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 허균 남매의 고향 강릉
강릉 초당동에서 허난설헌 · 허균을 생각하다
글·사진 남상학
강릉 가는 길에 강릉 경포대 옆에 있는 초당(草堂)마을을 찾아갔다. 강원도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터는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문인 허난설헌의 예술혼과 문학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곳이다.
그곳 울창한 송림 속에는 멀리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그의 동생 허균(許筠, 1569~1618)의 유년이 살아 숨 쉬는 생가 터가 있기 때문이다.
경포 호수 옆길을 따라 강문까지 간 다음 송림 우거진 마을로 들어가면 거기가 바로 초당이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59호로 지정된 이곳은 생가를 비롯해 허균·허난설헌 기념관과 기념 공원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강가에 있어 문 앞을 흐르는 물에 비단옷 빠네"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구를 음미하며 초당순두부의 명성을 간직한 마을로 들어서서 ‘허난설헌 생가터’라는 간판을 따라 고샅길로 접어들면 면 소나무 숲 속에 기와집이 보인다. 아마도 이 집은 혁명가 허균의 집안이라는 내력을 생각해보면 집이 온전히 남아있을 리 없을 테고, 그 자리에 어느 누가 집을 지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집이 그가 태어난 생가가 아니라고 섭섭해 할 이유는 없다. 이 지역 초당이 그분들의 유년시절엔 놀이터였을 테니까. 이 지역을 초당마을이라 하는데, 초당(草堂)이란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許曄)의 호이다. 학자요 문장가로 유명한 그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서 얼마나 컸으면 마을 이름을 그의 호를 빌어썼을까.
비원(悲願)의 땅―초당(草堂)의 생가
생가 터를 둘러보았다. 2001년 복원된 허난설헌 생가터는 아름다운 솔숲을 지나면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대부가 한옥의 형태이다. 생가 터 안에 있는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ㅁ’자 배치를 하고 있는 그저 평범한 양반 가옥이다. 앞에는 우물이 있고, 외부를 둘러싼 담이 있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여 남자들은 솟을대문으로, 여자들은 우물간과 방앗간 옆의 협문으로 출입하였으며, 사랑마당과 구분하는 내외 담을 사랑채 옆에 쌓아서 출입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안에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매화나무가 아름답게 자란다.
사랑마당, 행랑마당, 뒷마당으로 담을 넓게 나누어 놓아 한국의 아름다운 조경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사랑채의 정원은 얼마나 아담한지 색동저고리 입은 꼬마 아가씨가 어디선가 달려 나올 것만 같다. 그리고 주변의 소나무 숲이 전통적인 한옥의 멋을 더해주고 있다. 그런데 송림이 얼마나 무성한지 그 가운데 서면 사위가 더 컴컴해질 정도다.
기념공원 안에 건립된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은 연면적 185.77㎡의 목조 한식 기와로 이루어진 단층 건물이다. 내부는 ㅁ자형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안내 데스크와 만나고, 이어 주전시실과 소전시실로 이어진다. 전시품으로는 아버지 허엽(許曄, 1517~1580)과 4자녀의 가계도, 허균 가족들의 작품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고 있다. 전통차 체험관은 한옥 두 동으로 이루어졌다. 건물 내부는 전통차를 체험하고 마실 수 있는 체험관구 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을 둘러보며 문학적 재기를 보여준 허난설헌과 허균의 자취를 둘러본다.
고뇌의 삶을 시로 달랜 짧은 인생, 허난설헌
허난설헌은 1563년 아버지 허엽(許曄)의 셋째 딸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계속 승지. 대사간. 대사헌. 부제학 등의 벼슬을 했으므로 한양의 건천동에서 자랐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이름이 없었는데, 그의 이름을 초희(楚姬), 자를 경번(景樊)이라 하였고, 난설헌(蘭雪軒)은 그의 호에 해당한다. 난처럼 청아한 용자에 재예가 비범한 그녀는 1570년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이라 이름이 났다. 그 뒤 작은 오빠 허봉(許封)의 친구인 이달(李達)에게서 동생 허균(許筠)과 함께 시를 배웠다.
