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백담사와 만해마을
만해 한용운의 시혼이 살아 숨쉬는 곳
글·사진 남상학
만해 한용운의 가르침과 향기를 찾으려면 그의 고향 땅 홍성의 만해 생가와 그의 생애에서 지조와 절조로 일관한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 서울 남한산성의 만해 기념관, 그리고 만해 정신의 산실 내설악 백담사와 만해마을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백담사 부근에서 만해와 관련되는 자료를 보려면 백담사 경내에 있는 만해기념관과 백담사 입구에서 인제 쪽으로 한참을 내려와 왼쪽으로 다리(만해교)를 건너서 만해마을을 찾아가야 한다. 만해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백담사를 행해 오르면 어디선가 바람소리, 시냇물 소리에 섞여 속삭이듯 한 편의 시가 들리는 듯하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알 수 없어요> 전문
1926년에 간행한 시집 《님의 침묵》에 수록되어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님'의 존재에 대해 선문답적인 화두와 은유법을 통해 종교적 명상의 심화를 성취함으로써 시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시편이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구도정신으로 우리 시문학의 전통을 한 단계 발전시킨 작품으로, 1920년대의 우리 시단에서 소박한 낭만주의와 퇴폐주의, 목적주의를 극복하고 형이상학의 깊이를 획득했다는 평을 받는다. 자연을 거느리고 있는 어떤 절대의 힘 앞에 스스로 존재의 미약함을 깨닫는 구도자적 자세를 그리고 있다.
평론가들의 입을 빌면, 이 시가 수사학적 질문의 형식으로 표현된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며, 사물의 원상에 대한 탐구의 자세라고 한다. 이 시를 음미하노라면 어느 새 그가 살아온 발자취에 대한 궁금증이 새롭게 느껴진다.
만해정신의 산실, 백담사
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절로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을 흘러온 맑은 물이 합쳐지는 백담계곡 위에 있어 내설악을 오르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설악산 심원사 사적기>와 한용운의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백담사는 서기 647년 신라 제 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하고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한 것이 시초이다.
한계사로 창건 후 1775년(영조 51년)까지 무려 일곱 차례에 걸친 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터전을 옮기면서 이름이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바뀌었다가 이후 1783년 이름을 바꿔 다시 ‘백담사’라 개칭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백담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潭)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운 데에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백담사는 내설악의 아주 깊은 오지(奧地)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좀처럼 찾기 힘든 수행처였다. 부속암자로는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이 창건하여 부처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가 된 봉정암, 자장이 관음진신을 친견하였다는 관음암의 후신인 오세암이 있다. 많은 수도자들이 불원천리하고 이곳을 찾아 백담사 계곡을 시원하게 흘러가는 맑은 물에 객진번뇌를 털어내고 설악영봉의 푸른 구름을 벗 삼아 출격장부의 기상을 다듬던 선불장(選佛場)이었다.
만해 한용운은 근대사 격량의 회오리 속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다. 갑오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노일전쟁을 치르면서 조선의 민중들이 무참히 쓰러져 가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지금은 한가롭게 책이나 읽을 때가 아니라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할 때라고 판단하고서 그의 나이 19세에 강원도의 이름난 도사를 찾아 출가한다. 그리하여 몇 날 며칠을 걸어 당도한 곳이 내설악 백담사였다. 백담사에 만해 한용운이 도착한 때는 1904년, 일제의 검은 손이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던 시절이었다. 만해는 새로운 질서와 철학을 찾아 이 깊고 깊은 산중까지 왔던 것이다.
내설악의 영봉과 물소리가 마음을 씻는 백담사에 발길을 멈추고 1905년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수도에 정진한다. 이렇듯 철저한 수련과 정진으로 1910년에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다. 1915년 백담사가 화재를 만난 이후에는 오세암에서 주로 정진하게 된다. 오세암은 백담사에서 산길을 따라 30리를 오르면 설악의 영봉을 병풍처럼 두룬 연꽃의 형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부속암이다.
