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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세계문화유산으로 빛나는 '성곽의 꽃'

by 혜강(惠江) 2006. 12. 19.

 

화성 수원성


세계문화유산으로 빛나는 '성곽의 꽃'

 

·사진 남상학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고 불리는 화성은 조선조 제22대 1794년(정조18년) 1월에 착공하여 2년 9개월 후인 1796년(정조 20년) 9월에 완공했다.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세도세자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품고 아버지 묘를 명당의 자리로 모시는 것이 염원이었다. 마침 후보지로 수원 고을 뒷산(지금의 화산)이 물색됐고, 드디어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부근에 용주사를 세워 부왕의 명복을 빌었다.  

 

   이와 함께 당시 화산 아래에 있던 관청과 민가를 팔달산 아래로 모두 이전시키고 신도시로서 새로이 조성한 것이다. 이 때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산(花山’의 ‘화(花)’자를 따다가 같은 의미의 글자 ‘화(華)’로 바꾸어 이 신도시를 화성(華城)으로 명명하였다.  

   이렇게 수원성 축성은 왕의 효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노쇠한 왕(영조)의 52년간 통치가 막을 내리자 새로 등극한 젊은 왕 정조는 강력한 왕권 구축을 절감하였고, 보다 강력한 왕권 확립을 위해서는 자신의 뜻을 펼 새 거점이 필요했던 터여서 시대를 앞서간 신도시 건설의 발상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왕의 의지 아래 탄생됐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수원성이 세워지게 된 것은 지극한 효심의 발로인 동시에 왕의 배후 경제기반과 군사기반을 마련하여 강력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다.

 

 

<출처: 사이언스> 캡쳐


  축조된 수원성에는 중세의 봉건적 틀에서 벗어나 근대국가로 나아가려는, 그 시대의 변화하는 모습이 전통과 조화되어 잘 드러나 있다. 겉치레보다는 쓰임새를 중시하는 근대지향적인 실학의 정신이 반영되었다.

 

   일차적으로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行宮)을 지어 현륭원(顯隆園 )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고, 객사,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었으나 현재 화성행궁은 대부분 복원되었다. 또한 도시 외곽에는 조선 땅 어디에도 이제까지 만들어진 적이 없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성곽까지 구비하게 되었다. 

  화성은 조선 성곽제도의 최고 완성형이다. 한국성곽 발달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 성은 석성과 토성의 장점만을 살려 축성됐다. 화성의 축조방법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던 전통적인 축성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성곽술과 규장각 문신 정약용(鄭若鏞)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진행됐다.

 

<출처 : 사이언스> 캡쳐

  특히 정조로부터 수원성 축성의 명을 받은 젊은 학자 다산 정약용은 당시 나이 31세, 그는 우선 작업과정에서 인부들이 일정한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작업 능률을 올릴 것을 생각하였고, 자재를 운반하는 새로운 수레와 거중기(擧重機),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는 돌과 벽돌, 통나무 등을 들어 올리는 작업의 능률을 4배 이상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밧줄을 여러 개 도르래에 걸고 양쪽 끝에 있는 큰 도르래를 거쳐서 작은 바퀴의 굴대에 감기도록 돼 있어 사람들이 좌우에서 바퀴를 돌려 무거운 짐을 끌어올린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는 새기술과 공법으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당시 조선의 도시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성곽의 모습을 그려냈던 것이다.

 


  사도세자 묘 이전에 따라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게 된 수원은 과거의 수원읍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큰 규모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한양 다음의 대도시 서열에 올라 광주부에 버금가는 도시가 되었다. 화성 축성은 역대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200여 년 전에 축조된 화성은 가장 근대적인 규모와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종래의 조선시대 성곽은 보통 때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으로 기능상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성곽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은 설치하지 않고 보통 때 거주하는 읍성에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많은 방어시설이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망루(望樓)의 역할과 총안(銃眼)으로 적의 침입을 막게 되어 있는 공심돈이다. 또한 돌과 벽돌을 섞어 사용한 과감한 건축술, 녹로·거중기(擧重機) 등의 과학기기를 활용한 점,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火砲)를 주무기로 삼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를 이룬 점 등은 이 성곽만이 가지는 특징이다.

