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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통영의 청마문학관(靑馬文學館) - 청마의 詩와 사랑

by 혜강(惠江) 2006. 5. 17.

                               

통영 문학기행 

 

통영의 청마문학관을 찾아서

- 청마의 詩와 사랑이 깃든 곳 -

 


·사진 남상학

 

 

 

 

  통영의 유난히도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자란 청마 유치환은 통영의 바다를 바라보며 이렇게 노래했다.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그림 같은 다도해 품에 안은 한국제일의 미항(美港) 통영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설렘이 있는 곳이다. 남망산 공원에서 바라보는 통영항의 모습은 한려수도 뱃길에 보석처럼 뿌려놓은 섬들과 아름다운 해안의 굴곡이 육지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나의 귓전을 쉼 없이 울림하고

   스쳐가는 바람이여
   창망히 하늘과 바다의 끝간 데 없음이여
   하염없이 닥아치는 파도여 
   - 그리움이여  

  옷자락처럼 네게로 네게로만 향하는

  그리움이여

   나는 눈을 감는다.
   나는 없다.
   아니다, 나만 있다. 
   아슬한 하늘 끝 파도소리

   바람소리 되어 나만이 있다.    

   구름 밖의 학의 울음 같다. 
   젓대소리 같다. 
   천지는 비고
   한가락 읊조림만이 남아 있어
   -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 <바닷가에서>  전문 

 

 

 


   통영 앞바다는 바다라기보다는 강 같기도 하고, 호수 같기도 하다. 5월의 통영 바다 앞에 서면 그 누구라도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됨 직하다. 이런 환경은 일찍부터 위대한 예술인들을 탄생시키는 좋은 토양이었다. 작곡가 윤이상씨도 통영의 바다를 보고 자랐으며, <김약국의 딸들>을 지은 소설가 박경리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시인으로는 김상옥, 김춘수 등이 이곳에서 자랐다. 그리고 한 가정에서 극작가 유치진(형)과 시인 유치환(동생)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망일봉 기슭에 세운 청마문학관



  통영시는 생명파 시인인 청마 유치환(1908~1967)이 즐겨 걸었던 중앙동 옛 문화유치원에서 통영우체국까지의 200여m를 이르는 거리를 청마거리로 만들었다. 통영이 낳은 청마(靑馬)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리라.  지금 청마거리엔 정운도 청마도 없지만 당시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 정운이 운영한 수예점은 우체국에서 바로 보이는 '뮤즈커피숍' 자리이고, 바로 옆 시민약국이 정운의 언니 부부가 운영하던 약방 '박애당' 건물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체국 창가에 서면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보이고 옛 수예점이었던 뮤즈커피숍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 청마거리에 있는 우체국 앞의 유치환 기념돌비에는 그의 시 <행복>이 새겨져 있다.  

 

  
  또 청마의 집필장이자 통영문화협회의 산실이었던 영산장과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가 운영하던 문화유치원이 있던 충무교회는 우체국에서 불과 50m 거리에 위치해 있고, 청마와 정운이 처음 만난 붉은색 벽돌건물 통영여중은 충무교회에서 200m 떨어져 지금은 통영문화원으로 변해 있다.  이 거리를 산책하며 청년 청마는 시를 구상했을 것이며,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띄우기 위해 우체국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청마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통영을 사랑했던 그의 시를 읽으며, 그의 애듯한 사랑을 떠올리며 걷는 길이다.


  한편 문예 통영의 기치를 걸고 4년여에 걸쳐 우리나라 문학관의 한 전범(典範)으로서 청마문학관을 완성하였다. 청마 유치환을 기리는 청마문학관(靑馬文學館)은 경남 통영시 정량동에 있다. 청마가리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그런데 처음 이곳을 찾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길이 만만치 않다. 자칫하면 복잡한 거리, 많은 차량 때문에 헤매기가 십상이다. 통영 바다의 아름다움, 청마시에 대한 애정으로 다소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몇 번을 물어서 힘들게 찾아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올려다 보니 표지판을 따라 높은 계단이 보이고 언덕 위에 청마문학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청마문학관은 청마 유치환(柳致環, 1908~1969) 선생의 문학정신을 보존·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00년 2월 14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망일봉(望日峰) 기슭 1,220평의 부지에 문학관(전시관)과 생가(본채, 아래채)를 복원·개관하였다. 호수같은 항구가 눈 앞에 열리고 건너편에 우뚝 솟은 미륵산이 공주섬을 안고 내려다 보는 서정적인 언덕이라 운치가 좋기로 그지없다.

