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생가와 문학관
실개천 흐르는 ‘향수’의 고장 옥천을 가다
글·사진 남상학
옥천의 구읍(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실개천이 흐르는 조용한 마을에 고향의 정경을 오롯이 그려낸 시인 정지용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지용 생가를 찾아가는 여정은 그의 대표작인 ‘향수’나 ‘백록담’이 주는 감동만큼이나 가슴 설렌다.
정지용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시인이라는 누명으로, 6·25 이후엔 월북시인으로 낙인이 찍혀 그의 작품 모두를 판금시키고 학문적인 접근조차도 금지시켰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88년에서야 그의 작품은 해금 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듯 시대의 희생양으로 질곡의 현대사와 그 궤적을 함께 그려온 시인이었기에 그의 생가를 찾는 발길은 더욱 애틋하다.
경부고속도로 옥천I.C를 나오면 신호등이 설치된 시내 한복판으로 들어선다. 정지용 생가는 구읍(舊邑)사거리에서 수북방향으로 청석교 건너에 위치한다. 옥천읍의 향리 중 죽향 1리와 3리, 상계리, 하계리, 문정1리, 교동리 등 5개 마을을 두고 옥천 사람들은 구읍이라 별도로 부르고 있는데 그 연유는 이렇다. 옥천에 철도역사가 설치되기 전에는 구읍은 주요시설과 상권이 밀집되어 있는 옥천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가 구읍을 통과하는 것을 이 고장 유지들이 반대해 결국 옥천역은 현재 구읍에서 떨어진 곳(옥천읍 금구리)에 설치되고 상권 또한 옥천역 인근으로 옮겨가 이곳은 옛 영화를 간직한 조용한 시골 소읍으로 자리 잡게 됐다. 따라서 구읍엔 곳곳에 일제식 건물과 서구식 교회당, 개량민가 등 옛 영화의 흔적만 남아 있어 오히려 정감 있는 풍광을 자아낸다. 구읍에서 만나는 풍경들이 영화세트장으로 착각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정지용의 시 <고향>을 음미해 본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삶의 근원을 이루는 원초적 공간이다. 특히 현실에서의 삶이 힘겹고 고통스러울수록 고향에 대한 향수는 더욱 커지는 법이다. 이 시의 시적화자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고향이 현실 속에서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과 대비되는, 가족의 따뜻함과 유년시절의 기억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적 자아는 막상 되돌아온 고향에서, 꿈속에서 그리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상실감에 젖는다. 정지용 초기 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고향'은 그리움을 안고 막상 찾아온 고향에서 느끼는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자연의 모습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상실감으로 변모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공동체적 삶의 양상이 현실 속에서 피폐화된 채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실개천이 흐르는 정지용 생가
구읍사거리에서 수북방면으로 길을 잡아 청석교를 건너면 ‘향수'를 새겨 놓은 시비와 생가 안내판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 정지용 생가다. 1996년에 복원된 생가 앞 청석교 아래는 여전히 ‘향수'의 서두를 장식하는 실개천이 흐르고, 그 모습은 변한지 오래이지만 흐르는 물은 예전과 같아 맑기만 하다.
송사리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는 실개천은 예나 다름없이 흐르지만 콘크리트로 포장된 둑길을 걷자면 시적 감회는 저만치 멀리로 달아나 버리는 것 같아 아쉽다. 깔끔하게 단장된 생가의 입구에는 널리 알려진 그의 시 ‘향수’ 전문을 새긴 시비(詩碑)가 방문객을 먼저 반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둘러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향수(鄕愁)’ 전문
박인수 이동원이 함께 불러 유명해진 이 시는 우리네 모두의 가슴에 새겨진 고향의 정경을 오롯하게 담아낸 정지용의 대표작이다. 이 시는 농경 시대 한국인의 고향을 그려낸 것으로, 홀수 연은 고향의 잊을 수 없는 심상을 제시하고 있고, 짝수 연은 후렴구로서 동어 반복을 통해 잊을 수 없는 감정을 강조하고 있다. 날로 비인간화되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옛 고향의 정취에 젖어들도록 하는 시이다.
