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문학여행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산실 담양을 찾아서
- 죽향(竹香)·문향(文香)·사림(士林)의 고장 -
글·사진 남상학
▲담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나무 숲
일찍이 담양을 두고 죽향(竹香)·문향(文香)·사림(士林)의 고장이라 일컬어 왔다. 예로부터 대나무 숲이 울창한 담양은 죽세공품으로 이름난 고장이었다. 그만큼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곳이어서 심성이 깨끗하고 인심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또 면앙정 송순(宋純)을 비롯하여 고경명, 기대승, 임제, 정철 등 조선 중기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나라를 걱정하며 학문과 문학을 발전시켰던 땅이다. 특히, 담양은 가사문학을 비롯한 국문학의 산실이었다. 문학이나 풍류를 떠나서는 그곳을 말할 수 없을 만큼, 담양은 문학과 예술이 넘쳐나는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발길 닿는 곳 어디든 누정(樓亭)들이 서 있다.
▲면앙정 안내판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 정신을 이어받은 조선 시대 사람들은 이곳을 본거지로 하여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 낙향하여 무등산(無等山) 정기 어린 이곳 담양 일원에 누(樓)와 정자를 짓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누각과 정자가 60여 채, 그래서 흔히 담양을 두고 '한국 정자문학의 1번지'라고 부른다. 주변에 산재한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송강정, 면앙정 등은 호남 시단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으며, 여기서 태어난 문학이 조선 시대에 꽃 피운 가사문학(歌辭文學)이다.
▲식영정 :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의 터
송순은 '면앙정가'를 지어 조선 시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길을 열면서, 이어 송강 정철이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을 비롯하여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 '충효가' 그밖에도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담양의 죽세공품은 인건비의 상승과 값싼 중국제품의 수입으로 명성을 잃고 있지만, 아직도 대나무 고장의 특성을 살려 해마다 5월 초에 '대나무 축제'를 열고 있다.
송순(宋純)의 숨결이 깃든 면앙정(면仰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면앙정
담양읍에서 서남쪽으로 6㎞ 정도 떨어진 봉산면 제월리 마을 동산 위에 있다. 송순은 중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 이후 개성부 유수(留守), 이조판서, 대사헌, 한성부 판윤(判尹), 의정부 우참찬(右參贊) 겸 춘추관사(春秋館使사) 등을 지냈다. 군자다운 인품과 고매하고 원만한 대인관계 때문에 그의 정계 생활은 순탄하였다고 한다.
그는 만년(중종 때)에 관직에서 물러나 그의 고향인 이곳 담양에 내려와서 기촌(企村) 제월봉(霽月峯) 밑에 그의 호를 따서 면앙정을 짓고, 이곳에서 퇴계 이황(退溪 李愰)을 비롯하여 강호 제현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하여, 기대승, 고경명, 정철, 임제 등과 함께 면앙정가단을 형성하여 수많은 문학 작품을 남긴 유서 깊은 장소이다.
▲가까이서 찍은 면앙정의 모습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세원진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전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하였고, 추녀 끝에 4개의 활주(活柱)가 받치고 있다. 길에서 정자로 오르는 길 양쪽으로 대나무 숲이 우거지고, 정자 앞에는 수령 300년인 보호수가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또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담양 봉산 들판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며, 멀리 바라다 보이는 추월산과 금성산성(포곡식 산성) 그리고 삼인산, 불태산, 병풍산 등은 이 곳 면앙정의 풍치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그의 가사 '면앙정가'는 만년에 면앙정을 짓고 여생을 보낼 때, 면앙정을 중심으로 한 그곳 경치를 읊은 것이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르면 하늘이라.
이 중이 정자 스니 호연한 흥취 이네
풍월을 부르고 산천을 끌어드려
명아주로 지팡이 삼고 한평생을 보내려네
(俛有地 仰有天 亭其中 興浩然 招風月 挹山川 扶藜杖 送百年)
▲면앙정의 글
송순의 작품으로는 가사 작품인 '면앙정가' 외에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 '면앙정 단가', '오륜가' 등이 있는데, '면앙정가'는 면앙정을 중심으로 한 주변 경치를 읊은 작품이다.
"무등산(无等山) 한 활기 뫼히 동다히로 버뎌이셔, 멀리 떼쳐와 재월봉(齋月峯)이 되여거날, 무변 대야의 무삼 짐쟉 하노라 일곱 구배 한대 움쳐 믄득믄득 버려난 듯" - <면앙정가>의 일부
'사미인곡(思美人曲)'의 배경이 된 송강정(松江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
▲ 송강정
면앙정에서 광주로 가는 국도변 담양읍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정자다. 선조 17년(1584년) 송강 정철이 대사헌을 지내다 당쟁으로 물러 나와 초막을 짓고 살던 죽림정(竹綠亭)을 후손들이 정철을 기리기 위해 1770년에 세워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정자는 동남향으로 앉았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방이 꾸며져 있다. 정자의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편액이 보이고,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넓은 평야가 있으며 뒤에는 증암천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그 앞으로 확장된 국도가 지나가는 바람에 시야가 가려진 느낌이다. 송강정 옆에는 1955년에 건립된 '松江鄭先生詩碑'(송강정선생시비)가 서있고, 뒤편에는 가느다란 대나무들이 얕은 담처럼 둘러져 있다.