 

 

 



  원래 청마 생가는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청마의 외가에서 출생)이지만, 도시의 발전으로 부지가 협소하여 제자리에 생가를 복원할 수 없어 부득이 지금의 장소에 옛날 생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개관하였다. 

  청마문학관은 크게 도입부와 세 개의 주제에 따라 꾸며졌다. 도입부에는 청마를 비롯한 통영출신 유명 예술인들의 예술혼을 접할 수 있도록 꾸몄다. 입구에 들어서면 시 <깃발>과 <그리움>의 시화 판넬 액자와 청마선생이 1945년 결성한 통영문화협회의 야유회 사진이 인상깊게 다가온다.

  첫 번째 주제인 「청마의 생애」코너에서는 청마의 생애를 연도별로 정리, 인간 유치환에 대해 심도 깊게 접근할 수 있도록 꾸몄다.  

 

 

 

▲ 청마 유치환의 인생 여정을 보여주는 사진들. 왼쪽부터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22년(14세), 결혼 직후인 1930년(22세), 권재순과 결혼하던 1929년(21세), 경주고 교장이던 1958년(50세), 그리고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으로 추대되던 1964년(56세) 모습. 

 


  두 번째 주제인「청마의 문학」코너에서는 시대별 작품 경향과 대표작 감상을 통하여 청마문학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돕고자 꾸몄다. 이곳에 들어서서 한 바퀴 돌면 그의 생애와 문학세계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될 정도로 시인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세 번째 주제인「청마의 발자취」편에서는 청마가 사용하던 각종 유품 100여점과 청마 관련 평론·서적·논문 등 각종 문헌 자료 350여점의 전시를 통하여 생전의 숨결과 체취를 입체적으로 느끼면서 고결했던 삶과 치열했던 문학정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도록 꾸몄다.

  시인이 생전에 소장했던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유리관 쪽으로 다가가니, 김춘수, 문덕수, 조지훈 등으로부터 받은 편지들이 빛이 바랜 종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그 중 한 편지가 언뜻 눈에 들어온다. "유치환님, 그 동안 바쁘셨지요. 경주로 가신 얘기 들었습니다.." 유치환이 경주고등학교 시절 윤이상으로부터 받은 육필 편지였다. 
기념관의 위쪽에는 유약국의 모습으로 복원된 시옷자 형태의 초가집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청마문학관 전화 : 055) 650 - 5358)

 

 

 


고향 통영에서 키운 시심(詩心) 

 


  통영의 청마생가는 청마문학관 바로 위에 복원해 놓았다. 청마는 1908년 7월 14일 통영시 태평동 552 유 약국(柳藥局) 집의 8남매 가운데 둘째(첫째는 동랑 유치진)로 태어났다. 유생(儒生)인 아버지의 집은 거제군 둔덕면 방하리였으나, 그는 외가(통영시 태평동)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11살까지 한문을 배웠으며, 1922년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도일하여 일본 동경의 토요야마(풍산)중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일본 내의 학업을 접고 귀국하여 동래고보 5년을 졸업하고, 연희전문대(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퇴하고 결혼한다.(1928) 다시 도일하여 한때 사진학원에 다니다가 이듬해(1929) 귀국한다.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을 내리면
   우리 고향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松柏)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깃발처럼 다정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크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 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그 집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약국
   행이불연(行而不言)하시는 아버지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기고 온 신간(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청마가 23살 때 고향의 풍경을 노래한 <귀고(歸故)>라는 시다. 이 때 청마는 사람이 다스리는 세계는 떠나고, 이념과 인연에 번뇌하며 현실의 공간에서 허공(이상)을 향해 상승한다. 또 그의 연가(戀歌)는 <그리움>에서 출발하고 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연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으으 너의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뇨.