1988년 3월 31일, 제24회 하계올림픽이 열리던 해 비로소 해금(解禁)되고, 그 해 4월 정지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용회'를 만들어 모임을 갖게 되면서 오랜 시간 묻어둬야 했던 그의 대표시 '향수'는 1989년 10월 3일, ‘시인정지용흉상제막기념공연'이 있던 날 호암아트홀에서 그 잊혀져간 고향의 옛 모습은 온 국민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날 정지용의 시 ‘향수'를 가사로 하여 이동원의 다정한 목소리와 멀어져간 고향을 쫓는 듯, 아득한 박인수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노래 ‘향수'는 온 국민을 매료시켰다. 이 노래가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자 대중 위에 도도하게 군림하던 국립오페라단원 테너 박인수를 대중 속으로 끌어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돌에 새긴 시를 읽고 있자면 저절로 입가에서 박인수와 이동원이 함께 불렀던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방문 전 인터넷을 찾아보니, 지용 생가는 얼마 전만 해도 문이 늘 열려있어 여행자들은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맘 편하게 드나들 수 있었으나 자꾸 훼손되는 바람에 생가 바로 앞의 구읍식당( 043-73...)에서 열쇠를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필자가 방문한 날에는 사립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유인즉 방문한 날이 지용축제 바로 전날이어서 그 준비 작업이 한창이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 담에 잇대어 장독대가 있고 장독대 앞으로 우물이 있다. 일반적인 경우 장독대는 뒤란에 위치하나 정지용 생가의 장독대는 우물가 담장 밑에 다소곳하다. 작지만 아담하게 꾸면 생가는 초가 두 동 본채와 행랑채로 되어 있다.
본채는 지용이 태어나서 자란 보금자리로 왠지 친근함이 묻어난다. 주 생활공간인 2개의 방 외에 뒤란으로 한 칸 내어 만든 방이 하나 더 있다. 이 방은 뒤란 담 쪽으로 출입문이 별도로 나 있으며 방 안쪽에 안방과 연결되는 통로가 있는데 길이는 5m 정도로 사람하나 지나갈 만큼 좁다.
실내에는 그의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였었음을 알리는 가구(家具)가 배치되어 있고, 시선 닿는 곳마다 정지용의 시를 걸어놓아 시를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질화로와 등잔은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이라 표현한 ‘향수'의 한 구절을 다시금 음미하게 한다. 부엌에는 곡식과 음식을 가공하는 도구인 돌절구, 나무절구와 공이가 놓여 있다. 그리고 별채인 행랑채 헛간에는 당시 사용되었을 법한 농기구들이 있어 농가의 풍경을 자아낸다.
그리고 옆으로 난 또 하나의 사립문이 있는데, 이 사립문을 나서면 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이 있고 여기에 7∼8m 길이의 넓적한 바위 두 개가 다리처럼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도랑 끝에서 옛 향수를 떠올리려 애를 쓰기라도 하듯 열심히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도랑 위에 놓인 이 길쭉한 바위 판석보는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바로 그 실개천에 걸쳐 있던 다리였는데 1996년 7월 30일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왜정 때 신사에 세웠다가 해방되고 나서는 땅 속에 묻히는 수난을 겪은 끝에 지금은 지용 생가 마당까지 와있다고 하니 특이한 생김새 덕분에 바위가 치른 고초도 만만치 않다.
1988년부터 이곳 생가를 중심으로 정지용을 추모하고, 그의 시문학 정신을 이어가며 더욱 발전시키자는 뜻으로 매년 5월에 ‘지용제’라는 문화축제를 연다. 전국의 축제 가운데 문학을 주제로 하는 흔치 않은 축제이다. 따라서 ‘지용제’는 정지용의 삶의 향기를 더욱 가까이 느끼며 그의 문학을 가까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옥천의 문학축제로 발전해 가고 있다.
지용의 생애와 문학을 정리한 정지용기념관
생가를 돌아보고 나서 생가 뒤쪽에 그의 생애와 문학을 총망라한 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지용기념관은 그의 생가가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된 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 2005년 5월 세워졌다. 그의 생애와 문학을 총 망라한 기념관이 세워지면서 명실공이 정지용의 발자취와 생애, 문학을 한자리에서 돌아볼 수 있게 된 셈이다. 기념관 앞마당에는 지용의 동상이 방문하는 사람을 맞는다.
정지용문학관을 들어서면 안내데스크가 정면에 있고 우측으로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정지용의 밀랍인형이 벤치에 앉아 있는데 양옆에 빈자리를 만들어 방문객이 인형과 함께 기념촬영을 할 수 있게 했다.
사진을 찍고 들어서는 곳은 문학전시실. 전시실의 동선은 우측 어두운 터널 같은 입구부터 시작하는데 관람자가 이곳에 들어서면 음악과 함께 정지용의 시 세계를 음악과 이미지로 관람객에게 전달하는데 ‘ㄱ’자의 벽면 귀퉁이 양 벽면에 영상을 비추어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관람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문학전시실은 테마별로 정지용의 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지용연보, 지용의 삶과 문학, 지용문학지도, 시ㆍ산문집 초간본 전시 등 다양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이들 각각의 테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용연보”는 정지용과 그의 시대를 시인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문학사의 전개 속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곳이며 스크린 북에 상영되는 연상을 통해 추억의 앨범을 넘기듯 시인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지용의 삶과 문학”은 연대기와 주제별로 향수, 바다와 거리, 나무와 산, 산문과 동시 등 4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동선을 따라 좌측으로 이어진 벽면을 장식한 “지용문학지도”는 ‘한국 현대시의 흐름과 정지용’의 시문학에 관해 알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현대시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가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그 흐름 속에서 정지용시인이 차지하는 비중을 확인 할 수 있다.
