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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메밀꽃 필 무렵엔 이효석을 찾아 봉평으로 가자

by 혜강(惠江) 2006. 7. 12.

 

봉평 문학기행

 

메밀 꽃 필 무렵엔 봉평으로 가자

-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의 문학적 향기를 찾아  -

 

 

글·사진 남상학


 

 

 

  
  메밀꽃이 폈드라 / 새하얗드라
여름내 흰구름이  / 엉덩이 까 내리고 / 뒷물하던 자리
바람의 칼날에 몰려 / 벼랑 끝에 메밀꽃이 / 울고 있드라                                
끝내 아무도 없드라 / 메밀꽃은 대낮에도 / 달밤이드라.
 - 나태주의 ‘메밀꽃이 폈드라’ 전문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메밀꽃 필 무렵」중에서 -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인 분위기 속을 걸어가는 세 사람의 장돌뱅이의 형상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우리 문학의 명장면일 것이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달밤을 상상한다는 것은 행복하다. 달밤은 아니지만 이 길은 당나귀를 앞세우고 허생원, 조선달, 동이가 다음 장터를 행해 이동하던 길을 나는 지금 이 달밤 같은 눈부신 대낮에 자동차로 달리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이효석의 고향을 설레임으로 찾아간다는 것. 이 어이 큰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이효석과 평창(봉평) 


   1907년 2월 23일 평창군 봉평면 창동에서 이시후(李始厚)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한국문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 1907~1942년)선생이 태어나 자란 강원도 평창군 봉평은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무대이기도 하여, 해마다 9월이 오면 소금을 뿌린 듯 하얗게 핀 메밀꽃이 보기만 해도 숨이 차오를 듯 문학적 정감에 젖게 한다. 특히 곳곳에 그의 생가와 각종 기념물이 산재되어 있어 봉평면 일대는 이효석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강릉방면 평창군을 지나면 영동 제1터널을 지나 곧바로 오른쪽에 차량 대피소가 있는데 이곳부터 가산의 체취를 느낄 수가 있다. 1980년에 세운 이효석 문학비가 여기에 있고, 이곳에서 약 10분 정도를 달리면 장평 나들목이 나온다. 나들목을 오른쪽으로 돌아 봉평으로 가는 6번 도로로 들어서면 평창으로 가는 31번 국도와 갈라지는 장평 삼거리. 한 길은 봉평으로 가는 길, 한 길은 강릉, 한 길은 평창으로 가는 길이다. 장평에서 대화까지는 30리, 하장평, 재산리, 산지재(고개이름)를 넘어 신리, 상대화리, 대화로 이어지는 길이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된다. 봉평-장평-대화에 이르는 팔십 리 길은 소설 속으로 한껏 빠져들게 된다.

  봉평으로 가는 길은 20리 길로, 노루목고개(‘메밀꽃 필 무렵’ 작품 속에 나오는 고개)를 넘게 되면 한적하고 운치 있는 길이 열리고, 길 옆 왼쪽에는 흥정천이 흘러 소설 속에 허생원이 물에 빠져 동이에게 업혀가는 일명 봉평천의 냇물이 흐른다.  작은 면소재지인 봉평 입구에 이르면 「메밀꽃 필 무렵」의 비석이 서 있고 택시 승차장 서쪽으로 나있는 골목길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봉평중학교가 나온다. 

 

 

 

 


   그 맞은편은 1991년 10월 당시 문화부가 이효석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학공원을 조성하여 이효석에 호를 따서 가산공원(可山公園)이라 하였다. 1,300평 부지 위에 가산의 동상과 문학비등 조형  광장과 주변에 벤치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이효석의 흉상과 문학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에는 “효석의 인생은 짧았다. 그렇지만 그 짧은 인생 속에서 그가 남긴 문학은 1930년대 순수문단을 빛내는 가장 정교한 기념탑이었다. 비록 일제 말기 우리 민족의 슬픈 현실에 몸을 담지 않은 피안의 문학이요 귀족의 문학이기는 했지만, 그 요염한 비너스의 나상은 순수예술로서 거의 흠잡을 데가 없었다.”라고 쓰여 있다. 공원 뒤쪽에는 장돌뱅이들의 지친 여정을 풀어주던 초가로 된 주막 충주집 등이 재현해 놓았다.

