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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지조(志操)의 시인, 지훈문학관

by 혜강(惠江) 2007. 9. 8.

 

문학기행

 

지조(志操)의 시인, 지훈문학관을 찾아서

 

- 생가 호은종택과 시(詩) 공원 -

 

 

·사진 남상학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조지훈의 <승무> 제1연 -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영양군 영양읍을 지나 일월산 자락 주실마을로 가는 국도변은 야트막한 산이 인상적이다. 워낙 오지(奧地)여서 험준한 산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풍광이다. 주실 마을엔 청록파(靑鹿派) 시인(詩人) 조지훈의 생가와 조지훈 문학관이 있다. 이 문학관에선 조지훈 시인의 작품 세계와 가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영양읍을 지나 문암 삼거리 길에서 봉화 방향으로 31번 도로를 타고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주실 마을과 조지훈 시인의 생가 이정표가 보인다. 주실마을 입구에 다다르니 훤하게 돌을 깎아 세운 표지석이 보인다. 곧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한양조씨 집성촌으로 알려진 주실(주곡)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그의 문하생들이 세운 시비가 있고, 시비에는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어 눈길을 잡는다.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중략)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라."   - 시비에 새긴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에서



 

  지훈문학관은 시인 조지훈(1920~68) 선생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문학관이다. 지훈문학관 은 대지규모 2,792㎡ (846평), 건축면적 538㎡ (163평)으로 된 문학관은 주요시설로 관리사, 시청각실, 전시실으로 꾸며져 있으며, 2007년 5월 18일 개관했다.

 

   지훈문학관 설립과 개관은 ‘문향영양’을 가꾸기 위한 주력사업으로 영양군이 주도한 사업이지만 고려대학교와 인연이 각별하다. 시인이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제자 양성에 주력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발언과 처신은 고려대학교의 정신적 지주로 우뚝 섰다. 그래서 제자인 홍일식(洪一植) 전 고대 총장과 최동호 대학원장은 문학관의 방향 설정 등을 위해 영양을 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고려대 박물관에 있던 유품도 영양으로 가져왔다.

  지훈문학관은 개관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웅장함과 그 주변의 소박한 자연물과 아직 어울리지 않아 좀 낯선 모습이었지만, 이것은 세월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고 그 친근함은 더해지리라. 아직 지훈문학관에 붙어있는 개관축하현수막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는 듯했다.

 

 

 


지훈문학관의 전시물

 

  문학관에 들어서면 조지훈의 대표적인 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모니터에선 승무를 추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전시실은 단층에 160여 평 규모인데, 동선을 따라 가면 조지훈 선생의 삶과 그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 3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시인의 체취가 느껴지는 담배 파이프를 비롯해 모시 두루마기와 삼베바지도 전시돼 있다.

 

   그밖에 지훈의 육필원고, 부채, 여권, 가죽장갑, 모자, 넥타이, 초상화, 사방탁자, 문갑 등이 있고, 제1회 지훈상 수상식 초대장, 제2회 지훈상 수상식 초대장, 고 지훈 조동탁 선생 20주기 추모학술대회 초대장, 조지훈 선생 비문제막식 초대장, 지훈시비 제막식 초대장, 1982년도 문화의 날 기념식 팜플릿, 1996 문학의 해 문인모습 및 작고문인 육필 전시회 팜플렛, 금관문화훈장, 편지 2통3장, 신라국호연구논고, 신문스크랩-전교학신문제39호 문화일보 제222호, 릴테이프, 육성녹음 테이프, 시낭송테이프 등 많은 자료가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동선을 따라가보면 지훈의 소년시절 자료들, 광복과 청록집 관련 자료들, 격정의 현대사 속에 남긴 여운, 지훈의 가족 이야기,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작품, 지사로서의 지훈 선생의 삶, 지훈의 시집과 산문, 학문 연구의 핵심 내용, 조지훈 선생의 선비로서의 삶의 모습 등이 사진이나 판넬로 일목요연하게 제작, 전시되어 지훈의 생애와 업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조지훈은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지훈은 그의 호이며,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일제 교육을 거부한 조부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는 주실마을에 세워진 월록서당에서 한학과 한글, 그리고 유학과 역사 등을 배우며 유년기에서 소년 시절에 이르는 기간을 보냈다.