   성의 둘레는 5,744m, 평균 높이 5m 정도이고 그 위에는 높이 1.2m 정도의 여장을 쌓았다. 여장은 모두 벽돌로 쌓고 여러 개의 총구를 규칙적으로 뚫어놓았다.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성의 시설물은 현재 41개소이며, 미복원 시설물은 7개소이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수원성은 그 시대까지 축적되어 온 학문과 기술의 총화라 할 만하며, 산업혁명 이전의 도시성곽으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빼어난 성곽으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정조의 명으로 착수하여 1801년(순조 1)에 간행된 준공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전해오고 있어 수원성의 공사과정을 낱낱이알 수 있고, 중수·복원을 정밀하게 할 수 있어 현재에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곽 둘러보기

   수원부를 둘러 싼 성벽은 팔달산 정상에서 산의 능선을 따라 남으로 이어내려 와서 남쪽 평탄한 곳에 내를 지나 동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거의 직선을 그리다가 동쪽 끝 높은 지점에서 지세를 쫓아 서쪽으로 굴곡을 그리다가 북쪽 내를 건너 평탄한 들을 지나 다시 팔달산 정산으로 이어진다.  화성을 한 바퀴 둘러보기 위해 성의 남문인 팔달문에서 시작하여 시계바늘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성의 안쪽으로 잘 닦여진 길은 간혹 계단을 오르내리는 곳이 있지만 대부분 평탄한 길이었다.

 

 


* 화성의 남문 팔달문(八達門)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보물 제402호이다. 이 문은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위에 문루를 세웠으며, 주위 4면에는 담장을 둘러쌓고 전면에는 무너지지 않도록 반월형으로 옹성(甕城)을 축조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성문 건축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2칸의 평면을 이루었으며 내부에는 중앙의 높은 기둥을 일렬로 배치하였고 상하층의 대들보는 전부 이 높은 기둥에 연결되어 있다. 상층의 벽은 하층의 대들보 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러한 중층 문루의 구성방식은 서울의 숭례문(남대문), 흥임지문(동대문)과 기본적으로 동일하게 되어 있다.

  성문의 높이는 약 20m 정도로 지붕은 우진각 형식을 취해 웅장하고 중후한 멋을 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옹성의 출입구는 두 문이 일직선상에 올 때 밖에서 성안이 들여다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한쪽 편 치우친 곳에 내어 성문과 옹성문이 일직선상에 놓이지 않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장안문과 함께 팔달문은 일직선상에 놓이도록 하였는데 이는 ‘화성의괘’에 의하면 "....이제는 사통하고 팔달한다는 뜻을 따서 일직선상에 놓이도록 하였다."고 하여 수원성이 단지 안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리고 뚫리는 개방적인 성임을 알 수 있다.

 

 


* 남포루(南砲樓) 

  팔달문의 서쪽 골목으로 들아가면 관광안내소가 있고 여기서부터 성에 오른다. 언덕길을 저금 오르니 남포루가 나타난다.  포루는 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서 남포루는 성의 남쪽에 위치한 것을 이른다. 포루는 전돌을 쌓은 벽과 3층으로 이루어진 내부가 있으며 벽면에는 현안(懸眼)을 뚫었다. 서포루의 경우는 화성의 최고 군사 지휘소인 서장대의 근거리에 위치한 까닭으로 가장 중무장한 포루이다. 화성에는 이외에도 북서포루, 동포루, 북동포루가 있다.

 

 


* 서남암문(西南暗門) 및 포사 

   남포루를 지나 오르니 서남암문이 눈에 들어온다. 서남암문 및 포사는 화성의 서남쪽 서남각루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암문은 성곽의 중요지점에 축조하여 양식 무기 등을 은밀히 반입하는 곳으로 성곽의 비밀통로이다. 이곳은 다른 4개 암문과는 달리 암문 위에 건물을 지었는데 이를 포사라고 한다.