 

 

 

 

마을 입구에서 만나는 물레방앗간과 메밀밭 


   여기에서 냇가에 놓인 남안교(그 당시엔 섶다리)를 건너면 온통 메밀밭이다. "역시 이효석의 마을이구나" 할 정도로 문학적 향취가 배어나온다.  다리 건너 산자락 아래에는 소설 속에 나오는 성서방네 처녀와 허생원이 하룻밤의 짧은 사랑을 나누면서 무섭고도 기막힌 밤으로 지새운 물레방앗간을 만날 수 있다 .복원된 방앗간 앞 공터에 세워놓은 문학비에는 소설의 한 대목을 옮겨놓아 방문객들로 하여금 소설 속에 빠져들게 한다.


  『장이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걸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에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일세.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팔자에 있었나부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 구절 때문에 많이도 설레었던 기억이 있다. 그 아련한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메밀밭과 물레방앗간을 그의 고향이자 그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고장 봉평에서 만난다는 것은 한 마디로 감동적이다. 물레방앗간에서 좌우로 보면 안개꽃보다 더 예쁜 메밀꽃이 가을햇살 속에 눈부시게 펼쳐져 숨이 막힐 지경의 장관을 이룬다.

 


허름하게 방치된 이효석 생가(生家) 


   이효석은 여기에서 길을 따라 5리쯤 따라가면 야트막한 산언덕, 이곳(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마을의 중간쯤 되는 우경산 밑에서 1907년 2월23일 태어났다. 뒷산은 둥그스럼하게 치달린 산으로서 산세가 우악하게 생겨 주변경관을 맑게 한다.

  이 산 좌편으로 폭 약80m, 길이 약 900m로 흘러내린 경사진 밭이 완만하게 놓여있다. 생가 앞으로는 비옥한 전답이 펼쳐져 있다. 생가 뒤편 언덕에는 밤나무 몇 그루, 돌배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앞마당에는 물푸레나무와 단풍나무가 각 한 그루씩 서 있다. 말하자면 이 생가는 전형적인 산촌의 반가라 할 수 있어서 운치가 잘 어울리는 집이다. 이 집에서 효석은 산촌의 자연을 뼈마디에 새기며 8세에 이르렀다.

  14년 8세 때 외학을 하게 되어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평창에서는 하숙을 하였는데 봉평집에 다니곤 했다. 이때의 교통수단은 우마차 아니면 도보가 고작이어서 그는 그 길을 거의 걸어서 다녔다. 그 길은 집에서 나와 남안리 마을을 거쳐 봉평천(흥정천)에 다다르고 여기에서는 좌편 강변에 있는 동리 물레방아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은 봉평천 징검다리를 건너 봉평의 성황당을 지나면서 봉평의 본 마을 창동리에 들어와 상가와 주점, 즉 봉평장터 걸리를 뚫고 시내를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중 충주집(훗날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 속에 나오는 주점)이란 주점도 지나왔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에는 봉평면을 작품의 배경이나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 「메밀꽃 필 무렵」을 비롯하여「산협(山峽)」,「개살구」,「고사리」,「들」,「산」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메밀꽃 필 무렵」과 「산협」, 「개살구」에는 '봉평' 및 부근의 지명이 실명으로 명시되어 있어 고향의 모습과 고향에 대한 그의 애착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8평 정도의 목조 건물로 된 이효석의 생가가 지붕만 바뀌었을 뿐 옛집 그대로 낡은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마당에는 외양간도 있고, 각종 농기구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생가는 현재 마을 주민이 이효석의 부친으로부터 매입하여 생가 주변에 건물을 짓고 음식점과 기념품점 영업을 하다 보니 생가가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무척 안타깝다. 군(郡)에서 봉평을 이효석의 마을로 꾸미면서 생가를 구입하고자 했으나 주인이 거절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생가를 새롭게 복원하기 위하여 생가 아래쪽에 땅을 구입하여 놓은 상태라고 한다.