▲ 송강정과 그 옆에 세운 송강 정철의 시비
송강은 명종 때 27세로 과거에 급제하면서 율곡 이이와 함께 호당(湖當)에 들어갔고, 서인의 거두로 불리면서 우의정(右議政)까지 지냈으나 그의 정치적 생애는 시대적 분위기와 더불어 파란만장했다. 그의 가사 작품인 관동별곡(關東別曲)'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강원도 지방의 절경을 노래한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1585년부터 1589년까지 이곳에 머무른 4년 동안 조용한 여가생활을 보내면서 그의 가사 작품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롯한 뛰어난 단가와 가사를 지었는데, '사미인곡'은 선조 대왕에 대한 그리움을 이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젊은 여인에 의탁하여 읊은 것이며,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의 속편으로 두 여인의 대화체로 꾸민 것으로, 두 편 모두 가사 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이다. 소나무 등걸 사이로 펼쳐지는 넓은 들판과 멀리 올려다 보이는 무등산의 웅장한 자태는 당대 명인의 시심을 느낄 만하다.
▲ 송강정 판각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날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대 노여 업다
평생에 원하요대 한데 녜자 하얏더니 늙거야 므사 일로 외오 두고 글이난고'
- '사미인곡'의 일부
그림자도 쉬고 있는 식영정(息影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
▲식영정
군남면 지곡리에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의 식영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성산(星山) 한끝 높직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이 정자는 조선 명종 때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는 정각을 세우고 살던 김성원(棲霞堂 金成遠)이 담양 부사를 지낸 장인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을 위해 지은 것이다.
임억령은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했으며 시와 문장에 탁월하여, 아름다운 경치와 좋은 주인을 찾아 이 곳에 찾아온 수많은 문인·학자들과 이곳에서 보냈다. 또 김성원은 송강 정철의 처외재당숙(妻外再堂叔)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나이가 많았으나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였다. 그 많은 학자·문인 중에서도 임억령, 김성원, 정철, 고경명은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들은 식영정에서 보고 듣는 풍경들을 시제로 하여 수많은 시를 남겼다. 특히 송강의 '성산별곡(星山別曲)'은 이 정자에서 바라다 보이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주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 곳 역시 송강문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건물의 네 귀퉁이에 모두 추녀를 달아 만든 집)으로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식영정 옆의 우거진 노송 옆에는 '성산별곡 시비'가 있다.
인생 세간의 됴흔일 하건마는 엇디 한 강산을 가디록 나이 녀겨 젹막 산듕의 들고 아니 나시난고 송근(松根)을 다시 쓸고 듁상(竹床)의 자리 보아, 져근덧 올라 안자 엇던고 다시 보니, 쳔변(天邊)의 떳난 구름 셔석(瑞石)을 집을 삼아, 나난 듯 드는 양이 쥬인과 엇더한고" - <성산별곡>의 일부
▲식영정 아래 뒤뜰에 세운 부용당
그 뒤로는 곰실곰실한 소나무가 가득한 성산 봉우리가 버티고 섰고, 앞으로는 광주호가 내려다보이며, 그 건너로 무등산이 언제나 듬직하게 바라다 보인다. 학문과 풍류로 살다간 옛 선인들의 삶의 모습이 부럽다. 계단 아래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기념 석물 뒤엔 연못을 낀 부용당과 김성원이 거처하던 서하당이 나란히 자라잡고 있다.
또 주변에는 이른바 누정문학의 본고장답게 정철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환벽당, 취가정 등이 산재해 있다. 환벽당(環碧堂)은 식영정으로부터 300여m의 거리에 있으며, 명종 때 나주 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가 창건하고 육영에 힘쓰던 곳으로, 대표적인 제자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등이 이곳에서 학문과 문학을 배웠다고 한다.
▲송강 정철이 공부하던 환벽당
취가정(醉歌亭)은 임진왜란 때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옥사한 의병장 춘장공 김덕령(金德齡)의 혼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과 집안 사람들이 세운 정자로 정자의 이름은 충장공의 취시가(醉時歌)에서 따온 것으로 광주호 위쪽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식영정, 환벽당은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으로 불리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이다.
문화 유산의 전승·보존을 위한 가사문학관(歌辭文學館)
(2000년 10월 개관)
▲깔끔하게 잘 정돈된 가사문학관과 건립비
가사문학의 산실인 남면 광주 호변에 가사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담양은 일찍이 가사문학을 꽃 피운 고장이었다.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충효가, 유도관의 경술가·사미인곡, 남석하의 백발가·초당춘수곡·사친곡·원유가, 정해정의 석촌별곡·민농가 및 작자 미상의 효자가 등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르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담양군에서는 이 고장 선인들이 꽃 피운 가사문학 관련 문화 유산의 전승·보전과 현대적 계승·발전을 위해 1995년부터 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 200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본관과 부속 건물인 자미정·세심정·산방·토산품점·전통찻집 등이 있다.