당시 장경각의 팔만대장경은 불교 경전 공부에 매달리던 한용운의 지적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1865년 남호 선사가 해인사판 대장경 1부를 오세암에 봉안하여 비치한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오세암에서 1917년 12월 3일 밤 좌선 중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마음의 문을 열어 의심하던 마음이 씻은 듯이 풀렸다는 오도송을 남겼다.
사나이 가는 곳마다 바로 고향인 것을
나그네 시름에 겨운 사람 그 몇이던가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 깨트리니
눈 속에 복사꽃 붉게 흩날리네.
그것은 ‘깨우침의 소리’였고, 그 소리 속에서 활연대오의 경지가 열리는 소리였다.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길이 무엇인가를 확연히 깨달은 소리였다. 그래서 오세암은 만해에게 있어서 종교를 역사화하는 역량을 보인 근대정신의 성스러운 성지가 된 셈이다. 그리하여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출판하고, 1918년 불교잡지 ‘유심(惟心)’ 창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인 민족대표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920년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선임되고,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한국적인 시학(詩學)의 원리가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었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 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하였고,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 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 투쟁사상 고취에 힘썼다.
만해 한용운이 <님의 침묵>의 마지막 붓을 놓으면서, 남긴 '독자에게'의 끝 구절은 다음과 같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설악 곳곳에 넘치는 만해의 기상, 오세암의 밤은 점점 엷어가고 새벽 종소리는 이제 머지않았다는 신념과 의지에 찬 표현이었다.
백담사는 만해의 세계관이 수립되고, 그의 철학이 잉태되고 성장한, 만해 정신의 산실이었다. 그래서 ‘만해’하면 백담사이고 ‘백담사’ 하면 곧 만해를 떠올릴 만큼 깊은 관계가 맺어진 장소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만해의 문향(文香)과 정신도 조금씩 탈색되어 가는 것을 뜻있는 사람들은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차 1977년 오현 스님은 외설악에 있는 신흥사의 주지를 맡았다. 그는 그때부터 설악에서 만해의 자취와 흔적이 점점 지워져가는 것을 안타까워 1996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만들고, 1997년 11월 9일 백담사에 만해기념관을 개관하였다.
백담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극락보전이 보이고 좌우로 화엄실과 법화실이 보인다. 일주문에서 우측에 보면 'ㄱ' 자형의 전통 한옥을 만나게 되는데 이 건물이 기념관이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의 <나룻배와 行人>의 시비를 세우고, 이어 1997년 ‘만해상’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99년부터는 백담사에서 조선일보의 후원을 얻어 매년 여름 ‘만해축전’을 개최하면서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에 이른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백담사에 세운 시비(詩碑)의 ‘나룻배와 행인(1926)’
‘나룻배’는 만해의 성실한 기다림의 상징이요, 행인은 말할 것도 없이 ‘기룬 임’의 존재다. 절대자를 향한 헌신적인 기다림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그의 헌신적 기다림은 곧 지극한 조국애의 정서이기도 하다. ‘당신’이 알아주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관계없이, 언제고 꼭 오실 것으로 믿고 날마다 기다리고 있겠다는 것이다. 당신에 대한 나의 일방적 사랑이기에, 나는 당신으로 인하여 의미가 있고, 당신이 있음으로 의의가 있는 것이다.
만해기념관에서는 만해 불교정신의 산실임을 입증하는 자료로, 만해가 불교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의 원전 등 세계지리와, 서양철학을 접했던 《영환지략》과 《음빙실문집》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만해 생전의 유묵과 《님의 침묵》 초간본과 백여 종의 판본이 함께 전시하였다. 또 3·1독립운동 때 옥중 투쟁을 보여주는 자료들, 한용운 관련 석.박사 논문을 비롯하여 일반자료들이 정리되어 있다.