 

 

 

효석의 문학적 향취를 찾아 - 이효석 문학관

  생가를 보고 돌아 나오는 길에 이효석의 문학세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이효석 문학관( 033-330-2700 )을 둘러보자.  이효석문학관은 2002년 9월 7일 개관한 것으로, 봉평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의 문학적 향취를 느껴볼 수 있도록 다양하게 꾸몄는데, 가산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볼 수 있는 이효석 문학전시실과 다양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문학교실, 학예연구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효석 문학전시실은 그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으며, 재현한 창작실, 옛 봉평 장터 모형, 문학과 생애를 다룬 영상물, 어린이용 영상물 등을 통해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도록 준비하였다. 특히, 이 전시실에는 유품과 초간본 책, 이효석의 작품이 발표된 잡지와 신문 등을 전시하여 이효석의 문학과 생애를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문학교실에서는 다양한 영상물을 시청할 수 있고 문예행사도 볼 수 있으며, 학예연구실에는 이효석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준비하여 그의 문학세계를 깊이 연구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문학 정원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학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이효석문학관과 봉평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봉평에는 가산문학선양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문학관뿐만 아니라 주변을 효석의 생애와 작품과 관련된 장소를 보존, 단장하고 메밀을 심고 키우는 작업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외에도 문학관 홈페이지 관리, 전시회 기획, 이효석 창작교실, 문학교실, 개관 기념 콘서트 등을 기획한다. 특히 2007년 이효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과 행사를 위해 노력 중이다. 

   이 같은 노력 때문인지 전국적으로 이효석문학관의 지명도는 매우 높고 또 자랑할 만하다. 지난해 유료관람객 수만 6만 명을 넘어섰고 관람료도 1억원을 돌파했다. 관람객 수는 매년 30%씩 증가하는 추세다. 문학관의 뛰어난 조형미와 풍부한 자료가 관람객의 호평을 받는 이유다.

 

 




이효석의 생애와 작품 활동

 