   문학소년 지훈은 아홉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동화를 창작해 보기도 하고, 당시의 소년들로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피터 팬」,「파랑새」,「행복한 왕자」와 같은 동화를 읽으면서 서구의 문화를 경험하면서 유교적 전통 속에서 서양문학을 섭렵하였다. 그의 부친은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이다. 천석군이었던 조부 조인석은 6.25때 이곳에 들이닥친 공산당과 타협하지 않고 자결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불굴의 선비 정신이 지훈에게 물려졌던 듯하다.


  그리고 경성으로 올라와 ‘혜화전문학교' 에 들어간 후 그는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경향파 문학을 거쳐 시문학파의 영향을 받았고, 탐미주의에서 아방가르드, 다다이즘에 이르는 문학의 여러 경향을 섭렵했다. 또한 릴케와 헤세, 이백과 두보, 소동파 등 동서양 시인들의 작품을 두루 읽었고 성서와 그리스 신화, 유교 및 불교, 노장사상 등에 대한 책들을 탐독했다. 이러한 독서가 그의 시세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훈의 시세계(詩世界) - 청록파로서 활동

  지훈이 약관 19세의 몸으로 시단에 등단한 것은 1939년 [문장]을 통해서였는데 이때의 추천 위원은 시인 정지용이었다. 지훈의 데뷔 작품인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 등은 한결같이 뛰어난 천분(天分)과 기교가 조화된 작품으로, 한 시인의 초기 작품의 차원을 벗어나서 이름 그대로 그의 출세작이 되고 또 대표작이 되었다. 일제에 의한 조선어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풍전등화 같던 모국어의 운명을 지훈 혼자서 담당하게 되는 역사적인 운명이 데뷔 당시에 이미 부여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의상으로 본 한국의 고전미와 낭만미가 씬 풍긴다. [고풍의상(古風衣裳)]은 [문장] 3호(1939. 4.)에 첫 번째로 추천된 작품인데, 일제 치하의 한국문화와 전통적 가치를 시화한 조지훈의 초기 대표작이다. 제목에서 풍기듯 우리나라의 고전적 생활문화에 담긴 여성적 품위를 읊고 있으며 시에서 보이는 한국의 전아한 고전미는 독자들로 하여금 평화적 삶의 내적 질감을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선의 아름다움, 처마 밑으로 구슬로 만든 발을 내린 운치 있는 달밤의 광경, 한복을 입은 미인의 요조하고 품위 있는 동작의 묘사. "아름다운지고", "밝도소이다", "흔들어지이다" 같은 아어체의 문투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기품 있는 고전미로 승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와 함께 시각 영상에 의존하는 감각어들을 적절히 배치한 시적 수사는, 실제적인 것과 환상적인 미의식을 결합하여 사물의 현실감을 한층 고양시키는 데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처럼 고전적인 한국 문화를 세련된 감각어로 써낸 데에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 문화주체성, 역사주체성을 드러내려는 시인의 시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고전미는 불교적 성격을 짙게 풍기는 [승무]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이냥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승무> 전문

  고전적, 불교적, 선(禪)적, 전통적 성격의 [승무]는 대상에 대한 예찬적 어조, 고전적인 우아한 율동을 통하여 인간의 고뇌(苦惱)를 종교적 승화(昇華)시키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현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시인인 오탁번은 이렇게 말한다. “지훈이 젊은 나이에 도달한 모국어의 시적 성취는 그 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여전히 압권이다.

 

  지훈의 시적 생애는 원숙한 경지에서 실험적 경지로 또 현실적 경지로 옮겨갔다. 다른 시인들에 비하면 역코스를 진행해 갔으므로 개인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는 불행한 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의 시문학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는 매우 희귀하고 값진 바 또한 적지 않다. 

 

  식민 치하의 시공(時空)을 살면서 그가 무엇보다도 절실히 느낀 것은 아마도 모국어의 따뜻한 숨결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 시에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품격을 부여한 시인이다. 해방된 조국의 국민에게 사랑 받는 시인이 될 것을 미리 예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든 거미줄 친 옥좌(玉座) 우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십품(從十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 <봉황수> 전문

  유장하게 흐르는 [봉황수]의 율조 속에 담겨 있는 비극적인 결연한 어조는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도 미래를 꿈꾸는 봉황의 큰 뜻을 은연중에 담고 있다. 시인은 머지않아 이민족의 손아귀를 벗어날 '푸르른 하늘'을 노래하였다. 지훈의 이와 같은 비장미(悲壯美) 넘치는 어조는 바로 우리 겨레의 은근한 기다림과 인내의 결실과도 맞닿아 있어서 다른 많은 시인들과 구별된다. 민족의 역사적 인식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시인이 아니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뛰어난 높이에 도달하고 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열 아홉 스무 살의 나이에 그러한 천부적 역사 인식이 가능했을까. 한국의 현대시라는 장르가 소월과 지용을 거치면서 이제 막 자리잡아 가고 있던 형성기에, 어떻게 지훈은 가장 오래 남아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될 수 있는 '시(詩)'로 발견해 낼 수 있었을까.