이렇듯 귀중한 자료들을 백담사 만해 기념관에 전시함으로서 백담을 더욱 백담답게 하였다는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이 지역은 접근하기에 매우 불편한 것이 흠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편리할 수 있도록 교통도 좋고 터도 넓은 곳에 만해를 기리는 기념관을 세우는 것이 꿈이었다.
그 꿈을 실현한 것이 바로 만해마을이었다. 드디어 2003년 여름 백담사 인근 남교리에 오랜 꿈이던 만해마을을 완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60년 전 서거한 만해의 숨결과 문향(文香)을 백담사에서 만해마을로 이어가게 한 것이다.
'만해(卍海)마을' 에 만해의 혼 살아났다
인제 만해마을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1136-5에 위치하고 있으며, 17,450㎡ 대지위에 건축 면적 2,562㎡로 대규모 시설을 갖추었다. 건물들의 앞뒤에는 내린천 상류인 북천과 설악산 자락인 안산이 자리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산을 등지고 물이 앞에 놓임)의 지형이다.
그가 <님의 침묵>을 탈고한 지 78년, 1944년 입적한 지 59년이 흐른 2003년 여름, ‘설악산 자락의 무거운 그림자’를 헤치고 근대문학사상 불후의 명시집 산실에 그의 호를 딴 만해마을을 완공한 것이다.
이 만해마을은 한국문학사의 대표적 시인이자 불교의 대선사, 민족운동가로 일제 강점기 암흑시대에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민족혼을 불어 넣어준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문학성과 자유사상, 진보사상, 민족사상을 높이 기리고 선양하기 위한 실천의 장으로 설립되었다.
2천여 평 부지에는 만해문학박물관, 문인의 집, (Guest House), 청소년수련시설(설악관, 금강관), Book Cafe, 서원보전, 만해평화지종 등의 현대식 건물과 만해광장, 만해평화지종(鍾), 만해상(像)이 들어서 있고, 님의 침묵 광장, 님의 침묵 산책로, 만해마을 운동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사업은 문인 및 예술인 창작지원, 테마학교, 주말사찰 체험, 문예대학, 만해청소년학교 등이다. 이채로운 것은 백담사 만해마을에 조성된 건물 안팎의 모든 현판을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과 명사들이 각각 담당했다는 점이다.
만해마을의 정문인 ‘경절문’(徑截門)이 자리하고 있다. 두 장의 큰 돌판을 기역(ㄱ) 자로 이어붙인 듯한 현대적 감각의 경절문에 들어서면 시벽(詩壁)이다. 이 시벽은 2005년 세계 평화시인대회에 참가한 310편의 시를 동판에 담은 것으로 평화를 갈구하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만해의 자료 가득 찬 만해문학박물관
만해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꼭 들러야 할 곳이 ‘만해문학박물관’(지상 3층)이다. 1층 상설전시실, 2층 기획전시실, 3층 세미나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해에 관한 자료를 모아놓고 있다.
‘만해문학박물관’을 들어가려면 입구 로비의 벽면으로부터 '만해연대기'와 만해의 친필 '풍상세월 유수인생(風箱歲月 流水人生)'를 만나게 된다. 좌측은 유리벽으로 외부전경이, 우측 벽면으로 만해 초상화를 대하게 된다. 박물관 안 전면 유리벽 밖에는 만고를 담은 초월자의 모습을 한 만해의 동상이 손을 내민다.
“自由는 萬有의 生命이요 平和는 人類의 幸福이라”는 만해 선생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벽면에는 삶의 행적과 선생의 시들이 가득하다. 가운데에는 님의 침묵, 조선불교유신론, 한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등 만해 선생의 서적과 국내에서 출간한 만해 한용운의 관련서적들을 다양하게 진열해 놓았다.