  이효석은 1907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에서 출생하여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 고보 재학시에는 유진오(兪鎭午) 와 더불어 ‘꼬마 수재’라는 별명을 들었고, 영문과 재학 중에 자유노동자의 생활을 그린 「도시(都市)와 유령(幽靈)」(『朝鮮之光』, 1928. 7)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 이효석의 주요 이력 및 작품 *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1번지에서 출생. 이시후와 강경홍의 1남 3녀 중 장남, 아호는 가산, 필명으로 아세아(亞細亞), 효석(曉晳) 등을 쓰기도 함
1910년(4세) : 부친을 따라 서울로 이주
1912년(6세) : 봉평으로 내려와 서당을 다님
1914년(8세) : 평창공립보통학교 입학
1920년(14세): 평창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
1925년(19세):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우등으로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 꽁트 「여인(旅人)」등을 발표하기 시작함
1926년(20세): 꽁트「달의 파란 웃음」등 발표, 시 「겨울시장」, 「야시(夜市)」등 발표
1927년(21세): 대학 예과 수료 후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 진학. 시 「6월의 아침」, 「님이여 어디로」, 단편 「주리면… - 어떤 생활의 단편」, 번역소설 「밀항자」발표
1928년(22세):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함. 1929년(23세): 단편 「기우(奇遇)」, 「행진곡」 등 발표. 시나리오 「화륜(火輪)」발표.
1930년(24세): 경성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단편 「깨뜨려진 홍등(紅燈)」, 「마작철학(麻雀哲學)」약령기(弱齡記)」등 발표.
1931년(25세): 함경북도 경성(鏡城)출신 이경원(李敬媛)과 결혼. 일본인 은사인 쿠사부까 조오지의 소개로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취직하나 이내 그만 둠. 단편「노령근해(露領近海)」「프레류드」등 발표. 시나리오「출범시대」발표, 첫 창작집 『노령근해(露領近海)』발간 (동지사<同志社> 1931년), 1932년(26세): 함경북도 경성(鏡城)으로 이주. 경성농업학교에 영어교사로 취직. 장녀 나미(奈美) 출생, 단편「북국점경(北國點景)」,「오리온과 능금」등 발표
1933년(27세): 김기림(金起林), 이종명(李鍾鳴), 김유영(金幽影), 유치진(柳致眞), 조용만(趙容萬), 이태준(李泰俊), 정지용(鄭芝溶), 이무영(李無影) 등과 구인회 결성. 단편「돈(豚)」발표, 미완성 장편 「주리야」연재, 산문 「단상(斷想)의 가을」「"리-알"·꿈」등 발표
1934년(28세): 단편「일기(日記)」,「마음의 의장(意匠)」과 산문「낭만·리얼 중간의 길」등 발표
1935년(29세): 차녀 유미(溜美) 출생. 단편「계절(季節)」, 중편「성화(聖畵), 산문「卽實主義의 길로 - 民族文學이냐 階級文學이냐」 등 발표
1936년(30세): 숭실전문학교 교수 취임. 평양 창전리 48번지로 이사. 단편「인간산문」,「모밀꽃 필 무렵」등 발표.
1937년(31세): 장남 우현(寓鉉) 출생. 단편「삽화」, 「개살구」, 「거리의 목가」 등 발표.
1938년(32세): 숭실전문학교 폐교에 따라 교수직 퇴임. 단편「장미 병들다」, 「부록」 등 발표
1939년(33세): 차남 영주 출생.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취임. 단편「산정」, 「향수」등 발표. 희곡「역사(歷史)」, 산문 「문운융성(文運融盛)의 변(辨)」 등 발표, 단편집『해바라기』(학예사(學藝社)), 작품집 『성화』(삼문사), 장편『화분』(인문사) 발간.
1940년(34세): 부인 이경원과 사별. 장편 『창공(蒼空)』연재, 단편「은은한 빛」,「하르빈(哈爾濱)」 등 발표
1941년(35세): 단편 「라오코윈의 후예(後裔)」, 「엉겅퀴의 章」 등 발표, 단편집 『이효석 단편선』(박문서관), 장편『벽공무한』(박문서관) 출간
1942년(36세): 결핵성 뇌막염으로 5월 25일 별세. 평창군 진부면 논골에 안장, 단편 「일요일」,「풀잎, 산문「문학과 국민성」등 발표
1943년: 작품집 『황제』(박문서관) 발간
1960년: 춘조사에서 『효석전집』(전 5권) 발간
1973년: 문화의 날에 금관문화훈장 추서. 영동고속도로 개설로 묘소가 용평면 장평리로 이장됨
1983년: 창미사에서 『이효석전집』(전8권) 발간
1998년: 영동고속도로 확장공사로 묘소가 파주로 이장됨
2002년: 《이효석문학관》개관

 

 

 

 

  그 중 중요기간의 작품 활동을 시기별 단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데뷔 초기에는 동반작가로서 현실 고발의 리얼리즘적인 경향을 보였으나 1933년 「돈(豚)」 이후부터는 시적, 서정적 경지의 토착적 자연주의와 탐미적 관능주의의 경향을 보여 30년대 우리나라 낭만주의 문학의 최고봉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효석의 왕성한 작품 활동은 1942년 36세로 별세하기까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수백여 편의 작품을 내어 놓았고 그의 뛰어난 감수성과 천재적인 표현기법은 완벽한 서정성을 구현해 냈다. 이효석은 여행을 통해 접해지는 자연과 사람을 그의 작품 속에 절묘하게 접목시켰고, 꽃을 사랑하고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그의 감성은 그의 작품을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하고 유려하게 표현하는데 기여했다.