 

 



이상향을 노래하는 초기의 낭만적(浪漫的) 경향 

 

    청마는 24살인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등단한 후, 34년 동아일보에 <복숭아꽃>을, 『신동아』 4월호에 <도시시초(都市時秒)>5편을, 35년 『신동아』 5월호에 <가을 삼제(三題)> 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시세계를 연다. 부산에서는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발행하기도 했다. 1939년 55편의 시가 수록된 첫 시집 `청마시초'를 발간하기까지 9년 동안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였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 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고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깃발> 전문

 

  유치환의 작품 중에서 대표작에 속하는 ‘깃발’은 1936년 1월 <조선문단>에 발표된 것인데, 제1시집인 1939  12월 간행된『청마시초(靑馬詩초)』에 수록한 것으로, 이 시는 허무와 이상적 본향을 동경하는 낭만적 경향의 작품에 속한다.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끝없는 동경과 그곳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좌절과 한계의 마음을 상징한다.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허무의 세계를 끝없이 갈구하는 인간의 운명과 본질에 대한 연민과 애수. 이것은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일지 모른다. `아우성', `손수건', `순정', `애수', `마음' 등 5개의 보조관념들은 중심 이미지인 ‘깃발’을 은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을 출간할 즈음 그의 생활은 아주 불안정하여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기도 했고(1032), 부산에서 화신에 근무했으며(1935), 다시 통영으로 가서 학교(협성상고)에 근무했으나(1937), 1940년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권속을 거느리고 북만주로 이주하여  농장을 관리했다.

 자신의 회고록이나 자서전에는 만주로 떠난 사연을 기록한 것은 없지만 지인들이나 동료 문학인들은 친일단체인 문인보국회(文人報國會)가 앞장서고 경찰서장이나 정보과장들의 유명예술인에 대한 친일(親日) 강요에 못 이겨 떠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만주에서 정미소 및 농장 관리인으로 지내면서 그곳의 광야를 배경으로 호방(豪放)하고 관대(寬大)한 그의 기상을 기를 수가 있었다.

 

 

허무(虛無)에의 자각과 대결의식

 

   1947에 간행한 제2시집『생명의 서』에 수록한 작품은 만주 방랑 때의 작품이 대부분이나 여기에 수록한 <생명의 서> <일월> <바위> 등은 그의 대표작으로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만주의 광활한 들판에서 느끼는 고독감을 절실히 표현한 것으로, <광야에서>, <수(首), <절명지>, <절도(絶島)> 등의 작품은 이 시대의 것이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노(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찔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뜰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바위> 전문

 

 


 

  허무를 향한 불굴의 의지 - 바위를 소재로 하여 인생의 희로애락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절대적인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결의를 노래한 이 작품은 <생명의 서>에서 단호하고 강인한 남성적 어조를 보여준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百日)이 불사신 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을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생명의 서(書)> 전문


 

 

  이 작품 역시 허무 사상을 바탕에 깔고 생명의 본연에 대한 추구를 시도하고 있는데 생명과의 대결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원초적 생명’에의 추구라고 할까. 아무튼 이들 작품은 당시 청마의 시세계를 대변해 주고 있는 대표작이다. 

 
  이어 필기체 석판으로 된 제3시집 『울릉도』(1948), 동양적인 허정(虛靜)무위(無爲)의 세계를 미적으로 승화한 제4시집 『청령일기』(1949)를 연속해서 간행했다. 특히 <울릉도>는 내 조국의 국토에 대한 낭만과 애정을 노래한 작품으로 애국적인 시상이 이 작품의 무게를 더해준다.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은 미치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 <울릉도>에서

 

 

 

   광복에 이어 한국전쟁을 맞이한 그는 분연히 궐기하여 문총구구대(文總救國隊)의 결성에 앞장을 섰고, 38선을 넘어 보병 3사단을 종군하여 원산, 함흥까지 이르는 동안 동족상잔의 비참한 모습을 몸소 체험했고, 전선에서의 체험을 쓴 전쟁 시집(제5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발간했다.(1951) 이 무렵 청마는 자신이 발 딛고 선 현실에 대한 선각자적인 책임을 깊이 느꼈던 것이다.  