  물론 이것은 그의 천부적인 자질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겨레의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시사에 이름을 남긴 시인들이 그들의 특수한 개인적 체험을 형상화한 데 비하여 지훈은 만해와 더불어 우리 겨레의 신화적 진실을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로 형상화하였다. 시인 조지훈이 이 땅에 살았다는 사실을 우리 겨레의 행운으로 껴안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하여 등단한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은 1946년 함께 합동 시집 《청록집》을 냈다. 이를 계기로 이들 세 사람을 '청록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합동 시집의 간행을 을유문화사로부터 요청을 받은 세 시인은 어느 눈 오는 날 밤 지훈의 성북동 집에서 시집에 실릴 원고를 서로 골랐고, 목월이 《청록집》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출판된 「청록집」은 현대 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자연을 노래한 시집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즉, 청록파의 시풍은 당시 유행하던 도시적 서정이나 정치적 목적성과는 달리, 자연으로 돌아가는 고전 정신의 부활과 순수 서정시 세계로 요약할 수 있다.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이른바 ‘청록파(靑鹿派)' 시인으로 꼽히는 그는 일제 말 민족의 얼과 정서를 지키기 위해 시를 쓴, 민족적 전통 시인이다. 두진은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읊었으며, 목월은 향토적 서정으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식을 민요풍으로 노래한데 비하여 지훈은 고전미와 선미(禪味)를 드러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민족의 서정을 노래한 것이 많으나 우리 고유의 서정을 노래하면서도 민족의 자존과 정서를 고무시켰다. ‘승무' 같은 시를 대하면 그의 섬세 한 시어와 함축된 의미에 경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청록집》《풀잎단장》《조지훈시선》《역사 앞에서》《여운》등 그가 남긴 시집들은 모두 민족어의 보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승무」「낙화」「고사」와 같은 시들은 지금도 널리 읊어지고 있는 민족시의 명작들이다.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매우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시인이면서 학자이자 지사였다. 1941년부터 극한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한 괴로운 세월에 정신을 가누기가 어려웠던 그는 심기가 너무 울적해서 무슨 충동에나 이끌린 듯한 심정으로 목월을 만나러 경주를 찾아가「완화삼」을 목월에게 주고 후에 목월에게 「나그네」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이며 가노니…….

 

   - 지훈의「완화삼(玩花衫)」전문 -

  조지훈의「완화삼(玩花衫)」은 '목월에게'라는 헌사가 붙은 시다. ‘완화삼’은 대충 해석해 보면 ‘꽃(花)을 완상(玩)하는 선비의 도포(衫)’ 즉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라는 부분을 한자로 바꾼 듯. 쉽게 말하면 '꽃에 익는 적삼' 정도로 이해된다. 목월은 이 시를 받고 「나그네」로 화답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목월의 「나그네」-

  두 시 모두 '술 익는 마을' 이 나오는 것과 '물길 칠백 리'에 '남도 삼백 리'로 대답한 것도 재미있다. 모두가 나그네라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달랠 길 없는 민족의 한을 한국적인 체념과 달관의 경지로 노래했다. 목월의 [나그네]가 시골 마을의 풍요로운 저녁을 그림처럼 보여주었다면 지훈의 [완화삼]은 나그네의 외로움을 더욱 짙게 표현한 것 같아 오히려 마음에 든다.

  또 광복 후에는 대부분의 문인들은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문학 단체에 적극 가담할 때 지훈도 <조선문인보국회>의 입회를 강요받았으나 추천시 몇 편 발표한 것이 무슨 시인이겠느냐는 태도로 입회를 피해 스스로 붓을 꺾은 일화는 그의 지사적 풍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시인이면서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검거되기도 했다. 광복이 되자 지훈은 잠시 영양군으로 가서 초등학교 교재를 엮어서 등사판을 밀고 주실마을 청년들과 함께 신사를 불태웠다. 그 후 좌익 성향의 카프문학에 대항해 순수문학의 선두에 섰다.