“시ㆍ산문집 초간본 전시”는 『정지용시집』, 『백록담』, 『지용시선』, 『문학독본』,『산문』등 정지용 시인의 시와 산문집 원본을 전시하고 육필원고 및 초간본의 내용을 영상으로 감상 할 수 있도록 하여 당시의 상황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토록 테마를 따라 가는 동선은 전시실의 벽 3면을 가득채운 문학전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으로 흥미성과 오락성을 갖춘 문학체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법을 활용하여 관람객이 즉석에서 문학을 체험 할 수 있도록 했다. 양 손바닥을 내밀면 손 위에 스크린 되어 흐르는 시어를 읽으며 느끼는 “손으로 느끼는 시”, 음악과 영상을 배경으로 성우의 시 낭송을 들으며 시를 폭넓게 이해 할 수 있는 “영상시화”,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가곡 향수를 감상 할 수 있는 “향수영상”, 이해하기 힘든 시어를 검색해 그 의미와 시적표현을 이해 할 수 있는 “시어검색”, 배경음악과 음악과 함께 자막으로 흐르는 정지용 시인의 시를 관람객이 직접 낭송해 보고 녹음된 테이프를 가져 갈 수 있는 “시낭송 체험실” 등은 정지용의 시문학 세계를 눈과 귀,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특별한 감동이 있는 공간이다.
그 외에 정지용 시인의 삶과 문학, 인간미 등을 서정적으로 회화적으로 그린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이 상영되는 “영상실”과 강좌, 시 토론, 세미나, 문학 동아리 활동 공간이며 단체관람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 할 수 있는 열린 문학공간인 “문학교실”이 마련되어 있다. 사전에 사용신청을 하면 이용할 수 있다.
전통 초가의 질박한 아름다움, 그 집 앞 실개천에 향수(鄕愁) 흐르는, 시향(詩香) 넘실되는 시인의 생가와 그의 문학관은 청정고을 옥천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생가와 문학관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발길은 우리네 마음속에 소중한 자산으로 영원히 남아 있는 고향, 그 고향에 대한 애틋함이 진하게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잊혀져가는 우리 고향의 정경을 오롯이 그려낸 국민시인 정지용, 그는 이미 갔으나 작품으로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다.
정지용의 인생과 문학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부친 정태국과 모친 전미하의 장남으로 출생, 지용의 아명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하여 ‘지룡(池龍)’이었고 이 발음을 따서 본명은 지용(芝溶)으로 했음.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1913(12세)년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 옥천보통공립학교와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도시바(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휘문고보를 다닐 때부터 습작활동을 시작하여, 박팔양 등 8명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프린트판으로 10여호 발행하고, 1922년 ‘풍랑몽’을 쓰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동인과 《가톨릭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 교수, 경향신문 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 인민군에 의해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납북되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고, 그의 죽음에 대해 소문과 추측만이 떠돌았다. 시집으로 『정지용시집』, 『백록담』, 『지용시선』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문학독본』, 『산문』이 있다.
정지용의 시세계(詩世界)
정지용은 우리 현대 시사에서 언어에 대한 자각을 각별하게 드러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까지의 대다수 시인이 감정의 분출에 의거하여 본능적인 시를 썼다면 1920년대 초반에 작품 발표를 시작하여 1930년대 대표적인 시인으로 군림하게 된 정지용에 의하여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선명한 심상과 절제된 언어로 포착해 내는 시가 씌어진다.(20년대 소월이 자아표출을 통하여 자기감정을 과다하게 노출한 감상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보였다면, 지용은 대상의 뒤에 자신을 숨기고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명징한 모더니즘-이미지즘의 시 세계를 열어 보였다.)
감정을 감각화하는 방법은 정지용이 철저히 인식했던 언어에 대한 자각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절제된 언어의 구사는 정지용의 시에서 일관되는 특성이지만 그의 시세계가 그리는 궤적은 몇 단계의 변모 과정을 보인다. 정지용 시의 전개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23년경부터 1933년경까지의 서정적이며 감각적인 시, 1933년 「불사조」 이후 1935년경까지의 카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적인 시, 그리고 「옥류동」(1937), 「구성동」(1928) 이후 1941년에 이르는 동양적인 정신의 시 등이 그것이다.
120여 편의 많지 않은 작품이지만 거기에는 시골(전통)과 도시(근대), 동심(동요)과 구원(종교시), 바다(이미지즘)와 산(동양정신) 등이 빛나는 언어로 완성되어 있다. 절제된 감정과 사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 그리고 섬세한 언어 감각으로 빚은 시편들을 통해 그는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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