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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국향 그윽한,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고향 질마재

by 혜강(惠江) 2006. 2. 11.

 

미당문학관과 생가

 

국향 그윽한,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고향 질마재

 

 

글·사진 남상학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 나들목에서 서쪽으로 소요산 자락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신화(神話)의 마을이 있다. 소 등에 얹는 짐받이 ‘길마’처럼 생겼다는 고개 ‘질마재’는 미당 서정주의 고향인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질마재엔 한 150호나 살았을랑가. 하나같이 가난을 타고나 전답을 소작하거나 조그마한 배로 생계를 꾸렸다. 그도 저도 아니면 소금막에서 날품팔이를 하고 질마재를 넘어 다니며 어물행상을 했다.’ 미당의 회상이다. 그 마을에서 미당은 열 살까지 살았다.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고향인 선운리 일대에는 미당의 생가, 폐교를 개조한 미당시문학관, 미당의 묘 등이 들어서 있다.



고향 질마재와 그의 생가(生家)

 

 

 

  미당생가는 미당시문학관 조금 옆에 있다. 걸어가도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다. 새롭게 만든 듯한 번듯한 ‘미당교’ 다리를 건너면 새로이 조성한 듯한 미당생가에 이른다. 안내판에 의하면 1970년부터 아무도 살지 않고 방치되던 이곳을 2001년 8월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고 적고 있다. 원래 미당이 살던 집의 형태가 아니고 초가로 새롭게 만든 이 생가는 그저 미당이 이곳에 태어나고 살았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미당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서광한(徐光漢)과 김정현(金貞賢) 사이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년기와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어댄 청년기의 일부를 보냈다. 고향마을 선운리 질마재는 바닷물과 민물이 서로 몸을 섞는 장수강(인천강) 너머 선운산이 있고, 드넓은 개펄로 펼쳐진 줄포만 건너 황소마냥 길게 돌아누운 변산반도가 눈에 들어오는 곳. 적막 한촌(寒村) 질마재는 미당의 시에 피로 녹아 흐른다.

  그의 아버지는 노름빚 때문에 풍지박산난 집안을 살리기 위해 소년 훈장 노릇을 했고, 이 마을 어떤 어부 과부댁 딸과 혼인을 했다. 이어 고창군청 측량기사를 거쳐 호남의 대지주 김기중(金性洙의 부친) 집에서 농감(農監·마름) 노릇을 했다.

   ‘애비는 종이었다.’ 스물셋 미당이 토해낸 ‘자화상’과 달리 미당의 아버지는 인촌(仁村) 김성수의 아버지 ‘동복영감(同福令監)’의 마름이었다고 한다. 그 집 서생 노릇을 하다 지주를 대신해 소작인을 관리하는 농감(農監) 일을 했으니 그럭저럭 ‘살 만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처지였다. 아버지와 고향의 기억은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로 이어진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 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자화상' 전문


  마름 일을 했다는 부친을 종으로 격하시키면서까지 쓴 자전적인 이 시를 보노라면 왠지 시인의 마음 속 깊숙이 꿈틀거리는 끈적끈적한 욕망의 실체가 무엇일까 새삼 궁금해지곤 했다.

  어쨌든 타고난 총명함과 장남이라는 위상 탓에 집안의 극진한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일곱 살 무렵까지 동네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한 뒤 줄포초등학교에 들어가 5-6학년 과정을 한해에 끝마쳤다. 부친의 극진한 성원에 힘입어 서울로 진학했으나 데모 주모자로 지목돼 퇴학을 당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돈 3백 원을 훔쳐 쫓기듯 서울로 올라와 서양문학 작품을 탐독하며, 1933년에는 톨스토이즘을 실현시킨다며 넝마주이로 떠돌았고, 그해 겨울 동대문 밖 개운사(開運寺) 대원암에서 불경을 배웠으며 금강산에 구도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스물 일곱 미당이 아버지 임종을 하러 질마재에 돌아왔다. 상(喪)을 마친 그가 늦가을 빗속을 우산도 없이 걸어 선운사 동구의 서울행 버스정류소로 가다 너무 허전해 주막에 들른다. 그는 마흔쯤 된 훤칠한 주모더러 다짜고짜 육자배기나 조금 들려 달라 청한다.

