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문학기행
초인(超人)의 시인, 이육사 문학관 탐방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
글·사진 남상학
도산서원에 들른 김에 2년전 한번 다녀온 적이 있는 이육사문학관을 다시 찾았다. 참가자 대부분 이육사문학관은 처음이라며 내게 안내를 부탁해서였다. 안동시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번지(불미골), 이육사((李陸史)의 고향 땅 2,324평의 대지 위에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2004년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육사문학관을 건축, 개관하였다.
이육사문학관은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2300평의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 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 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생활 모습 등도 재현해 놓았으며, 2층에는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원천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전시기획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탁본체험코너, 시상(詩想)전망대 등이 갖추어져 있다.
안동은 이육사(李陸史)고향이다. 이육사는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에서 아은(阿隱) 가호(家鎬)의 5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14세손이다. 본명은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이며, 후에 활(活)로 개명했다. 육사(陸史)는 호이다. 조부인 치헌(痴軒) 중직(中稙)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조부가 연 예안(禮安)의 보문의숙(普門義塾)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1921년 2세 연하인 순흥 안씨 일양(一陽)과 결혼하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어 형 원기(源棋),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했고, 그 해 일본 도쿄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 다시 북경으로 가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제 1기생이 되어 6개월 과정을 마치고 이듬해 귀국했으나 의사(義士)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폭파 사건에 그의 형제들과 함께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 때의 감방의 번호가 264호였으므로 호를 육사(陸史, 64)라고 불렀다. 출옥 후 북경으로 다시 가서 북경 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졸업했다. 그 때 중국에서 노신(魯迅0을 알게 되었고(32), 귀국하여(1939.9) 최초의 시작품 <황혼(黃昏, 新朝鮮, 1933)>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 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 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來日)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暗暗)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 <황혼> 전문
서정적, 상징적 성격을 지닌 초기의 시는 침울한 정신세계를 추상적인 말들로 노래했다. 그에 해당하는 작품은 <황혼>을 비롯하여 <교목(喬木)> <호수> 등이 있는데 <황혼>은 독백과 기원의 어조로 황혼을 통한 자아와 세계의 통일성, 혹은 세계와의 합일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육사는 황혼을 매개로 하여 나와 세계를 일체화하려 한 것이 아닐까.
<황혼>의 발표를 계기로 시인 신석초(申石艸)와의 교분을 쌓으면서 1936년에서 1940년에 걸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으나, 이 무렵 건강이 좋지 않아 신석초, 최용(崔鎔, 서울 상우회 회원) 등과 남쪽 지방을 두루 여행을 하며, 구국에 대한 일념과 한편으론 멋과 술로 생애를 일관하며, 한때 경주에 있는 삼불암(三佛庵)에서 요양을 했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그의 시는 인간과 세계의 여러 현상에 관심이 뻗쳐지는 쪽으로 변모되었지만, 일제 암흑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1939년 <청포도(靑葡萄)>, <광야(曠野)> 등을 발표하면서 저항의 의지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포도> 전문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육사는 작품 <청포도>를 통하여 억압의 현실 속에서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을 노래한다. 그의 시는 무엇보다도 투철한 현실 인식과 강한 신념에서 비롯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 전문
이 시 <광야>는 앞의 <청포도>와 더불어 미래의 새로운 세계, 조국의 광복을 희구하는 심정을 암시한 수작(秀作)이다. 저항시로서 그의 시는 무엇보다도 투철한 현실 인식과 강한 신념에서 비롯된다. 즉, 시간적으로는 아득한 천고와 미래의 사이, 공간적으로는 만물이 눈에 덮인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극한 상황에서, 그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장엄한 미래에 대한 기대뿐이다.