 

 

<동반작가(同伴作家) 시절의 작품들>

   1929년 「조선문예」에 '기우(奇遇)', '행진곡(行進曲)'을 발표하고, 1931년 함북 경성 출신으로 나진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이경원(李敬媛)과 결혼하고, 처가가 있는 경성으로 낙향하여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근무하다가 경성농업학교 교편을 잡았다. 「도시와 유령」, 「행진곡」(1929)은 선전 선동성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당시의 정치적 지배 이념이었던 사회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그는 동반자적 경향을 띄었다.

  이처럼 그의 초기 작품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파 헤져 프롤레타리아적인 경향으로 인해 유진오, 이무영, 채만식, 조벽암, 엄흥섭, 홍효민, 박화성 등과 더불어 동반작가(同伴作家)로 인정되었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1931년 첫 창작집인 『노령근해』를 발간함으로서 자신의 문학적 지향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후기 작품은 현실적 관심에서 떠나 관능적, 성적(性的) 인간 본능의 폭로가 시작된다. 곧 단편 「돈(豚)」(1933), 「수닭」 이후부터 좌익문학의 퇴조와 더불어 종래의 경향파 문학의 요소를 깨끗이 씻고, 그의 본령인 순수문학으로 전향했다.


<시적 경지의 순수문학의 세계로>

  한편 1933년 중견급 작가 9명이 계급주의 및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순수문학 표방하며 결성한 9인회(九人會)에 참여함으로써 문학에 있어 이념적인 편향성을 지양하고 본격적으로 순수문학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9인회 결성의 주역은 이효석을 비롯하여 김기림(金起林), 이종명(李鍾鳴), 김유영, 유치진(柳致眞), 조용만(趙容萬), 이태준(李泰俊), 정지용(鄭芝溶), 이무영(李無影) 등이었다. 이들은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자연 속에 포함된 순박한 인간성을 그렸다.

  이 무렵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교수(1934)로 전임하였고, 단편 「성수부(聖樹賦)」「성화(聖畵)」「분녀(粉女)」「산」「들」「석류(石榴)」그리고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소설로 평가되는 「메밀꽃 필 무렵」(『朝光』, 1936. 10)을 발표하였다. 이때의 작품들은 성(性)묘사의 욕정소설과 자연적 토착세계의 리리시즘을 표현한 수작들로 그 명성을 떨쳤다.    그 외에도「개살구」,「장미 병들다 「해바라기」,「황제」 등의 단편과 장편소설로 「화분(花粉)」,「벽공무한(碧空無限)」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섬세한 감각의 예술가로 소설을 시적 경계로 까지 끌어올린 가산 이효석, 그는 실로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대표적 소설가였다.

  그는 외유내강의 성격으로 옷차림도 스마트했고, 두주급(斗酒級)의 주량에 구두도 칠피단화(漆皮短靴)에 여자구두 모양의 장식이 있는 것을 즐겨 신고 다닌 댄디스트였다고 한다.

 

 


<이효석의 방황과 아까운 죽음> 


  이런 이효석이 1940년까지 절정을 이루다가 1940년 아내와 아이마저 잃게 되자 실의에 빠져 만주 등지를 방황하다 1942년 뇌막염으로 언어 불능과 의식불명 상태에서 마침내 36세에 요절(夭折)하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유해는 엄친에 의하여 당시 부모가 사시던 곳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고등골에 안장되었으나 그 후 용평면 장평리 영동고속도로변 산록으로 묘소를 이장 하였다가 다시 1998년 9월 9일 묘소가 경기도 파주시 동화 경모묘지공원으로 이장되었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언제 되찾을지 모르는 조국의 광복을 열망하면서 실향의식을 지닌 채 보헤미안처럼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어 했던 심약한 젊은 지성의 고민은 한 때는 총독부 직원이었다는 것과 또 한 때는 동반작가였다는 모순을 끌어안고 몸부림쳤을까?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는 자조와 한탄은 결국 이효석에게 병마로 다가갔고,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동반작가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문학의 명단에 이효석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실시한, 최근 민족문학작가회의 및 계간 《실천문학》등에서 공동으로 조사해서 2002년8월에 발표한 소위‘친일문학인 42명 명단’에도 그 이름이 없다. 마흔 두 명의 이름 속에는 최남선과 이광수 이외에도 주요한, 김동환, 박영희, 김기진, 백철, 채만식, 유치진, 서정주 등 당대의 주요 작가들의 이름이 거의 망라되어 있는데, 이효석이 이 대열에 끼어 있지 않다.