 

 

 

 


  종군문인단의 일원으로 활동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지훈은 문우들과 함께 대구에서 <문총구국대>를 조직하여 전선을 찾아 종군 작가로 활동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10월 3일에 서울로 돌아왔다가, 10월 말에 평양이 점령되자 해주를 거쳐 평양으로 갔으며, 중공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3일 전에 서울에 돌아왔다. <문총구국대>에 몸담고 있으면서 지훈은 강한 휴머니즘과 반공의식, 자유와 정의에 대한 투철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 전쟁시의 명편 중 하나로 꼽히는 「다부원에서」에는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처참한 죽음이 여실하게 들어나 있다.

  한 달 농성(籠城)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찌기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던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이 시는 한국 전쟁 당시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의 다부원 전투 현장을 보고 느낀 시인의 감회를 표현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전후 문학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피아(彼我)를 구분하고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전쟁이 주는 참혹함과 생명 말살의 현장을 바라보는 화자의 안타까운 시선에서 전후 문학의 일반적인 특징인 휴머니즘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선비적이며 지사적 풍모(風貌)

 

   지훈은 외모로 보나 기질로 보나 가녀린 감상적 문인이라기보다 지사적 풍모를 지닌 행동가였다. 이런 기질은 아마도 그의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성품이기도 했다. 이런 성품이 시대상황과 맞물려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만해가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심우장에 참례한 것이 열일곱(1937년)이었으니 조지훈이 뜻을 확립한 시기가 얼마나 일렀던가를 알 수 있다. 특히 지훈이 매천(梅泉 黃玹)과 만해(萬海 韓龍雲)를 사숙(私淑)함은 두 분의 탁월한 재질보다도 강직한 성격과 대쪽 같은 절개를 흠숭(欽崇)함이었다.

 

  일제 시대 이미 지사적인 면모를 보였던 그에게 한국전쟁은 지훈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지훈의 할아버지는 마을이 공산화되자 자결하였고, 어머니는 전쟁 때 얻은 병으로 돌아가셨으며, 아버지와 매부는 납북되고, 하나뿐인 남동생은 익사하는 커다란 수난을 겪었다. 가족사에 나타난 이러한 충격으로 지훈의 정신세계는 크게 흔들렸다. 이후 지훈은 시 창작보다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자유당 독재정권을 논설과 참여시로 질타하는 일에 앞장섰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 그는 독재에 항거해 민권수호 국민총연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조지훈은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를 준엄하게 판별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지조론》에 나타나는 추상같은 질책은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양심의 절규이었다. 《지조론》은 1960년 종합교양잡지 《새벽》 3월호에 발표된 논설문이다. 다음은 《지조론》에 대하여 언급한 글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1950년대 자유당 말기의 극도로 부패한 정치현실 속에서 과거의 친일파들이 지난일에 대한 뉘우침 없이 정치일선에서 활동하고,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가들 역시 정치적 신념이나 지조 없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는 세태를 비판한 글이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副題)가 달려 있으며,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박혀 있는 지조의 개념을 다양한 일화와 속담 등을 통해 적절하게 설명하고 변절에 대한 경계와 지성인의 기개를 논리적으로 풀어 제시하였다.

  작가에 따르면 지조란 순결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며,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첫번째 기준이다. 또한 지조란 역사의 객관적 상황을 냉철히 인식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올바른 길을 판단하고 지켜나가는 것이다. 아울러 지사(志士)와 정치가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고 난국의 지도자는 지사적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

 

  한편 변절은 단순히 절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해 올바른 신념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신념으로 일관했거나 훗날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는 경우에는 변절자로 매도할 수 없으며, 일제 말기의 친일전향과 광복 후 남조선노동당 탈당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 글은 논리적이고 교훈적이며 경세적인 중수필로서, 다양한 제재가 수필로 다뤄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명논설이기도 하다. 특히 단정적인 강한 어투와 힘이 넘치는 문체로 변절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지조 있는 삶의 자세를 강조하여 민족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자 한 필자의 의도가 인상적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전재

  일찍이 오대산 월정사 외전강사 시절 조지훈은 일제가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렬을 주지에게 강요한다는 말을 듣고 종일 통음하다 피를 토한 적도 있었다. 민족문화와 민주정치를 살리기 위하여 조지훈은 한 시대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진해 발언에 대해 이는 학자와 학생과 기자를 버리고 정치를 하려드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한 조지훈은 그로 인해 정치교수로 몰렸고 늘 사직서를 가지고 다녔다.