1층에는 만해의 친필 서예와 작품집, <연보로 본 만해선사의 생애>와 <주제로 본 만해선사의 삶> 등 그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생전에 깊은 관계를 맺었던 조선일보 상설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2층 기획전시실에는 미술, 사진, 서예, 서화전 등 문예작품 기획 및 초대전 기획전시공간이며, 3층 세미나실에는 한국대표 시인 시집을 비치하고, 소회의실(세미나실),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1~2층을 연결하는 옥외 계단에는 '시벽(詩壁)'을 만들어 작고시인 50명, 생존 시인 100명을 선정 작품을 동판에 새길 예정이라 한다.
문인의 집
문인의 집은 문인집필실과 150여명 동시 수용할 수 있는 개인, 단체객실 45실을 갖추고 있으며 학술세미나, 공연, 각종 행사가 가능한 강당, 그리고 웰빙을 위주로 한 전통식당, 2층 별실로 구비되어 있으며, 400여명의 단체식, 호텔식 연회가 가능하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조건 속에도 문학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작가들의 창작 의지를 살릴 수 있도록 쾌적하고 아름다운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21세기적 대웅전의 한 사례, 서원보전(誓願寶殿)
어쩌면 만해마을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건물은 ‘만해사’인지도 모른다. ‘서원보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당은 21세기적 대웅전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현대적 디자인 감각이 돋보이는 건물이었다. 노출 콘크리트 2층 건물인 만해사는 1층 공간은 밑을 틔워 비우고 2층에 불상을 모신 법당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법당에는 불상만 하나 놓여있을 뿐 그 흔한 탱화 한 점 없다. 사방을 모두 유리문으로 하여 문을 열지 않고도 내부에서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게 하였다. 창문을 열면 불상 뒤편으로 빽빽하게 늘 푸른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자연의 후불탱화를 연출하는 곳이다.불교라는 종교보다는 문화공간을 염두에 둔 현대식 건물이다. 사방이 한지 바른 창문으로만 구성돼 있다.
이곳은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을 계승하고 ‘반야경’의 무소유 정신을 담은 곳이다. 자연과 인생이 공생하는 현대적 개념의 법당으로 사찰체험, 참선, 발우공양 등을 통하여 참나(眞我)를 찾는 자리이기도 하다.
열린 광장 ‘님의 침묵 만해광장’
님의 침묵 만해광장은 북천을 내려다보는 만해광장은 약 500~600명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야외행사를 할 수 있는 반원형(半圓形)의 열린 공간이다. 뒷산의 풀과 나무들이 무대의 배경이 되는 열린 광장으로 물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시낭송회, 연극, 공연 등을 할 수 있는 대동마당이라 할 수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 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가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님의 침묵> 전문
그는 《님의 침묵》 중의 군말에서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갈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리워서 이 시(詩)를 쓴다’고 했다. 만해에게 있어서 ‘님’은 절대적인 존재였고, 그 ‘님’은 불교 승려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 ‘길을 잃고 돌아길 길을 잃은 어린 양’이었다.
그는 가신 지 60년이 넘었건만, 지금도 우리 민족의 영원한 ‘님’이 되어 이 땅에 역사의 등불을 밝혀 주고 있다. ‘님’은 갔지만 겨레의 가슴에서는 영원히 그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혼과 목소리는 시(詩)가 되어 오늘도 많은 이들의 입에서 노래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다.
명상의 코스, 님의 침묵 산책로
그리고 님의 침묵 산책로는 만해 선생의 기개처럼 쭉쭉 뻗은 적송과 청간수가 흐르는 맑은 호수를 따라 이어져 있어 솔바람 물결소리를 들으며 사색과 명상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이다. 자연 속에서 자아를 찾고자 하는 사람에겐 필수 코스이다. 만해 선생의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우리의 소중한 자연을 공부하는 생태체험 학습장 '숲속의 작은 교실' 생태 자연학습장, 레크레이션, 숲속의 작은 교실의 역할을 한다.