  "식민주의와 파시즘 옹호"라는 친일 여부 판단 기준에 그가 미달한다고 판단된 때문인지 아니면 동반자 작가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당대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에는 그가 너무 소심했기 때문인지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를 아끼는 우리들로서는 이런 시비에 휩쓸리지 않고 있는 그의 작가 정신에 더욱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은 것이다.

 


대표작「메밀꽃 필 무렵」에 대하여  

   한국 현대 단편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메밀꽃 필 무렵」은  만남과 헤어짐, 그리움, 떠돌이의 애수 등이 아름다운 자연과 융화되어 미학적인 세계로 승화된 단편소설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사회의식을 지양하고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의 강원도 산촌을 배경으로 부자(父子)의 기연(奇緣)을 시적, 서정적 필치로 묘사한 주옥같은 작품으로 인간의 순박한 본성을 그려내는 주제의식과 달밤의 메밀밭을 묘사한 시적인 문체가 뛰어나 우리 문학의 수준을 한층 더 높이는데 기여한 작품이다. 다음은 작품 줄거리를 요약이다.


- 왼손잡이요, 얼금뱅이인 허생원을 비롯하여 조선달, 동이의 셋은 봉평, 대화 등의 장터로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다. 봉평장이 서던 날, 허생원은 조선달을 따라 충주집에 갔다. 동이가 충주집과 농탕치는 것에 화가 나서 뺨을 때려 쫓는다. 그러나 그날 밤 그들 셋은 달빛을 받으며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을 걸어갔다. 허생원은 젊었을 때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 물방앗간에서 우연히 울고 있는 성서방네의 딸과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어 밤을 같이 한 일이 한번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동이도 자기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의부(義父) 밑에서 고생을 하다가 집을 뛰쳐나왔다고 말한다. 늙은 허생원은 냇물을 건너다 빠져 동이의 등에 업혀야 했다. 허생원은 자기와 똑같이 왼손잡이인 동이를 보고 직감적으로 자기의 아들임을 알았다. 그들은 동이의 어머니가 있다는 제천으로 향했다. -  『世界文藝大辭典』(成文閣)에서 -

 

 



    주인공 허생원은 장돌뱅이자 얼금뱅이, 왼손잡이로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삶을 상징한다. 또 동이는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의 인연으로 태어난 아들로 암시되는 인물이며, 진솔한 마음을 가진 순박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조선달은 허생원과 같이 떠돌아다니는 삶을 사나 정착하여 살고자 하는 꿈을 가진 인물이다. 당나귀는 이성에 대한 허생원의 욕구와 순탄하지 못했던 허생원의 삶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동물이다.

  이들은 강원도의 자연을 배경으로, 짙은 향토색,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산골의 하얀 메밀꽃의 생생한 정경은 이 작품을 성공으로 이끄는 배경이 된다. 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적 본능과 나귀와 같은 동물이 가지고 있는 성적 본능을 동렬(同列)에 두고 그린 애욕(愛慾)의 미화 등은 이 작품이 낭만적 우수성을 획득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이것은 인간에 내재해 있는 원시적인 건강함과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 시도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메밀꽃 필 무렵」으로 대표되는 이효석의 문학은 경향적인 문학에서 인간의 순수한 원초적인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인간과 동물, 더 나아가서는 자연 공간과 식물까지 동화되는 시적 세계를 구축하려고 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문학사적으로 이효석 문학이 남다르게 획득한 소설의 미학(美學)이요, 이런 점에서 한국 소설사상 수작(秀作)의 하나로 평가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해마다 9월에 열리는 효석문학제 