   벽돌로 된 홍예는 안쪽의 너비가 7척 높이가 8척 5촌이고 바깥 너비 6척 높이 8척이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鋪舍)이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있어 높은 곳에 의거해서 멀리까지 볼 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두어서 경보를 알리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 서남각루인 화양루(華陽樓)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건물이다. 서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화성성곽 팔달산 서남쪽 끝머리에 있으며 일명 화양루라 부른다. 서남암문에서 연결된 끝머리에 위치 하고 있는데, 서남각루는 성의 남쪽 높은 지점에 우뚝 서있어 사방을 굽어보기에 좋은 성의 요충지이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건물이다.


* 서포루(西砲樓) *

   포루는 성곽에서 치성과 같이 돌출시켜 산중충으로 축조하여 중화기를 배치하고 외적을 공격하는 곳이다.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 하부 3~4단은 화강석으로 쌓고 그 위는 전돌로 축조하였으며, 최상층에는 목조건물로을 세웠다. 성벽 아래 부분가지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으나 외관상 단층누각만 세운 것처럼 보인다.중간에는 계단을 설치하였고, 총구멍을 내었다.

   화성에는 남포루, 서포루, 북서포루, 복동포루, 동포루 등 5개가 있는데, 서포루의 경우는 화성의 최고 군사 지휘소인 서장대의 근거리에 위치한 까닭으로 가장 중무장(重武裝)한 포루이다.

 


* 서장대(西將臺)와 서노대(西弩臺)


 서포루에서 호원의 종각과 서암문을 지나니 서장대가 높이 보였다. 수원 화성(華城.사적 제3호) 서장대는 화성의 장병지휘본부로서 일명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서장대는 화성의 가장 높은 곳인 팔달산 정상(해발 128m)에 위치한 군사지휘본부로 서장대 누각에 오르면 수원시내 사방 100여리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서장대는 수원 시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 화성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알려져 있다. 두 차례의 화재로 수난을 겪은 서장대는 지금도 보수 중에 있다. 화성축조 때 정조대왕의 친필편액인 '華城將臺'가 걸렸으나 지금은 친필편액은 없고 유명서예가가 쓴 것으로 대체됐다. 장대는 서장대와 동장대 2개소가 있다.  

  1796년(정조 18년) 화성을 처음 축조할 당시에 2층의 누각(가로 8m, 세로 8m, 높이 15m)과 주변에 팔각 노대(망루)를 쌓았고 그 옆에 군무소를 지었으나 서장대 첫 복원시(1976년)에는 군무소를 복원하지 못했다. 

   노대는 누각이 없이 쇠뇌를 쏠 수 있게 만든 곳으로 서장대에 자라잡은 서노대와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자리잡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부에 위치하여 서장대를 지키기 위해 쇠뇌를 쏘던 방어시설이다.  

   건물형태는 누각이 없으며 대를 팔각으로 깎아지른 듯이 축조한 것이 특색이다. 팔각모의 넓이는 각각 2.6m로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며, 높이는 3.64m이다. 또한 노대 위에는 1.3m의 여장을 두르고 총안을 내었으며 팔각형 한 모퉁이에는 아홉 개의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바닥에는 전을 깔고 그 한가운데 높이 31㎝의 방대를 쌓아올렸다.  

 

 

* 서북각루(西北角樓) 


   서장대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성곽 길은 이제부터 내리막이다. 서북각루는 산 위의 휘어 굽은 곳에 있다.  각루는 정찰, 군량운반 통로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원거리 전망이 좋은 성곽 모퉁이 요소에 자리잡고 있다. 서북각루는  5량(五樑) 4간으로 동서가 18척, 남북 22척, 동북 3간은 모두 판자를 깔고, 사면을 평난간으로 둘렀다. 위에는 판문을 설치하였고 외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안을 뚫어 놓았다.