1577년 안동김씨 서당 김성립(西堂金誠立)에게 시집을 갔으나 김성립은 신혼 초부터 난설헌을 버리고 과거공부를 한다고 한강 서재에서 별거하다시피 했다. 재기 넘치는 똑똑한 부인 난설헌이 자신에게 힘겨워서였을까. 난설헌 역시 남편이 시답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난설헌은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모랏골에서 가슴 가득한 한과 곱게 가꾼 꿈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강가 서당에서 글을 읽는 남편을 생각하면서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지만, 한편 신선세계를 상상하면서 시작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화려했던 친정이 몰락해 갔고 사랑하는 아들딸마저 먼저 보낸 슬픈 나날을 보내다가 스물일곱 나이로 죽었다.
1590년 11월 동생 허균이 친정에 흩어져 있던 시와 자기가 외고 있던 시를 모아서 <난설헌집>을 엮었다. 1598년 봄. 정유재란을 도우러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문인 오명제(吳明濟)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외워 주었다. 이 시가 <조선시선> <열조시집>에 실린 뒤에 <난설헌집>으로 출판되었다.
허난설헌의 시비는 생가가 있는 강릉시 초당동 솔밭 외에 경기도 용인군 양천허씨 선산과 광주 경화여자상업고등학교 교정, 그리고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모랏골 묘소 등 네 곳에 건립되어 있다.
집은 강릉땅 돌쌓인 강가에 있어(家住江陵積石磯)
문앞을 흐르는 물에 비단옷 빠네.(門前流水浣羅衣)
아침이면 한가로이 노 매어 두고(朝來閑繫木蘭棹)
짝 지어 나는 원앙새 넋을 잃고 바라보네.(貪看鴛鴦相伴飛)
이 작품은 ‘죽지사(竹枝詞)’ 4수 중 함련에 해당하는데 허난설헌의 시들은 대체로 고독, 한, 원망 같은 것이 주된 정조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난설헌 시의 경향을 세 가지로 말하는데, 첫째는 신비주의를 추구함으로써 현실의 환멸에서 초탈하려 한 것인데 작품 ‘유선사(遊仙詞)’가 그것이다. 둘째는 궁사류(宮詞類)에서 ‘빈녀음(貧女吟)’에 이르기까지 규원(閨怨)과 고독의 상처가 다소곳이 엮어져 한숨으로 얼룩진 여인의 소회를 대변한 것이다. 셋째는 ‘곡자(哭子)’와 ‘기하곡(寄荷谷)’ 등에서 뼈저린 숙명의 고뇌를 표출해낸 것이다. 이것은 아마 원하지도 않는 삶의 길을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했던 깊은 고뇌 때문일 것이다.
해맑은 가을 호수 옥처럼 새파란데
연꽃 우거진 속에다 목란 배를 매었네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서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봤을까봐 한나절 부끄러웠네.
이 시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련한 마음을 표현한 ‘채련곡’이라는 시다. 여기서의 님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 현실의 남편이 아니라 초희가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상상 속의 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혼(詩魂)으로 불타오르는 시를 읽노라면, 누구나 과거로의 시간여행 길로 접어들어 허난설헌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환상 속으로 빠져든다. 그의 작품 ‘감우(感遇)’에서
창가에 하늘거리는 아름다운 난 잎과 줄기 어찌 그리 향기로울까
가을 서풍 한바탕 스치고 나서 찬 서리에 그만 시들어 버렸네!
