經世遺表 · 牧民心書 · 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 노력하였다.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 혁명론 ’ 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 국태민안(國泰民安) ’ 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유적지로 들어가는 곳에는 전남 강진 유배기간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천일각, 선생의 실학정신을 형상화한 조형물, 수원 화성을 지을 때 쓰였던 거중, 녹로 그리고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 다산초당의 축소 모형 등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목민심서>의 글귀를 새겨놓은 원통형 기둥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다산유적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란히 서있는 유물관과 문화관을 만난다. 45평 규모의 기념관에는 다산의 영정 및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 다산의 실학사상이 담긴 저서 와 집필 기록, 산수화 등을 비롯해 거중기와 녹로 등 그가 만들었던 역사적인 물건들까지 재현해 놓았을 뿐 아니라, 다산초당, 천일각 등 그가 유배를 살았던 곳을 섬세한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목민심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고을의 수령, 즉 목민(牧民)이 지켜야 할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쓴 책이다.또한 문화관 강당에서는 다산 영상물 및 교육자료를 상영하며, 다산학 무료강좌와 다산에 관한 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유물관과 문화관을 나서면 뒤로 널찍한 광장을 사이에 두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이 눈에 들어온다. 자료에 의해 원형 가까이 복원해 놓은 여유당은 전통양반집으로 손색이 없다. 큰 나무 그늘과 나지막하고 단아한 담장이 양반의 울타리를 넘어 아랫사람들을 허물없이 대했던 다산의 성품을 보여주듯 편하게 와 닿는다. 여유당 안은 무척이나 깨끗하고 검소하다. 규모도 작고 주변이 화려하지도 않다. 

   여유당 뒤의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묘역으로 가게 된다. 묘지 초입에 다산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묘지에서는 아래로 북한강과 건너편의 분원까지 한눈에 조망된다. 묘소에서 좌측의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선생을 추모하여 세워진 문도사라는 사당이 나타난다. 


 
  다산 묘는 생가 옆 언덕에 있다. 묘 앞에 높이 2.5m 비석과 상석 그리고 양옆으로 망주석이 배열됐을 뿐 어느 묘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묘비에는 "문도공다산정약용 숙부인풍산홍씨지묘"라 새겨져 있어 부부 합장묘임을 말해준다.

   한편 그는 본래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그의 형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 이들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이라는 것을 보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중 다산은 그의 형 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천수를 다하면서 "목민심서", "경 세유표", "흠흠심서"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같은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쓰여 졌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 마현으로 돌아온 그는 천진암 앵자봉을 바라보며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곳을 빠져나오면서 이렇게 뛰어난 학자가 왜 18년이란 세월을 귀양지에서 떠돌아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귀양살이의 외로움을 이겨내고서 태어난 것이 다산의 실학정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산생가 맞은편에 실학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2009년 10월에 개관한 실학박물관은 실학을 주제로 한 최초의 박물관으로  제1전시실의 상설전시는 실학의 형성, 제2전시실은 실학의 전개, 제3전시실은 천문과 지리로 꾸몄다. 그리고 특별전시 주제로 실학탄생의 배경이 되었던 김육과 대동법을 선정하여 꾸며져 있다. 다른 박물관과는 달리 유물의 대부분이 전적류(典籍類)인 관계로 '개념'과 '교육'으로 승부하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의 출현과 발전·성과를 재조명하고, 실학의 현대적 계승을 전시한 곳으로서 관람자들에게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다산 유적지가 있는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유원지로 더 알려져 있다. 지금은 좀 시들해진 편이지만 능내역이 가까이에 있어 MT 장소로 유명했다. 그러나 아직도 매운탕 등을 파는 식당들이 꽤 있고, 선생의 유적지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강변이 나오는데, 이곳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어 야유회 장소로 많이 이용된다.

 

 

* 찾아가는 길 *

⊙ 서울(강남) → 올림픽대로 → 미사리 → 팔당댐 → 2.8km 지점에서 우회전 → 마현마을
⊙ 서울(강북) → 도농삼거리 → 덕소 → 6번 국도 → 양수리 방면 → 유적지 표지에서 우회전
→ 마현마을
⊙ 중부권 → 광주88 I.C → 팔당댐 → 2.8km 지점에서 우회전 → 마현마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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