   내면에는 태극을 그리고, 그 서남 한 간은 비워서 층계를 설치하여 북쪽으로 누상에 이어지게 하였다. 동남 1간은 청판(廳板) 아래를 벽돌로 담을 둘러치고, 온돌을 설치하여 수직하는 군사가 있게 하였다. 평지에서 누의 바닥까지 5척 7촌, 누의 높이 7척 5촌이고,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으며, 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 화서문(華西門)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서쪽 문으로, 축성시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보물 제40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무지개 문 위에 단층으로 문루를 세웠으며, 전면에는 반월형의 석축으로 두른 옹성이 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바닥에는 중앙칸에만 마루를 깔았으나 이것은 아래서 보면 석축 무지개 문의 천정구실을 한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모두 벽돌로 쌓고 현안 3개와 여장에 네모꼴 총혈(銃穴) 19개 사혈(射穴) 6개가 뚫려 있다. 공심돈(空心墩)은 화서문과 같이 축조된 2층으로 된 망루로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인데 이 같은 망루는 우리나라에서는 수원성에서만 볼 수 있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를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하여 총안(銃眼)-포혈(砲穴)이 뚫려 있고, 위에는 단층의 목조누각을 만들어 총안이 뚫린 판문(板門)시설을 하여 먼 거리의 목표물로부터 근거리의 목표물까지 한꺼번에 방어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바로 아래의 성벽에 달라붙은 적을 공격하는 현안(懸眼)이 마련되어 있는 점에서는 치성(雉城)·적대(敵臺) 등과 그 기능이 동일하지만 성벽보다 윗부분으로 치솟은 부분은 독특한 기능을 가지도록 되어 있다.

 

 


*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공심돈은 전시에 사용되는 장거리 관측소로서 위아래에 구멍을 많이 뚫어서 바깥동정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총포를 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 두 곳이 있는데, 동북공심돈은 타원형으로 축조되어 달팽이 모양의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북치(北雉) 위에 있다. 

   돈대(墩臺)란,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塼)으로 쌓아올려 망루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직한 누대이다. 치(雉)에다가 돈(墩)을 설치하였는데, 치의 높이 15척, 서북 이면에 각각 현안(縣眼) 두 구멍을 내었고, 그 위에 벽돌로 쌓아서 그 속을 비게 하고, 위에다 가로 세로 2간의 집을 지었다.

   벽돌로 쌓은 것이 높이 18척, 아래의 너비 사방 23척, 위의 줄어든 너비 사방 21척이다. 상청판(上廳板)과 하청판의 2판을 설치하여 누(樓)일 경우에는 2층으로 하고 포(鋪)일 경우에는 3층으로 하여 층마다 벽돌로 된 면에 불랑기를 쏘아댈 포혈(砲穴) 사방 1척을 내었다. 

  상층의 벽돌로 된 면 위쪽은 판자로 둘렀으며 문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대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중층과 상층에는 각각 청판(廳板)을 여는 사방 3척의 덮개판 하나를 만들어, 밀고 당겨서 열고 닫게 하여 나무 사닥다리로 된 오르내리는 길과 통하게 하였다. 아래 층 안쪽에는 벽돌로 된 홍예 모양의 작은 문을 내었다.

 

 


* 북포루(北鋪樓) 및 북서포루

 

  북포루는 서북공심돈우측에 위치해 있으며, 서북공심돈→북포루(北鋪樓)→북서포루(北西砲樓)→장안문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북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건물을 지은 것이며 성내에 있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시설물로 초소나 군사 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포루 아래 성벽 여장(담장)에는 여러 개의 총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화성의 5개 포루 중 북서쪽에 위치한 북서포루는 검정벽돌을 쌓아 치성과 같이 성 밖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하였으며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 화성의 북문 장안문(長安門)

   북서적대를 지나면 장안문이다. 장안문은 화성華城의 북문이면서 정문에 해당된다. 문의 이름이 장안문이니 문을 들어서면 장안이라는 뜻이겠다. 장안은 수도(首都)라는 뜻으로도 쓰였듯이 서울의 다른 일컬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누문(重層樓門)으로 조선 후기 정조 때 건립되었다. 홍예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에 원형의 옹성(甕城)을 갖추었으며, 누각은 다포식(多包式)의 화려한 공포를 짜고 우진각의 기와지붕을 덮었다.
  벽면에는 판문을 달아 짐승 얼굴과 태극을 그려 넣었고, 홍예 위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한 오성지(五星池)가 만들어져 있다. 문의 좌우로는 성벽이 이어지며, 문에서 53보(步) 되는 곳에, 적을 좌우에서 살피고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적대(敵臺)가 각각 마련되어 있다.