   이어 존재론적 자아의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예루살렘의 닭』(1953)을, 시집『기도가』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합본한 시집 『청마시집』발간(1954), 『제9시집』(1957), 『유치환시선』(1958), 그리고 4.19의거를 거친 직후에 나온 제10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발간했다.(1960)

 

불의에 대한 항거(抗拒)

 

  청마에게 있어 저항성이 가장 돋보일 때가 자유당 말기 정치적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타고난 반골(反骨) 기질이 3.15 부정선거를 도저히 묵과하지 못했다.
  
   환도를 찾아 갈라
   비수를 찾아 갈라
   식칼마저 모조리 시퍼렇게 내다 갈라
   그리하여 너희들 마침내 이같이
   기갈 들려 미치게 한 자(者)를 찾아
   손에손에 그 시퍼런 날들을 들고 게사니같이 덤벼
   남 나의 어느 모가지든 닥치는 대로 컥컥 찔러
   

     - <칼을 갈라> 에서

  
  <칼을 갈라>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청마가 얼마나 통분 격분했으면 이런 살기등등한 시를 썼을까. 그는 그때 여기저기 신문 잡지에 정치 부패를 저주, 성토하는 시를 발표했다. 그 시절이 바로 청마의 경주 시절이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그는 경주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었고, 그 기간 동안 그는 '나는 시인이 아니다'면서 자유당 정치와 그 불의를 단죄하는 투사의 칼날을 휘둘렀다. 1959년 9월 10일 그는 강요에 의해서 교장직을 물러나게 되고 그 후 2년간 심한 신경통을 앓으며 낭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대구매일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정치권을 질타하는 시를 계속 발표했다. 그 시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이다.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에서


 

  

   이 시가 나온 지 1개월 6일 만에 4.19가 일어났고, 그가 그 동안 발표한 시편들을 묶은 시집들이 다투어 나왔다. 61년 5월 청마는 마침내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이 되어서 그리워하던 경주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학생들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청마는 바로 그 '덕목'으로 높은 추앙을 받게 되고, 그 후 문단에서나 교육계에서 크게 기림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투사'의 일을 떠나 곧 '시인(詩人)'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어 제11시집『미류나무와 남풍』(1964), 시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를 발간했다.


청마의 시사적(詩史的) 위치와 업적

 

  청마 유치환(柳致環) 시인은 한국 시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시인이다. 학생 시절 국어 교과목에서 읽혀지기도 했던 그의 시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즐겨 애송하고 있다.  흔히 유치환을 말할 때 우리는 ‘의지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또 작품에는 허무주의적 경향이 농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허무에 안주하지 않고 호방한 어조로 거침없이 허무를 극복하려는 자세를 지닌 시인이었다.  문학평론가 김현씨는 "그의 시는 방대한 양과 울분 탄식 저항 질타의 호방한 시풍으로 한국시사에 중요한 한 획을 긋고 있다"고 말했다.

  김윤식(金允植)·김현이 공저한 『한국문학』에 의하면 청마의 씨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청마의 시는 범신론적 자연애로 통하는 생명에의 열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 바탕에서 한편으로는 동양적인 허정 무위(虛靜無爲의 세계를 추구했고, 한편으로는 그러한 세계를 극복하려는 강인한 원시적인 의지를 볼 수 있다. 생명 긍정에서 서정주(徐廷柱)와 더불어 세칭 생명파(生命派) 시인으로 출발한 그는, 광복 후 서정주와는 쌍벽을 이루어 온 의지적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유치환은 신채호(申采浩)적 지사적 기질을 끝까지 밀고 나간 독특한 시인이다. 자학(自虐)과 분노와 저주라는 예언자적 지식인의 역할을 끝까지 담당하려한, 몇 명 되지 않는 시인 중에서, 그는 조지훈처럼 음풍영월(吟風詠月)을 하지 않고, 이육사처럼 상징적 수법을 도입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그의 감정의 무게를 그대로 표현한다.‘고.