 

 

 

 

  대학 재학시절 나는 학생으로서 지훈 시인으로부터 강의를 받았다. 그의 시론 강의는 명강의여서 나를 매료시켰다. 또한 그가 1962년 <고대신문(高大新聞)>에 남긴 「큰일 위해 죽음을 공부하라」는 4.18 기고문은 고려대학교 학생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4.19 당시에 발표한 시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는 불의를 위해 싸우는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되기도 했다.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의분이 터져
  노도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구실 창턱에 기대 앉아
  먼 산을 넋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두 시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물결이
  의사당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쩐 까닭이냐.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무거웠다.
  나의 두 뺨을 적시는 아 그것은 뉘우침이었다.
  늬들 가슴 속에 그렇게 뜨거운 덩어리를 간직한 줄 알았더라면
  우린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기개가 없다고
  병든 선배의 썩은 풍습을 배워 불의에 팔린다고
  사람이란 늙으면 썩느니라 나도 썩어가고 있는 사람
  늬들도 자칫하면 썩는다고……

  그것은 정말 우리가 몰랐던 탓이다.
  나라를 빼앗긴 땅에 자라 악을 쓰며 지켜왔어도
  우리 머리에는 어쩔 수 없는 병든 그림자가 어리어 있는 것을
  너희 그 청명한 하늘같은 머리를 나무람 했더란 말이다.
  나라를 찾고 침략을 막아내고
  그러한 자주의 피가 흘러서 젖은 땅에서 자란 늬들이 아니냐.
  그 우로에 잔뼈가 굵고 눈이 트인 늬들이 어찌
  민족만대의 맥맥한 바른 핏줄을 모를 리가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학생들아
  늬들은 너의 스승을 얼마나 원망했느냐
  현실에 눈감은 학문으로 보따리장수나 한다고.
  너희들이 우리를 민망히 여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린 얼굴이 뜨거워진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사실은 너희 선배가 약했던 것이다 기개가 없었던 것이다.
  초연이 탓에 어찌 가책이 없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너희를 꾸짖고 욕한 것은
  너희를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우리처럼 되지 말라고
  너희를 기대함이었다. 우리가 못할 일을 할 사람은 늬들뿐이라고.

  사랑하는 학생들아
  가르치기는 옳게 가르치고 행하기는 옳게 행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따귀를 때리는 것쯤은 보통인
  그 무지한 깡패 떼에게 정치를 맡겨놓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늬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 줄 알았더면 정말
  우리는 너희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르칠 게 없는 훈장이니
  선비의 정신이나마 깨우쳐 주겠다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정말 쑥스러운 일이었구나.

  사랑하는 젊은이들아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 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자유를 정의를 진리를 염원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영원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이 시는 4·19 혁명이 일어난 지 하루 뒤인 20일에 쓴 것으로, 1960년 5월3일자 <고대신문>(제238호)에 실렸다. 조지훈 선생은 이 시에서 '무지한 깡패 떼들'에게 정치를 맡겨 놓은 채 현실에 눈감은 학문을 하고 있던 자신에 대한 반성과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피 흘린 제자들에 대한 스승의 찬사를 담고 있다.

 

 

 

  조지훈은 근면하면서 여유 있고 정직하면서 관대하고 근엄하면서 소탈한 현대의 선비였다. 가끔 강의 시간에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그는 껄껄 웃다가도 불의를 지적하는 대목에 와서는 준엄하고도 매섭게 변했다. 강매천이 절명의 순간에도 "창공을 비추는 촛불"로 자신의 죽음을 관조하였듯이 조지훈은 나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는 신념을 지니고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조지훈에게 멋은 저항과 죽음의 자리에서도 지녀야 할 삶의 척도였다. 조지훈은 호탕한 멋과 준엄한 원칙 위에 재능과 교양과 인품이 조화를 이룬 대인이었다.

 


한국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학문적 연구

 

  조지훈의 학문적 바탕은 현대교육만 받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 일찍이 조부 조인석과 부친 조헌영으로부터 한학과 절의를 체득했고, 혜화전문과 월정사에서 익힌 불경과 참선 연찬한 지훈은 한국학 연구가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가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서 광복이 되자 10월에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이 되고, 11월에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이 되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고려대 교수 시절 초대 민족문화연구소장으로서 민족 문화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8년 기관지 확장으로 작고하기까지 조지훈이 저술한 《한국민속대관》《멋의 연구》《한국문화사서설》《한국민족운동사》《시의 원리》 등의 저서는 한국학 연구의 영원한 명저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기획한 ‘한국문화사대계'의 연구를 다 마치지 못했다.