   장안문의 규모나 구조는 남대문과 비슷하지만, 성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실학파 학자들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이루어진 옹성·적대와 같은 방어용 시설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조선의 건축술을 대표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1920년대 도시계획사업으로 문 좌우의 성벽이 헐리고, 6·25 때는 폭격으로 누각이 소실되었다가 1978년 문루는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수도인 한양에서 화성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의 장안문은 이름에 걸맞게 그 위용이 자못 당당하다. 화강석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커다란 무지개 문을 만들었고, 왕의 가마가 지나갈 수 있는 충분한 너비와 일반 수레가 서로 비껴 갈 수 있을 만큼의 넓이를 확보하였다. 이는 서울의 숭례문(남대문)과 비슷한 크기와 너비로서, 숭례문이 장안문의 건설에 본보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 북동적대(敵臺)와 북동포루(砲樓)

 

   북동적대는 장안문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적대와 기능 및 형태가 거의 같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로써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적대는 성곽보다 높게 지어져 적의 접근을 감시하고 총안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장안문 좌우로 북동적대, 북서적대가 있다.

   포루는 전돌을 쌓은 벽과 3층으로 이루어진 내부가 있으며 벽면에는 현안(懸眼)을 뚫었다. 화성에는 북서포루(北西砲樓), 동포루(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남포루(南砲樓)가 있는데, 북서포루는 북서쪽에 있다.

 

 

 

* 화홍문(華虹門, 북수문)

   화성에는 수원천이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으며 성의 연결되는 부분에는 수문을 설치하였다. 북쪽에 있는 수문은 화홍문(북수문)으로 정조 19년(1795년)에 완성되었으나 1922년 7월 대홍수로 파손된 후 1932년 5월 9일 복원하였다.

   이 문은 아름다운 7개의 무지개 홍예 돌다리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의 누각으로 건축되었고, 홍예다리 위에는 빗물이 배수되도록 7개의 누조를 만들었다. 

   담장은 벽돌로 쌓았으며 타구를 만들지 않고 네모 모양의 대포구멍 8개를 만들었고 다시 그 위에 평 담장을 만들어 소포구멍 4개를 내었다. 수문 위로는 돌로 다리를 깔고 그 위에 누각을 세워 화홍문이라 하였다. 문루는 정면에 기둥 4개 측면에 기둥 3개이고 바깥쪽은 관문에 귀면을 그렸으며 이 문은 평소에는 성곽의 일부이자 교량으로 설계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시내를 관통하는 수원천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길을 조정하는 구실도 하였다.

  7개의 수문을 통하여 맑은 물이 넘쳐흘러 물보라를 일으켜 현란한 무지개가 화홍문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하여 이 모습을 화홍관장(華虹觀張)이라 하여 수원8경 중의 하나로 꼽는다. 한편 성의 남쪽에는 9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진 남수문이 있었으나 오래 전 수해로 유실되고 현재는 없다.

 


*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화홍문 동쪽에는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 있다. 방화수류정이란 '꽃을 찾고 버들을 쫓는 정자'라는 뜻으로 각루의 기능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곳의 원래 이름이 동북각루로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절벽아래의 용연(龍蓮)과 함께 경치 또한 좋은 곳으로 휴식처일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적의 동태를 살피는 감시하기 적합한 곳이다.

   방화수류정은 기존목조건축의 구조를 살리면서 벽돌을 조화롭게 혼용하여 새로운 조형을 창출한 벽돌과 목조구조가 결합된 대표적인 예이다.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보는 용연 위에 비친 달빛과 어우러지는 버들가지는 용지대월이라 하여 수원8경 가운데 으뜸이다.