  ‘짙은 애수를 띤 듯 달빛의 투명을 가진 듯’ 나직한 육자배기에 취했다 총총히 떠나는 그의 등에 대고 여자가 인사한다. “동백꽃이나 피건 또 오시요.”  명시 ‘선운사 동구’가 그렇게 태어났다. 선운사 입구에 세운 서정주 시비에는 '선운사 동구'를 새겨져 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

 

 

  그는 1937년 고창 고향집으로 돌아와 지친 육신을 쉬면서 1938년, 5살 아래인 정읍의 방옥숙(方玉淑)과 결혼한다. 2000년 12월 24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질마재는 그의 삶과 작품의 근간이었고,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를 키웠다는 바람조차 잠든 고요한 한나절, 초가삼간이 달랑 전부인 서정주 생가에 들러 ‘오가는 사람 없는 길가에서 85 평생 동안 마치 생병 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았다’는 시인의 궁벽했을 법한 유년기를 떠올리다가 그 옆의 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미당시문학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질마재에 세운 '미당시문학관’

 

 


  미당시문학관은 그의 생가 바로 옆에 있다. 서정주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1년 9억 7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세웠다고 한다. 친일 행적과 군사정권을 예찬하는 행위 등으로 미당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썩 좋지 않아 지어질 때까지 반대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지은 후에도 규탄 데모가 심심찮게 이어졌다는 기사를 접하기도 했다.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 교사를 매입하여 9천 4백여㎡에 ‘친환경’과 ‘배움’의 건축미학으로 지어진 문학관은 5층 규모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하면서도 자연미가 돋보인다.

 전시동 건물은 옛 학교건물을 그대로 살리면서 건물을 리모델링하였는데, 콘크리트 건물동이 우뚝 솟은 독특한 형태로 변화를 주어 한결 돋보인다. 들어가는 입구와 파릇파릇 잔디가 잘 정돈되어 있는 운동장이 여유가 있고 정겹다.

  주 관람 공간은 4층 반짜리 콘크리트 건물. 1층부터 4층까지 계단 벽과 비좁은 공간을 이용해 미당의 육필 원고와 각종 사진,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미당 초상화, 유품 등 자료 1만 5천여 점을 갖추고 있다. 건물 꼭대기에는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갖추었다.


  건물이 회색벽이라 좀 어둡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미당의 시집과 액자와 그의 유품들, 그리고 시인으로서 걸어온 삶과 문학적인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도록 배려한 노력이 엿보였다. 

  초기의 시로부터 각 시대마다 미당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들,  <화사(花蛇)>, <귀촉도>, <국화 옆에서>, <무등(無等)을 보며'> , <춘향유문>, <추천사>, <꽃밭의 독백> 등 주옥같은 미당의 시들이 전시되어 있어 여행객들의 발길을 잡는다.

 

  특히 전시물 중에는 일제암흑기의 친일문학 11편과 전두환 정권을 찬양하는 시 등 논란이 되고 있는 시들도 함께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이들은 일제의 강압적 식민통치와 지식인에 대한 회유 협박이 절정에 달했던 1942년∼1944년까지 2년간 집중적으로 발표됐으며 가미가제에 자원한 젊은이를 미화하는 등 제국주의 전쟁과 식민통치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행적을 뉘우치는 글까지 전시해 놓고 있다. 일제의 항복이 그리 빨리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대동아공영권으로 묶여 한 백오십년은 더 넘게 지속되리라는 생각에서 거절하지 못하고 글을 썼노라는 해명(?)의 글이다.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
  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
  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

  유유히 흐르는 우리의 시간이
  이제는 성낸 말발굽 뛰듯 하다.

  벗아 하늘도 찢어진 지 오래여라.
  날과 달이 가는 길도 비뚜른 지 오래여라.

  거친 해일이 우리와 원수의 키를 넘어선 지도
  우리의 뼈와 살을 갈기 시작한 지도 벌써 오래여라. 

    (이하 생략)

    - <헌시-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잘못을 시인하는 글을 쓰면서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궁금하다. 신중하지 못했던 판단과 행동이 그가 시문학사에 한국적인 정서와 가락으로 이뤄낸 위대한 업적과 함께 오점(汚點)으로 남게 된 사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외세배격을 외치던 동학혁명의 진원지 고창에서 태어나 성장한 대표적인 인물 서정주의 친일 논란을 보면서 지독하게 곪아버렸으나 아직 아물지 못하고 있는 역사의 생채기를 보는 느낌이다.

  유품 중에는 사진, 앨범, 모자, 저금통장, 상장, 파이프, 원고지, 출판매매계약서, 공책, 가족들과 주고받았던 편지 등 그의 생전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는 손자가 또박또박 깍두기 노트에 적어 보낸 편지가 눈에 띤다.

  우둑 솟은 건물 옥상에 설치된 전망대에 오르면, 전망대에는 미당의 시구가 타일에 박혀 있어 눈길을 끈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자화상, 1941) 자신의 자화상을 노래한 것이지만, 이곳을 찾아오는 여행객의 취향과 딱 맞아 떨어지는 기분이다.