빼어난 그 모습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 끝내 그치질 않기에
이것이 내 마음 아프게 하여 자꾸만 옷깃에 눈물 적시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파란 난 새가 채색 난 새와 어울렸구나!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
이 시는 <몽유광상산시(夢遊廣桑山詩)>로 강릉의 허균(許筠)·허난설헌(許蘭雪軒)의 생가 터에 적혀있는 그녀의 시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어떻게 끝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까? '복중에 아이 있건만 / 어찌 장성하기를 바라리(縱有腹中孩/安可冀長成) ―‘곡자(哭子)’의 일부' 스물일곱의 나이에 요절한 그녀에게 시대의 냉소를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감성이 너무 열렬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 ‘곡자(哭子)’를 살펴보자.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去年喪愛女)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哀哀廣陵土)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雙墳相對起)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蕭蕭白楊風)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번쩍이는데,(鬼火明松楸)
지전을 뿌려 너의 혼을 부르고,(紙錢招汝魂)
너희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玄酒存汝丘)
아, 너희 남매 가엾은 혼은(應知第兄魂)
생전처럼 밤마다 정겹게 놀고 있으니(夜夜相追遊)
이제 또 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縱有服中孩)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安可糞長成)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浪吟黃坮詞)
통곡과 피눈물 울며 삼키리(血泣悲呑聲)
허균(許筠)의 파란만장한 반역의 삶
반대로 허난설헌의 동생인 허균(호는 교산=蛟山)은 현실에 맞서려 했다. 시인이요, 문장가였던 그는 좌참판에 이르는 등 정치가로도 활약했다. 일찍이 서자 출신 집안인 이달(李 達)에게서 시를 배운 연유로 주로 서류 문인과 사귀었다. 불교, 도교, 양명학 등에도 밝았고 서얼ㆍ천민과도 교류, 현실비판적인 시문과 체제 저항적인 산문 및 소설을 남겼다. 광해군 9년 기자헌(奇自獻)의 아들 기준격(奇俊格)의 상소로 서자 집안사람들의 역모에 가담한 죄가 탄로되어 위태롭게 되자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광해군 10년 8월에 처형되었다. 그는 한글로 된 최초의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 을 썼다.
허균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문장가였고 비평가였다. 조선은 문인 국가다. 문학적 능력이 최고의 가치였고 유일한 출세 도구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자본의 축적, 곧 자본가가 되기를 열렬히 소망하는 것처럼, 허균은 양반관료 사회에서 고급관료가 되어 사회적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것을 열망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질시 대상이었다. 그는 슬기롭게 처신할 필요가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율곡 이이(李珥) 역시 천재였으나 도학(道學)으로 스스로를 다스렸다. 허균은 자신의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출세는 더디고 관력(官歷)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1605년에는 수안부사, 1607년에는 삼척부사에서 떨려나는 수모를 겪는다.
예교(禮敎)에 어찌 묶이고 놓임을 당하겠는가(禮敎寧拘放)
부침(浮沈)을 다만 정(情)에 맡길 뿐이라네(浮沈只任情)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쓰시게(君須用君法)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려네(吾自達吾生)
‘벼슬에서 파직됐다는 소리를 듣고(聞罷官作)’ 관청에서 부처를 받들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면된 허균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시이다. 그의 뜻은 예교에 속박되지 않고 정의 이끎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예교란 무엇인가? 삼강오륜으로 규범이 된 조선 제일의 윤리도덕이며 절대 복종만이 요구되던 불변의 당위이다.
하지만 허균은 통념적 도덕률에 굴종하기보다는 본성과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자기 방식의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이때는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이단으로 간주됐지만 그는 불교에 심취했고, 도교에 빠져드는가 하면, 양명학 좌파를 넘나들었고, 서학을 수입했다.
양천 허씨 명문가의 막내로 태어나 문명을 날리던 허균이 자유분방한 생활태도를 지니게 된 것은 20대 전반기에 겪은 가족사의 비극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아껴주던 형님 허봉의 정치적 좌절과 죽음, 누이 허난설헌의 요절, 임진왜란의 피란길에서 당한 아내와 아들의 죽음 등 큰 충격을 연속으로 겪었다.