   비교적 다작에 속했던 그는 수상 경력도 화려하여 서울특별시 문화상(50), 경북문화상(56), 아세아재단문학상(57), 예술원상(62)을 수상하였고,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장, 한국문인협회 경북지부장, 부산지부장, 한국 시인협회 회장(3회),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청마의 기질(氣質)과 통영

 

  특히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방대한 양감과 울분, 탄식, 저항, 질타 등의 호방한 시풍이 그의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여느 시들과는 다른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경상대학교 사학과 김상환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시풍은 그가 시작을 펼쳤던 통영의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경남 통영은 예부터 많은 문인, 화가 등 예술인들의 활동 무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원래 ‘통영’이란 이름은 과거 임진왜란 이후「삼도수군 통제영」이란 데서부터 나온 말로써 통영의 문화는 당시부터 이어져 내려온 통제영 문화와 그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수군 통제영이 있던 이곳의 문화는 한성의 궁중 문화 못지않게 화려했고, 그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히 강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라든가 이 고장 사람들의 구국의 의지와 무훈 또한 왕실이나 각 고을로부터 칭찬의 대상이었고, 그러기에 비록 궁중 관료들처럼 관직을 부여받은 자들은 많지 않았어도 통영의 문화는 전라좌수영(전남 여수)과 더불어 한성 못지않은 자부심을 가졌고,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당시의 풍류와 호방함을 간직한 채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유치환 시인의 시 세계에서 보이는 강한 어투와 호탕한 성품이 바로 이 통영 - ‘통제영’ 문화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은 1908년 이 통제영 문화의 중심지인 통영시 태평동(외가)에서 출생했다. 혹자는 그의 출생지가 통영 남쪽의 거제도 둔덕면이라는 주장하고 있는데, 그 이유인 즉 그의 시 가운데 <거제도 둔덕골>라는 시에서 "고향"이라는 문구가 나오기 때문인 듯하다. 둔덕면은 그의 고향(본가)이다. 거제 둔덕골에도 청마기념관과 생가., 그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어쨌거나 그의 출생지가 어디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의 시가 한국 시문학에 있어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또한 한국 시사(詩史)의 거두로서 이곳 남도 문학의 자부심으로 통한다는 것이 중요한 대목이다.

  45년 해방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온 청마는 통영여중 국어선생으로 교단에 서면서 67년 2월 교통사고로 숨질 때까지 교육자와 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통영, 대구 경주 지역의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병행하여 통산 14권에 달하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도도하고 웅혼하며 격조 높은 시심(詩心)을 거침없이 읊은 데에 특징이 있는데, 이는 자칫 생경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기교보다도 더 절실한 감동을 준다.  너그럽고 관대한 인품, 호탕한 웃음, 꿋꿋한 내적 의지의 소유자인 그는 술도 두주급(斗酒級)이었다고 한다.

 

플라토닉 러브 -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

 

 

  또 하나, 청마 유치환을 이야기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될 대목이 있다. 시조 시인 이호우(李鎬雨)의 여동생인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1916∼1976)와의 플라토닉 러브.  1937년 부산에서 통영으로 돌아와 통영협성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을 무렵, 시조 시인인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와 문학회 모임에서 만났다.  경북 청도가 고향으로 문재와 미모를 갖춘 정운은 딸을 하나 둔 남편과 사별한 청상과부. 친정 대신 통영으로 시집 온 그의 언니집에 와서 머물렀던 것이 두 사람이 만난 계기였다. 정운은 처음 수예점을 운영하다 이후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다. 정운은 퇴근 후에도 수예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여덟 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靑孀)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이미 결혼한 청마이지만 정운에 반해 퇴근 후면 수예점이 환히 보이는 통영우체국 창가에서 연서를 쓰고 또 썼다.

   당시의 정서로는 보아 두 사람의 사랑은 이승에서는 맺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애타는 마음은 두 사람 사이에 연서로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애절한 사랑의 편지가 교환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사랑의 연서는 1967년 청마가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20년 동안 이어져 그렇게 주고받은 편지가 5000여 통에 이른다고 한다. 청마는 안타까운 사랑의 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 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그리움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그리움>이란 제목의 또 한 편의 그의 시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직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에 꽃같이 숨었느뇨’

 

 

 

 

  아마도 이 <그리움>에서 청마가 찾고 있는 것은 이승에서는 이룰 길 없는 한 생명의 그림자일지도 모를 일이다.  기독교 신앙을 지니고 있으면서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운은 그저 숨 죽여 울 수밖에 없었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탑>이라는 시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20년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정운은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 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 같이 요지경 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52년 6월2일 당신의 마(馬)

  널리 애송되는 또 한 편의 시 <행복>을 보면,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 와서 너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시 '행복' 전문

 

 

 

  청마의 마음 모를 리 없는 정운은 또 나름대로 속을 태우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 마음이 역시 시로 표현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스라이 젖게 한다. 다스릴 수 없는 마음을 석류(石榴)에 빗대어 이렇게 표현했다. 
  