  전망대에 서면 화려한 풍광이 눈앞에 펼쳐져 입이 딱 벌어진다. 앞쪽으로 변산반도의 울퉁불퉁한 산자락과 함께 곰소만 갯벌을 메워 만든 드넓은 평야가 시원스럽게 열린다. 뒤로는 바다에 면한 산으로는 높이가 만만치 않은 소요산(444)이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어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느낌이다.

 

 


 

  이곳에선 해마다 노란 국화 속에 미당문학제가 열린다. 행사에 맞춰 문학관 앞에서 미당을 규탄하는 시위가 심심찮게 열린다고 한다.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진다.


미당(未堂) 시에 나타나는 화려한 정신세계(精神世界)



  미당이 본격적으로 시단에서 활동한 것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壁)>이라는 시가 당선된 후부터였다. (최초의 작품은 1933년 12월에 게재된 <그 어머니의 부탁>). 같은 해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김동인(金東仁)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역임하였다.

  1941년 <화사(花蛇)>, <자화상(自畵像)>, <문둥이> 등 24편의 시를 묶어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과 토속적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인간의 원죄(原罪) 의식을 주로 노래하였다.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 <화사(花蛇)> 전문

  이 작품은 미당 초기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향수’이거나 ‘원색적 야성에의 충동’을 읊은 것이다.  20대에 《화사집》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 방황의 탐미적 아름다움을 노래한 그의 시적 여정은 1948년에는 시집 《귀촉도》를 통해 전통적 정서와 가라앉은 톤으로 동양적 사유의 본령을 탐색했다. 또 1955년에는 《서정주 시선》을 출간해 자기 성찰과 달관의 세계를 동양적이고 민족적인 정조로 노래하였다.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歸蜀途)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 <귀촉도> 전문

  <귀촉도>는 설화를 현실에 접목시켜 임과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통함을 노래한 것이다. 그는 이후 불교 사상에 입각해 인간 구원을 시도한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을 내놓는다.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언 바다로
  배를 내어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놓이듯 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波濤)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 <추천사(鞦韆詞)>전문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동천(冬天)>


  <추천사>는 고대소설인 <춘향전>을 바탕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영원히 하늘과 땅 사이를 왕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상징한 것이고, <동천>은 불교적인 은유로 절대적 가치에 대한 외경의 정신을 읊고 있다.

  그 후 1975년과 1976년에는 이어서 토속적·주술적이며 원시적 샤머니즘을 노래한 시집 《질마재 신화》(1975)와 《떠돌이의 시》(1976)를 출간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을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 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 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신부(新婦 - 질마재신화' 전문

  유교적 도덕관에 입각한 여필종부의 세계관의 한 단면을 그렸다. 한 여자는 오로지 한 남편을 섬겨야 한다는 윤리에 얽매여 신랑이 오해를 하여 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한 평생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내용이다. 그동안 신부에게 맺힌 한과 설움을 어떠했을까? 또 《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안 잊히는 일들》(1983) 외에 《노래》(1984), 《팔할이 바람》(1988),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 등을 출간하였다.

  그는 시력(詩歷)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15권의 시집과 1천 편에 이르는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그의 <국화 옆에서>는 초등학교만 나왔어도 알 정도로 애송되고 있고, <푸르른 날>은 가수 송창식이 불러 널리 애창되고 있다. 또한 그는 고은, 황동규, 박재삼 등 1백 명이 넘는 쟁쟁한 시인들을 등단시켰다. 가히 미당스쿨을 거쳐 간 인물만으로도 한국문단은 풍성하다.

 

 



  한국적인 정서와 모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시인으로서 그가 다양하게 보여준 형성력은 20세기 한국문학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걸출한 개성과 특유의 수사는 거칠 것이 없다. 그의 정신세계는 고조선과 신라, 그리스로부터 미래까지, 그리고 고향 질마재에서 에베레스트까지 이르고 있다.
 