▲가사문학관 옆의 정원과 전시관
본관 1전시실에는 면앙 송순과 송강 정철에 대한 소개 글과 함께 면앙정, 송강정 전경 사진이 커다랗게 있으며, 면앙정가, 성산별곡, 관동별곡 등 가사의 낭송기기와 이서의 낙지가, 백발가, 면앙집, 면앙정가, 회병연도(면앙의 회갑기념잔치그림), 임금이 송강에게 하사한 옥배와 은배, 송강집 목판, 속미인곡의 가사악보, 송강집 등이 전시되어있다.
2층에 있는 2전시실과 3전시실에는 석천 임억령, 소새처사 양산보, 하서 김인후, 서하당 김성원, 미암 유희춘, 제봉 고경명, 정극인, 조위, 백광홍, 허난설헌, 조우인, 박인로, 최현 등의 작품으로 가사문학과 관련된 많은 가사집이 전시되어 있다. 또 시청각실, 갤러리 등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조선의 대표적 전통 정원 소쇄원(瀟灑園)
(전라남도 사적 제304호로 지정)
▲소쇄원의 안내도
무등산 자락의 상산 아래 자리잡은 소쇄원은 완도군 보길도에 있는 고산 윤선도의 부용동과 함께 조산 시대 대표적 정원으로 광주광역시에서 가깝고 도립공원인 무등산과 광주호를 끼고 있어 주변의 풍광이 빼어나다.
단순히 계곡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계곡의 물을 품고 세워진 곳. 자연과 인공을 교묘하게 조화시킨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원림(原林)인 셈이다. 우선 소쇄원 입구에 들어서면 죽향 담양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청량한 대나무 숲이 길 양옆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소쇄원의 제월당
그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아름드리 나무들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과 계곡을 만나는데, 오랜 세월의 연륜이 느껴지는 이 나무들과 정자 건물, 그리고 계곡을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찾는 이의 마음을 한 순간에 사로잡는다.
소쇄원은 조선 시대 정암 조광조(정암 趙光祖)의 문하생이었던 소쇄옹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지은 민간 정원. 그는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화성군 능주로 귀양을 가게 되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이 곳에 낙향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이라 한 것은 양산보의 호인 소쇄옹에서 비롯된 것으로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
▲소쇄원의 제월당 당호
본래 1만여 평의 규모였으나 지금은 1,350평으로 줄어들었고, 10여 동의 건물 중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만 남아 있다. 제월당은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란 뜻으로 간결한 우리의 건축 양식을 축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 '소쇄원 사십팔영시(四十八詠詩)'(1548)가 걸려 있고, 1755년(영조31년)에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圓圖)'가 현재까지 남아 있어 소쇄원의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곳에는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 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했다. 냇물 위에 돌담을 쌓아 올린 오곡문,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정원을 꾸민 원림 중 최고봉으로 꼽힌다.
또 하나의 원림 명옥헌(鳴玉軒)
▲이곳의 명물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이 멋지다
식영정에서 거슬러 올라와 고서에서 창평 쪽으로 가다보면 이 지역의 특색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를 만난다. 이 가로수 길을 달려가면 후산 마을 안쪽 산아래 명옥헌(鳴玉軒)이 있다.
산기슭을 타고 내리는 계류를 이용한 위 연못과 아래 연못이 있고, 그 중간에 정자를 지었다. 조선 인조 때 예문과 관원을 지낸 명곡 오희도(吳熙道, 1584-1624)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그의 넷째 아들 이정 오명중(以井 吳明中)이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道藏谷)에 헌을 짓고,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부딪치는 소리 같다고 하여 명옥헌이라 이름을 붙였고, 그후 100여 년이 지나 후손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다.
▲명옥헌의 연못의 모습이 정겹게 보인다
정자도 정자지만 규모 있게 다듬어진 정원이 무척 아름답다. 주변의 자연 경관을 빌어 자연순응적으로 조선 시대 정원의 특징인 대지중도형(大池中島形)을 도입하였다. 연못 가운데 둥그런 섬이 있고 연못가에는 약 20주의 해묵은 배롱나무와 적송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어 뛰어난 조경미를 자랑하고 있다.
정자 위에도 작은 연못이 있는데 역시 연못 가운데 바위가 섬처럼 놓여 있고, 이 연못 둔덕에도 역시 배롱나무 고목들이 얽혀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류는 먼저 이 못을 채우고, 다시 흘러서 아래의 큰 연못을 채운다. 연못 위쪽 암반에 명옥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우암 선생의 글씨라고 전하는데, 지금 이 정자에 걸려 있는 현판은 이 글씨를 모각한 것이라고 한다.
▲못 위에 자리잡은 명옥헌의 모습
명옥헌이 있는 후산 마을에는 은행나무 하나가 있는데, 이 나무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 마을에 숨어살던 오명중의 아버지 오희도를 만나러 왔다가 말을 맸다는 나무로 수령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키가 30m가 훨씬 넘어 보인다. 이 은행나무를 보려면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야 하므로 자동차를 명옥헌 연못 앞에 세워두고 걸어가는 것이 좋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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