평화를 염원을 담은 만해평화지종(卍海平和之鐘)
그리고 이곳에는 조국의 통일과 만민의 평화안녕을 추구하는 의미에서 울리는 ‘만해평화지종(卍海平和之鐘)’이 있는데, 보통 사찰의 범종루라면 전통양식의 지붕과 단청, 누각의 모습을 하는데, 만해평화지종 범종루는 파격적으로 좌우기둥과 최소한의 비가름을 할 지붕만 있고 벽이 없다. 그야말로 열린 공간이다. 누구나 만해마을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울릴 수 있다. 세상에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하고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이 사물소리와 함께 산을 울리고, 개울을 울린다.
백담사 만해마을에 평화의 詩壁’세우다
휴전선이 멀지 않은 강원도 백담사 만해마을에 세계 최초로 ‘평화의 시벽(詩壁)’이 세워진다. 세계 각국의 유명 시인들 60여명이 평화를 기원하는 시를 한 편씩 보내오고, 그 자필원고를 동판으로 떠붙여 벽을 만든다. 국내 중견·원로 시인 50여명도 동참한다. 그 시들에서 명구(名句)만을 따로 모아 테러와 폭력을 몰아내는 평화의 시탑(詩塔)을 세우는 구상도 있다.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2005 만해축전·세계평화시인대회에서 ‘평화의 시벽’은 제막되었다. 세계 유명 시인 30여명이 직접 한국을 방문하고, 30여명은 평화를 기원하는 시를 보내왔다. 한국 문단사상 가장 성대한 시(詩) 축제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강원도 인제군·조선일보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행사였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해에 전쟁과 폭력의 위협 아래 놓여 있는 세계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기원하는 시인들의 목소리를 한 곳에 모은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제9회 만해대상 수상자는 평화부문 달라이 라마, 문학부문 소잉카 시인, 실천부문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함세웅 신부, 학술부문 가산불교연구원장 지관 스님이 각각 수상했다.
해마다 8월이 오면 만해축전이 열린다. 종전 백담사에서 열렸던 만해축전(만해대상 시상, 고교백일장, 시인학교, 심포지엄, 사생대회 등의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이 행사는 이 땅의 문학사, 민족운동사, 불교사에 있어 불멸의 업적을 남긴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것이다. 이 행사에는 경내에 있는 만해평화지종(萬海平和之鐘)이 울려 퍼진다. 7천만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자유와 생명과 통일의 염원을 담고서 -
어두운 시대를 밝혔던 등불, 지금 그 만해 정신이 필요한 때
백담은 만해정신이 잉태된 곳이요, 동서사상이 비교된 곳이요, 만해 정신이 무르익어 간 곳으로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곳이다. 백담 계곡과 만해마을 앞의 북천에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는 만해 정신이 소리요, <님이 침묵>의 님, 사랑, 침묵의 시어가 흐르는 소리다.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 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빛날런가.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아 돌아오소서.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선생의 시조 한 수가 떠오른다. 고난의 한 시대를 살다간 선각자들의 모습이 오늘에 더욱 새롭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조국 근대사가 다시 생각난다. 어두운 그림자 뒤편에는 광명이 있고, 깊은 밤이 지나면 새벽이 가까웠다는 사실은 자연의 법칙이요 진리의 교훈이다. 일제 강점기가 우리 민족에 가해진 고난의 시련기였다면, 이 시련을 극복하고 고난 받는 중생들에게 청정한 감로수 한줄기로 우리들의 목을 축이게 한 만해 한용운의 삶은 진정 이 시대의 한줄기 빛이요 광명이었다.
<끝>
'문학관련 > - 문학기행(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산실 담양을 찾아서 (0) | 2006.04.09 |
---|---|
김영랑(金永郞) 생가에서 만나는 '찬란한 슬픔' (0) | 2006.02.27 |
국향 그윽한,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고향 질마재 (0) | 2006.02.11 |
소설가 김유정(金裕貞)의 향기를 찾아 춘천을 가다 (0) | 2006.02.09 |
이육사문학관, 치열했던 항일 민족 시인을 찾아서 (0) | 2005.11.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