 


* 동북포루(각건대, 角巾臺)

  방화수류정에서 동쪽으로 북암문을 지나면 각건대(동북포루)에 이른다. 높은 지대 위에 세워진 이 포루의 치성(雉城)은 성곽 밖으로 5.6m나 돌출되어 있으며, 그 외면의 넓이는 7.27m이다. 이 곳에는 현안 하나를 뚫고, 그 위에 5량으로 집을 짓고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전체 높이는 3.93m이고 아래 위에 방안 19개 누혈 11개를 뚫었고, 누의 사면에는 판문을 좌·우에는 사안(射眼)을 그리고 내면에는 벽돌조계단을 설치하였다. 이 동북포루는  건물 모양이 춤추는 아이의 머리에 수건을 돌려 맨 모습과 같다하여 일명 각건대라 한다.


* 동장대(東將臺, 연무대)
  

 

  동북포루에서 동암문을 지나면 동장대(연무대)에 이른다. 수원성의 군사시설 중 가장 위용이 있고 군사지휘소의 으뜸이 되는 곳이다. 평상시 군사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장대이다. 경사진 지면을 3단으로 나누어 대를 쌓고 제일 높은 대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전각이다. 

  건물바닥은 한 칸씩 뒤로 가면서 높아지도록 하였는데 제일 앞 칸은 전돌을 깐 바닥이고 가운데 칸은 마루를 깔았다. 제일 뒤쪽 칸 역시 마루인데 주변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현재 동장대 앞은 수원시내의 대표적인 활터로 쓰이고 있다.

 

 

*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및 동북노대

  서북공심돈이 사각의 탑 모양으로 축조되었는데, 동북공심돈은 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 가운데 하나로 벽돌로 둥그렇게 돈대를 쌓았다. 규모는 높이 6.81m, 지름은 남북 10.5m, 동서 12m, 전돌 두께는 10.5m, 내원과 외원 사이에는 1.2m의 공간을 비워두었다.

   내부에 나선형의 계단을 설치하여 일명 소라각이라고도 한다. 바깥쪽으로는 위로 26개, 아래로 14개의 총안을 만들어, 빛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겸하게 하였다. 평평한 여장을 둘러 위·아래에 포혈 23개와 누혈 6개를 놓았다. 아래층 내측에는 전돌로 작은 홍예를 만들었다. 

   또한 건물 제일 아래쪽에는 온돌방을 만들어 군사들이 숙직(宿直)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북공심돈은 서북공심돈이 치성위에 설치된 것과 달리 성벽 안쪽에 설치되어 있으며, 원통형이다. 또한 내부에 나선형 계단을 설치하여 곳곳에서 군사들이 머물면서 적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남공심돈은 복원되지 않았다. 

   동장대에서 조금 동쪽으로 동북노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창룡문.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쇠뇌를 쏘던 방어시설이다. 성벽에 돌출한 타원형 치성 위에 전돌을 쌓아 네모꼴로 각을 져 만들었는데 안쪽 넓이 5.27m, 바깥쪽 넓이 5.76m로 성밖까지 길게 물리고 그 위에 둥근 여장을 두르고 현안 2개를 뚫었다. 동북노대는 서노대가 성벽 안쪽에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치성(雉城) 위에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 화성의 동문이 창룡문(蒼龍門) 

 

  창룡문은 수원화성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이문의 규모 및 구조는 화서문과 거의 같다. 이 문의 구조는 홍예가 각기 규모를 달리하는 내외 이중 홍예로 구축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인데 내홍예는 높이 4.8m 넓이 4.2m이고, 외홍예는 높이 4.5m 넓이 3.6m이며 내외 홍예의 두께는 9.1m로서 장안문보다 규모가 크다.

   문루는 내외 3포에 이익공의 건축물로 정면이 4.9m이며, 좌우에 협문이 있고, 수문청은 문안의 북쪽에 있다. 한편 이 창룡문은 문의 외성으로 동옹성이 있으며 이것은 한쪽이 열려 있는 구조를 취하였는데, 높이 2.9m에 둘레는 17.2m 이다. 여기에는 누조 4개와 현안 3개가 설치되어 있고, 여장은 4첩인데 여기에는 총안이 14개나 있다. 그리고 이 옹성 위에는 회다짐을 하고 남쪽 끝에 계단을 내어, 주성으로 통할 수 있다.  