   1998년에 효석의 유족들은 지역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효석 묘를 파주로 이장하였지만, 메밀꽃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에 맞춰 봉평에서는 효석문화제가 열린다. 그래서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 무대인 봉평은 꾸준히 문학기행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가산 선생의 문학적 열정을 기리고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백미인「메밀꽃 필 무렵」의 시간적 공간적 재현을 통하여 가식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효석문학제에서는 문학 심포지엄, 문학교실 운영, 이효석문학관 소식지 발간, 전시회 등이 열리고, 축제기간에는 공원 앞 냇가에 30년대의 모습 그대로 봉평 장터를 꾸며 놓아 장돌뱅이 체험에 빠져들게 한다.  허생원과 수작을 부리던 활머리를 얹은 충주댁은 없어도 옛 맛을 그대로 간직한 막국수나 배추전을 내놓는 주막은 들어선다.  메밀전병이나 수수부침 같은 강원도 토종 음식도 맛볼 수 있다. 거리에선 민속놀이패들이 흥겨운 놀이마당을 펼친다. 팽이치기, 칠교놀이, 자치기, 비석치기 등 도회지에서 사라진 옛 놀이도 직접 해볼 수 있다.  

  참 재미는 작품 배경지를 직접 찾아보는 프로그램. 축제기간 동안 안내자와 함께 여울목~노루목고개~문학비~유품전시장~충주집~가산공원~물레방아~생가를 둘러보게 된다. 옛날 봉평의 모습은 전시회를 통하여 사진과 그림으로 만날 수도 있다.  또 작품「메밀꽃 필 무렵」을 연극으로도 볼 수 있다.  이밖에 불꽃놀이·문학의 밤·가장행렬 등의 행사가 준비돼 있다. 기왕이면 달이 가득 차 오른 날 봉평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흐뭇한 달빛 아래 메밀꽃밭을 거닐다 보면 누구에게나 숨 막히는 추억이 된다. 

 

   봉평에 오면, 또 가산의 자취 이외에도 장평에서 봉평으로 가는 길에 율곡 이이(李耳)를 회임했다는 판관대와 신사임당이 율곡선생을 잉태한 곳을 기리고 있는 봉산서재, 조선시대 명필 양사헌이 강릉부사와 고성부사 부임 전에 머물렀다는 팔석정이 있고, 봉평을 지나 무이교에 못 미쳐 오른쪽 샛길을 따라 2.5KM를 가면 흥정천변에 향기 있는 식물로 가득 찬 「허브나라」 농원이 있다. 흥정천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흥정산(1,277M)에서 발원한 오지의 계곡 음지동과 유동계곡이 합수점에서 갈라진다. 봉평에 온 김에 두루두루 둘러볼 만한 곳들이다.

 

 

 


봉평의 독특한 먹거리

   봉평의 먹거리는 단연 메밀국수이다. 흐드러진 메밀밭을 뒤로하고 봉평 시장으로 가면 메밀로 만든 구수한 고향의 손맛을 느낄 수 있으며, 조금만 비켜서면 주위의 토속적인 향토 먹거리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환경에 오염되지 않은 정성된 음식들을 맛보는 것은 생활에 지친 여행객에겐 적지 않은 심신의 충전을 가져다준다. 

  봉평 읍내 현대 막국수( 033-3...)은 평창의 별미인 메밀막국수와 메밀부침을 잘한다. 그리고 고향막국수( 033-336-1211 ), 풀내음( 033-335-0034 ), 마가연( 033-33...)은 메밀국수 외에 메밀싹나물비빔밥, 메밀싹묵무침, 메밀전병, 메밀전 등을 내놓고 있어 푸짐한 인심과 함께 옛 장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또 이효석 문학관 주차장 건너편에 위치한 쌍둥이네 가벼슬( 033-336-0609 )은 곤드레밥을 잘하는 숨은 맛집이다.  평창의 특산물은 메밀꽃차, 메밀가루, 메밀국수, 메밀부침가루, 메밀베개, 대관령 황태, 평창한우, 감자술, 가시오가피, 장류(된장,고추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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