 

 


마을 뒤편의 지훈 시 공원(芝薰詩公園)


  지훈문학관 좌측으로 마을 뒤편 언덕을 따라 탐방로를 꾸몄고 언덕 위에 지훈의 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탐방로와 공원에 대표시 27편을 돌에 새겨 세웠다. 공원에는 지훈의 동상과 승무 춤의 조각이 있고, 조그마한 정자도 함께 세워 시적인 분위기를 살렸다. 탐방로를 따라 비석에 새긴 그의 작품을 읽으며 공원에 올라 조각 작품과 함께 정자나 벤치에 앉아 시를 일그으며 지훈의 시세계에 흠뻑 젖어볼 수 있다.



 

 


민족적 기개와 지조 갖춘 ‘선비의 집'

  조지훈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조지훈문학관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안쪽 산 아래에 있다. 문학관은 생가가지 걸어가는 길 양 옆에는 영양의 대표브랜드인 영양고추가 빨갛게 익은 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생가는 집의 원형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6.25때 소실된 것을 복구하면서 안채에 유리문을 다는 등 다소 변형된 부분도 있다. 집의 구조는 경북 북부지방이 일반적 형태인 안채와 사랑채가 폐쇄된 ‘ㅁ'자형을 취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사대부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시인 조지훈(趙之薰)의 시 ‘빛을 찾아가는 길'이다.

  열린 대문을 통해 호은종택을 들어섰으나 안채 문은 잠겨 있었다. 생가를 호은종택이라 이름 지은 것은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주실마을에 호은 조전이 처음 들어와 지금의 호은종택을 짓고 살면서 그 후손들이 과거를 통해 집안을 번창시킨데 연유한다.

 

  조지훈의 조부 조인석의 경우, 일찍이 변화된 세상을 읽고 상투를 자르고 양력설 제사를 지냈으며, 당시 일본으로 유학생을 보내는 등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신분질서가 엄연했던 시절에 그 기득권을 다 내놓고, 특히 여성들의 교육을 강조해서 교재까지 만들어 가르쳤던 조인석은 조지훈 형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혜로우면서 실천의지까지 겸비한 조부를 가까이 보아온 조지훈 형제는 혼란스런 세상을 돌파할 기상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형 조세림(본명;조동진)은 아주 적극적인 성격으로 마을 아이들끼리 소년회도 만들고 문집도 만들었으니, 그가 일찍 요절하지 않았다면 많은 일을 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조지훈 역시, 개인의 결단이 필요한 시기마다 합리적인 명분과 전체를 배려한 대범함을 보여주었다. 일제말기 그가 절필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간 일이나,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송시 쓰는 일을 거절한 일이나, 한국전쟁에 종군작가로 뛰어든 일이나, 4.19 이후 글을 통한 입장표명이나, 5.16이후 엄혹한 군부독재시절에 보여준 기개 등이 그러하다. 조부의 기개와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 손자에게까지 그대로 미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흔히 강직한 사람에게 따르기 쉬운 편협(偏狹)이나 완고함이 전혀 없이, 천지 호연지기(天地 浩然之氣)하는 문자 그대로 도량이 크고 넓으며, 정 많고 한(恨)이 많아 유교와 불교의 교양 바탕에 서구(西歐)의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조화(調和)하여 보다 높이 승화(昇華)시킨 것이 시 예술의 아름다운 정서와 융합하여 이뤄진 민족의 전형적(典型的)인 인간상(人間像)이라 하리라.

 

 

 

 

  경북 영양은 ‘문향영양’이라고 큰 빗돌이 길가에 세우고 문학의 향기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1900년대 초, 중반 이곳 지역출신 문학자들은 활동이 대단했다. 감천마을 출신인 오일도의 역할이나, 두들마을의 이병각, 이병철의 문학 활동 등은 주실마을의 조지훈 형제와 나란히 영양을 문향의 지역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식민지 시절을 지나온 작가들로 전통적인 문학소양과 함께 미감을 갖추고 있었으며 좌?우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도 비껴서는 일이 없이 전면에 서 있었다.

  따라서 영양에는 지훈문학관 이외에도 문향(文鄕)답게 오일도와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가 나고 자란 고장으로 곳곳에 이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주실마을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인 영양읍 감천마을에 오일도의 시비와 생가가 있다. 여기서 다시 석보 방면으로 20분을 달리면 이문열의 고향 두들마을이 나온다. 제조업체라고는 고추장 공장이 유일하다는 영양군이 조지훈과 소설가 이문열, 시인 오일도를 낳은 '문향(文鄕)'으로 자리매김해 외지인을 끌어들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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