이러한 극명한 현실인식과 조국 역사의 미래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에 자기희생이 가능하였고, 저항적·지시적 결의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광야>에 드러난 강렬하고도 남성적인 시어들은 바로 이러한 주제 의식을 형상화하기 위한 시인의 의도를 담고 있다. 따라서 서정적 자아가 처해 있는 정황은 대체로 한발 디딜 곳조차 없는 절박한 한계상황으로 설정되어 있다. 시인은 이러한 극한적인 상황을 정신적으로 초극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획득한다. 대표작인 시 <절정(絶頂, 文章, 1940)은 일경의 쫓김을 받고 있 는 절박한 상황을 잘 비유하였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 전문
‘서릿발 칼날 진’, 그래서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곳일지라도 ‘무지개’를 기다리는 마음은 강한 저항 의지와 현실 극복 의지로써 현실 극복, 내지는 비극적 자기 초월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런 선구자적 강인함이 이육사의 시 세계라 할 수 있다.
총 39편에 달하는 비교적 적은 작품이지만 육사의 시는 대부분 식민지 치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육사의 시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체와 <청포도>에서 나타난 실향 의식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과 초인의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망국민으로서의 비애와 조국 광복에 대한 비원을 시에 새겨놓고 있는 것이다.
육사 시가 갖는 우리 문학사, 특히 시사적 의미는 다음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첫째, 1930년대 전반을 풍미하던 모더니즘의 비인간화 경향에 대한 비판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둘째, 고전적인 선비 의식과 한시의 영향으로 전통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셋째, 한국시에 남성적이고 대륙적인 입김을 불어넣었다. 넷째, 죽음을 초월한 저항 정신과 시를 통한 진정한 참여를 보여 주었다. 특히 넷째 측면은 윤동주의 시작과 함께 일제 말 우리 민족 문학의 공백기를 메워주는 중요한 성과라고 할 것이다.
중국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육사는 중국문학의 소개에도 열심이었으나, 1943 중국으로 갔다가 바로 귀국, 그 해(1943년)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 이듬해에 북경 감옥에서 그토록 염원했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사했다. 사망 15일 후에 유해가 서울에 도착,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60년 고향 도산면 원천리 뒷산(지금의 이육사 문학관 뒷산)으로 이장하였다.
성격이 강직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지조로 일관, 평생 조국 광복운동으로 정처(定處)와 안일(安逸)이 없었다. 국내외 대소 사건이 있을 때마다 검속(檢束), 투옥되기 17회에, 대구 서울 북경의 왜옥(倭獄)을 드나들었고, 그의 작품 역시 이러한 절박한 상황과 조국의 미래에 대한 신념이 높은 차원으로 상징화되어 표현되었다. 유고시집 <육사시집>(서울출판사, 1946)이 간행되었고, 다시 <청포도>(1964), <광야>(1971년) 등으로 제명이 바뀌어 간행되었다.
그리고 문학관 뒤로는 육우당(六友堂)이 있다. 이 건물은 육사의 6형제가 살던 집으로 생가의 모형이다. 이 집은 이육사가 수필에서 집을 회상하며 “은촉대도 있고, 훌륭한 현액도 있기는 하나, 너무도 고가(古家)라 빈대가 많기로 유명하다”고 표현했던 바로 그 집을 재현한 것이다. 육우당 앞의 뜰인 잔디광장을 가로지르면 항상 맑음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청포도 샘’이 있고, 문학관 우측 정원에는 육사 동상(銅像)과 <절정> 시비가 있다. 정원에는 연못도 있고, 생가 위쪽으로는 청포도 밭도 있다.
문학관 우측으로 난 ‘청포도오솔길’을 2.8㎞ 올라가면 이육사묘소가 있고, 문학관 앞길을 따라가면 200m지점 길가에 생가터가 나온다. 이곳에 있던 생가는 댐의 건설로 비가 많이 올 때는 물이 차는 지역이어서 도로로 물길을 막아 <청포도> 시비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주변에는 도산서원을 비롯하여 퇴계종택, 퇴계생가가 가까이 있고, 또 청량산이 있어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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