 


* 봉돈(烽墩)

   성곽 길은 창룡문에서부터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동포루, 동1포루를 지나 봉돈에 이른다. 봉돈은 동이포루와 동삼치의 사이에 있는 시설물로서, 파수를 설치하여 정찰과 정보 전담의 임무를 수행하던 곳으로 육지로는 용인의 석성산 육봉과 연락하고 바다로는 흥천대의 해봉과 연락하였다. 

  수원화성의 봉돈은 그 규모와 외관이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고 아름답게 축조되었으며, 5개의 화두가 있다. 이곳은 성곽 높이보다 훨씬 높게 쌓아 올려졌고, 성곽 밖으로 5.5m나 돌출되었다. 외면은 5단 석축이며, 성벽은 전체 높이의 4.5m에 넓이는 16m이다.

   이곳에는 현안 2개 화두 5개 총안 18개 누혈 1개를 설치하였다. 저녁마다 남쪽의 첫째 구멍에서 횃불 하나를 들면 동쪽으로 용인 석성산 육봉에서 봉화로 응하고 서쪽으로는 흥천대의 해봉과 연락했다. 이 밖의 네 구멍은 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지 못하도록 했다.

 

  

*2포루 및 동남각루

   동이포루(東二鋪樓)는 봉돈의 남쪽 125m 거리에 위치한 동이포루는 여담이 성 밖으로 6.06m 나왔고 외면의 너비 는 5.76m인데 현안 1개를 내었으며 뒤에 장포를 지었다. 다듬세는 동일포루와 같은데 포의 길이는2간이며 한 칸에는 판자를 깔았고 또 한 칸에는 사닥다리를 설치하였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높은 마루식 목조건물인데,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동남쪽 성벽이 꺾이는 산중턱 돌출부 모퉁이의 남수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성 안팎으로 시야가 넓어 멀리 남쪽 평야가 모두 보이는 요지이며 경관도 좋다. 건물구조는 장방형 도리에 홑처마 우진각지붕과 5량 4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와 높이·너비가 서북각루와 같다. 동남각루를 보고 계단을 내려오면 화성 성곽을 둘러보는 일이 끝난다.

   화성은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남문인 팔달문에서 시작한 성곽 순례는 서장대, 서문, 북문, 동문을 거쳐 다시 제 자라로 돌아오기까지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화성행궁

  화성행궁은 화성축조가 완공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576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 되었다. 그 가운데는 이미 정조 13년에 건립된 부분 중 150여 칸을 활용하고, 거기에 더하여 새로 약 420여 칸을 증축한 것이었다. 

  
  즉 화성행궁은 신읍치를 처음 옮기던 정조 13년 9월에 행궁을 비롯하여 부속건물을 신축한 이래 정조 14년 5월 정당(正堂)·내아·득중정·진남루 등이 증축되고, 정조 18년 성역이 시작되어 정조 20년 완공되기까지 계속하여 행궁과 부속관아를 대폭 증축 또는 신축하여 총 576칸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행궁은 평상시에는 외관인 수원부사(뒤에 유수)가 집무하는 지방행정의 관아로 사용하다가 왕의 원행시에는 왕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1801) 행궁 곁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는데, 그 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서울 경복궁(景福宮) 다음의 부궁이라 할 정도로 다른 지방의 행궁보다 그 규모나 건축구조·기능면에서 단연 뛰어나고 웅장하게 건축된 것이 특징이다.

   신풍루, 봉수당, 미로한정, 남·북군영, 서리청, 비장청, 외정리소, 유여택, 경룡관, 장락당, 복내당, 집가청, 낙남헌 득중정 등과 행각 등 33개 동의 건물이 있어 궁전 형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 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화령전(華寧殿)   

   화령전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행궁 옆에 있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을 비롯해 팔달산을 둘러싼 시설 가운데 가장 높은 서장대, 화포를 감춰두고 적군에게 총을 쏘도록 축조된 남포루, 선조들의 정취가 가득한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방화수류정 등 200년 전 건물엔 조선의 문화 향기가 가득하다. 그래서 화성은 1997년 12월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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