  “부족 방언의 요술사이자 이 나라 시인 부족의 족장”(이화여대 유종호 교수), “시 쓰는 일에 있어서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인물”(경희대 김재홍 교수), “서정주는 하나의 정부(政府)다”(시인 고은) 등등, 현대 한국의 대표 시인 미당 서정주를 표현하는 수사는 현란하다. 이밖에도 “언어의 연금술사” “신라 향가 이래 최고의 시인” “시성(詩聖)” “시선(詩仙)” “살아있는 시신(詩神)” “시인들을 신민으로 거느린 시왕국의 왕” “살아있는 한국 시사(詩史)”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와 같은 경의와 극찬에 가까운 찬사와는 달리 폄하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접신술사” “현대 시인이 아니라 전근대 시인이다” “서정주 시의 발전은 한국 현대시 50년의 실패를 가장 전형적으로 드라마화한다”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그를 우리나라 최고의 대표시인으로 꼽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가 현역 시인 246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한국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미당 서정주로 나타났다. 문학평론가인 고려대 이남호 교수는 "지난 10여 년간 정치적 관점에서 문학 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미당 폄하 분위기가 짙었고, 대중들이 그런 매도 분위기에 쉽게 휩쓸렸다”며 “그러나 시인들 사이에서 미당이 여전히 ‘한국 현대시의 최고봉’이라는 사실은 그의 시가 정당한 평가를 받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생전에나 사후에나 한국문학이 도달한 최고의 미학적 형상력, 또는 후대에게 미치는 가장 강렬한 미학적 감화력의 주인공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작품 활동 외에 19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국장을 거쳐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문리대학 교수(1959~1979)를 지낸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 종신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1년 현대시인협회 회장,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84년 범세계 한국예술인회의 이사장, 1986년 《문학정신》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냈고, 2000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

 

 

질마재를 뒤덮은 100억 송이 국화 향기

 

  미당시문학관에서 포장도로를 건너 10여분 정도 비탈을 오르면 미당 묘소다. 묘소에는 미당의 시 '선운사 동구'를 새긴 시비가 서 있고 그 옆으로 미당 내외의 무덤이 앉아 있다. 해마다 미당의 묘 주변 4만여 평을 비롯해 부안면과 대산면 일대 6만5천여 평에 대단위로 조성된 국화 밭에는 가을꽃의 상징인 국화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흠뻑 맛볼 수 있다.

  4월의 선운사 동백, 그리고 9월의 메밀꽃(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장), 상사화(선운사)로 이어지는 고창의 꽃 잔치를 늦가을 국화가 이어가는 셈이다. 그 황금 빛깔이 야하달 것도 없어 낯익은 예쁘신 아주머니 같아서 좋고 시골뜨기 국화 냄새라서 편안하다. 사실 고창은 국화로 유명한 곳이 아니었다. 국화와의 인연을 찾는다면, 고창에서 태어난 미당이 <국화 옆에서>라는 그 유명한 시를 썼다는 점일 것이다. 이 지방에서 양돈업을 하는 아마추어 시인 정원환(鄭元煥·47)씨와 미당시문학관 해설사로 일하는 서동진(徐東鎭·51)씨 등 지역 주민들이 이처럼 엄청난 꽃동산을 일궜다. 참으로 장관이다.

 

 



  “질마재를 포함한 선운리 일대를 국화와 문학의 원조로 만들고 싶습니다.” 오직 미당을 사랑하는 애정 하나로 시작한 일이다. “미당이 친일을 했네, 안 했네는 우리는 관심 없습니다.” 국화 심는 면적을 더 넓히겠다는 토박이 독지가의 얘기다. 시인 황동규가 미당 팔순잔치 마당에서 "이 땅에 미당을 읽지 않고 시 쓴 사람 나와 봐라”고 일갈(一喝)했다는 것과 상통하는 말이다.

 
  미당 부부가 묻힌 선영과 생가, 시문학관 주변에 꽃망울 자잘한 화단국(花壇菊)을 융단처럼 심어 <선운사 동구>를 새긴 시비(詩碑)가 서 있는 선운사 일대와 질마재는 가을이면 온통 노란 국화꽃의 세상이 된다. 그야말로 찬란한 풍광 자체로 애송시  <국화 옆에서>를 읊고 있는 셈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 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국화 옆에서> 전문

 

 

   이미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인 동시에 국민들이 좋아하는 애송시로 평가받고 있다. 황국(黃菊)을 좋아했던 미당도 후학들의 사랑이 국화 꽃밭이 되어 묘소를 싸안을 줄은 생각 못했을 것이다. 노란 국화가 노란 물결로 일렁일 때면 미당시문학관에서는 타계한 시인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로  ‘미당문학제’를 연다. 문학 세미나와 기념 백일장도 연다.

 

 



  국화가 만발하여 미당 묘소 주변과 이 일대에 그윽한 국화향이 바람처럼 일면 전국에서 엄청난 관광객이 몰려들어 북적댄다. 미당도 스물세 살 때 쓴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라고 했던가. 미당시문학관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안현마을 동산의 미당 산소 주변에 서면 북쪽으로 서해 바다가 보인다. 변산반도와 고창군 사이에 깃든 곰소만이다. 그 바다와 맑은 하늘, 국화향이 바람처럼 이는 질마재는 이제 미당만의 마을이 아닌 듯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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