하지만 이미 크고 작은 민란이 발생한 데서 알 수 있듯 허균은 당시 조선시대 체제의 모순에 더 근원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적서차별의 신분 모순과 백성들의 황폐한 삶, 피비린내 나는 당쟁 등에 대한 허균의 비판적 인식은 그의 수많은 시 작품과 ‘호민론’ ‘유재론’과 같은 산문, ‘홍길동전’ 같은 소설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홍길동전>은 영웅의 일대기를 골격으로 한 최초의 한글소설이다. 조선 세종 때 좌의정 홍상직(洪尙直)의 얼자로 태어난 홍길동(洪吉童)은 무예와 예의를 익혔으나 얼자로 태어나 자신의 뜻을 다 펴지 못함을 한탄한다. 홍길동은 홍상직과 시비(侍婢) 사이에 출생한 서얼이다. 한편, 홍 대감의 또 다른 첩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기를 모면한 길동은 집을 떠나 도적의 소굴로 가 재주를 보이고 우두머리가 된다. 무리의 이름을 활빈당이라 자칭하고 탐관오리와 패악하고 타락한 승려를 징치하여 전국에 이름이 알려지자 조정은 홍길동을 잡기 위해 군사를 동원한다. 나라에서는 홍길동의 신기한 재주로 인해 도저히 잡을 수 없자, 아버지인 홍 대감을 회유하여 길동을 병조판서에 제수하려 하니 불러들이라 한다. 이에 임금 앞에 나타난 길동은 병조판서 제수를 사양하고 무리를 이끌고 나라를 떠날 것을 알리고 공중으로 몸을 띄워 홀연히 사라진다. 이후 길동은 어머니와 수하들을 이끌고 율도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이다.
사회의 부조리와 새로운 사회로의 이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소설이 지니는 문학적 역할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다. 소재를 당대의 사회 현실에서 택했고, 의적을 등장시켜 모순된 사회 제도-적서차별문제, 봉건적 계급 타파, 탐관오리 척결, 의적활동, 빈민구제, 이상국 건설 등 사회를 개혁하려는 혁명성과 서민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도교적인 둔갑술, 축지법, 분신법 등을 담고 있으면서도 당대의 현실적인 문제를 다룸으로써 리얼리티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시각으로 볼 때 허균의 이미지는 진보 색깔이 강하다. 아니, 혁명가에 속한다. 문학 창작에서 작가의 개성을 힘주어 말한 사람, 성리학의 윤리에 길들지 않은 사람, ‘호민론(豪民論)’을 써서 민중 저항을 은근히 찬양한 사람, 그 저항의 실례로서 ‘홍길동’을 창조한 사람, 그리고 마침내 역모 혐의로 죽음을 당한 사람.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허균은 중세를 벗어나고자 한 ‘조숙한 근대인’일 수도 있다.
초당동의 두부마을의 토담순두부
강릉의 유명 토속음식으로는 감자떡, 옹심이, 순두부, 메밀묵, 도토리묵 등이 있다. 그 중 초당동의 순두부는 강릉지역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유명하다. 허균·허난설헌의 생가 터 100m 앞에 있는 <토담 순두부>( 033-652-0336 , 033-64...)는 초당순두부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이곳 순두부는 바닷물을 사용해 만든 것으로 1년 된 묵은 김치의 톡 쏘는 맛과 바닷물의 짭짜름한 맛이 조화를 이룬다. 본래 찌개는 1년 이상 묵은 김치를 넣고 끓여야 제 맛이 난다고 하는데, 바닷물의 짭짜름함은 조미료로 쓰는 소금의 그 맛보다 왠지 상쾌하다. 누구나 이러한 초당 순두부를 먹다보면 언제 다 먹는지 모를 정도로 밥공기와 찌개그릇을 눈 깜짝할 새 비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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