   다스려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 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정 
   한 자락
가던 구름도 처마 끝에 머문다.

 

  그는 또, ‘모란’을 소재로 하여 ‘여미어 도사릴수록 / 그리움은 아득하고 / 가슴 열면 / 고여 닿는 / 겹겹이 먼 하늘 / 바람만 / 봄이 겨웁네 / 옷자락을 흔든다.고 했다.

  마침내 사랑도 육신의 목숨도 놓아야 할 시간이 다가 왔음을 예감했을 때, 시인은 생애를 걸었던 자신의 사랑을 ‘별’이라고 이름 붙여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 ‘별’을 향해 이렇게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에

  너도 말없고 나도 말없고

  마지막 이별을 견디던 그날 밤

  옆 개울물에 무심히 빛나던 별 하나!

 

  그 별 하나

  젊음도 가고 정열도 다 간 이제

  뜻 않이도 또렷이

  또렷이 살아나―

 

  세월은 흘러가도

  머리칼은 희어가도

  무덤가까지 따라올

  그 별 하나! (유치환의 <별>에서)

 

 

  

  이토록 이들 사이에 끝이 보이지 않던 사랑은 유치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 13일 저녁,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붓을 영영 놓게 된 것이다.  '차라리 그 때 오라고 했으면 죽지는 않았을 터인데...' 이 글은 술취한 유치환이 정운 이영도를 찾아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에 이영도가 독백처럼 한 말이다.

   정운은 1945년 《죽순(竹筍)》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조 <제야(除夜)>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이어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부산여자대학에 출강하였고, 부산어린이회관 관장, 《현대시학》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잊혀져가는 고유의 가락을 시조에서 재현하고자 힘썼으며, 간결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여성의 맑고 경건한 계시주의(啓示主義), 기다림 등의 정서를 다스리며 관조적인 인생관을 보여주었다. 1966년 제8회 눌월문화상(訥月文化賞)을 받았다. 대표작품으로 <바람>, <아지랭이>,  <황혼에 서서>, <미소> 등이 있으며, 시조집 《청저집(靑苧集)》 《석류》 등과, 수필집 《춘근집(春芹集)》 《비둘기 내리는 뜨락》 《머나먼 사념의 길목》 등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청마를 강인한 의지로 생명 노래를 불렀던 딱딱한 시인으로만 알았다는 사실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는 교과서 속의 박제된 생명파 시인이기 이전에 이루지 못할 사랑의 슬프고 애달픔에 가슴 떨었던 한 남정네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그의 사랑시마다에는 황소울음 같은 힘과 함께 자기 희생과 너그러움이 녹아 있다는 것 말이다.

   이들 편지는 청마가 세상을 떠난 후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상점들의 주문이 밀어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명 중앙출판출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마땅히 서한집의 인세는 청마의 유족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나 정운은 시전문지'현대시학'에 '작품상'기금으로 기탁운영해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청마가 타계한 후 9년을 더 살다가 60세가 되는 1976년 3월6일 갑자기 세상을 뜬다.  이 나이는 청마가 이승에서 누린 나이와 같다.   더 크게 만들겠다던 문학상 기금은 정운의 타계로 붓지 않고 구상. 김준석. 임인규 등 문학상 운영위원들의 합의로 '정운시조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1967  2월13일 하오 9시 30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의 교통사고였다. 17일 부산직할시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 산록에 묻혔으나  경남 양산시 백운공원 묘지로 이장. 현재는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산록에 묘지가 있다.  통영 청마문학관과 연계한 문학기행 코스로, 거제도 둔덕면 하둔리에는 청마기념관, 생가, 청마의 묘, 시비가 서 있다.  

 

<필자 주> 이글은 2020년 재수정되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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