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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소설가 김유정(金裕貞)의 향기를 찾아 춘천을 가다

by 혜강(惠江) 2006. 2. 9.

 

김유정문학촌

 

김유정 문학의 향기를 찾아 춘천을 가다

 


글·사진 남상학

 

 

 

 

  강원도 춘천은 천재 소설가 김유정이 태어난 곳.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친 그는 고향 춘천을 무대로 한 작품을 여럿 남겼다.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금광개발에 실패, 가난과 폐병에 시달리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작가 김유정은 1932년 이곳 실레마을에서 `금병의숙'이란 야학을 열고 농민계몽 운동을 펼쳤다. 

  한편으로는 <금 따는 콩밭>, <봄봄>, <산골나그네>, <소낙비>, <동백꽃> 등 주옥같 은 단편소설 30여편을 남겼다.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간 김유정의 자취는 김유정 문학촌이 위치한 신동면 실레마을을 비롯하여 춘천의 도처에서 그 문학적 향내를 맡을 수 있다.


작품의 산실(産室) 실레마을

 

   실레마을은 여느 농촌 마을과 다름없다. 그러나 당대의 현실과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생각하며 김유정의 단편소설 몇 편을 읽은 후에 찾아간다면 그곳은 특별한 장소가 되고, 그 소설 속의 인물들이 살아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걸 느낄 수 있다.

   금병산과 경춘선 철도로 둘러싸인 마을은 마치 분지 같아서 시야를 한 눈에 모은다. 모아진 시야 전체가 김유정 소설의 무대다. 김유정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마을이 원래 소설 덩어리였고, 단지 김유정의 손을 빌려 마을이 소설로 탄생한 것이 아닌가 혼동이 된다.

  그렇게 마을은 현실과 소설을 왔다 갔다 한다. 그 혼동의 감각이 아주 포근하다. 문학의 현장을 적잖이 다녀봤으나 여기는 뭔가 직감적으로 다르다는 느낌이 온다. 
김유정의 소설 대부분은 이곳 실레마을에서 구상되었고, 그 곳에서 실제로 목격한 일을 소재로 활용했고 작품 속 등장인물도 이곳에 실존했던 인물들이 많았다. 그는 1908년 이 곳에서 태어나 자라고, 또 20여 년간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젊은 나이로 돌아와 마지막 삶을 꾸린 곳. 김유정은 그곳을 이렇게 표현한다.

  “강원도 산골,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 앞뒤 좌우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호 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 수필 <오월의 산골작이>(1936)

 

   실제로 실레마을을 찾아가면 그가 표현한 모습과 너무도 똑같다. <봄·봄>의 욕쟁이 봉필 영감의 집터, <동백꽃>의 배경인 산국농장, <만무방>의 노름 터였던 동굴 금병의숙 터, <산골나그네>의 들병이가 머물렀던 물레방아 터며 주막의 돌담이 남아 옛날을 이야기해 준다.

  병풍을 친 듯 빙 둘러선 금병산 안에 담긴 마을은 온통 그의 소설에서 금방 걸어 나온 것만 같은 인물들이 지금도 살고 있는 듯이 정겹다. 뒷산은 <동백꽃>의 배경이 되었고, 마을 한 귀퉁이에 있었던 물레방아는 <산골나그네>의 그 물레방아이며, 덕돌네 주막터, 저 위의 집은 <봄봄>의 장인 김봉필의 집, 금병의숙, 실레마을 주막터, 금 따는 콩밭, 만무방 놀음터, 우마차 길 등의 안내판을 들여다보노라면 실레마을 전체가 김유정 작품의 산실이자 그 현장이란 것을 실감하게 된다.

   문학촌에는 기념관과 함께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김유정이 태어난 생가와 디딜방아, 정자 등 그가 살던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다.

 

 

 


신남역을 김유정역(驛)으로 명명

 

   춘천시와 문화예술단체에서 신남역 인근에 김유정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전시관을 건립하는 등 '김유정 문학촌'을 개설하면서 ‘신남역’의 명칭을 '김유정역'으로 변경해 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철도청은 2004년 역명 변경 요청을 최종적으로 승인 결정했다.

  그래서 실레마을 앞에 자리 잡은 경춘선의 ‘신남역’은 2004년 12월 1일부터 65년 만에 옛 이름을 내리고 ‘김유정역’이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한국철도 100여 년의 역사에 사람 이름이 역명에 표기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더구나 기존의 역명을 개명했다는 사실에서 획기적인 일이다.

  실레마을 전체가 김유정 작품의 무대이며 그 산실이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신남역이 김유정역으로 바뀌던 날, 마을 노인회 중심으로 꾸린 금병농악대(대표 홍용표)가 역사 주변을 돌며 신밟기를 시작으로 새 역의 간판을 걸었다.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김유정 소설 '만무방'에 나오는 노름방을 기억하고 닭싸움을 기억하며 <봄봄>의 봉필 영감을 기억한다. '만무방'의 노름방으로 가는 고갯길은 지금도 고갯길이고, 김유정이 세운 야학 '금병의숙' 자리는 지금도 간판은 '금병의숙'이다.

   실레마을의 노인들은 대부분 금병의숙의 야학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이들이다. 금병의숙에서 글을 깨우친 제자 중에 실레마을을 떠나지 않고 살았던 조문희 할아버지는 생전에 김유정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또렷이 말해 주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금병의숙을 오가는 길이면 욕필이 영감네 밭둑에 앉아서 영감과 데릴사위가 싸우던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히 적곤 했지요. 학생들에겐 늘 아는 게 힘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마을 노인회관에서 만난 이들의 기억을 따라가면 소설과 현실이 하나로 엮어진다.

 “사위에게 이 자식 저 자식 하는 장인이 어디 있을까. 오죽하면 우리 동리에서 누굴 막론하고 그에게 욕을 안 먹는 사람은 명이 짧다고까지 했을 정도야. 조무래기들까지도 그의 얼굴 앞에서 돌아서면 ‘욕필이(본명은 김봉필), 욕필이’ 하고 손가락질을 할 만큼 두루 인심을 잃었지.”

  실제 마을 주민들은 소설 <봄봄>은 몰라도 '봉필 영감'(욕필이 영감. 실명은 김종필)은 알고, 소설 <만무방>은 몰라도 산 너머 노름방은 기억한다.

  김유정문학촌의 전상국(소설가) 촌장의 말처럼 실상 문학마을이나 김유정역의 새 이름은 실레마을 사람들의 것이니, 역명의 변경은 너무도 당연한 것일 지 모른다.

 

 



김유정의 문학을 기리는 '김유정 문학촌'

 

  김유정 문학촌은 2002년 8월에 세워졌다. 촌장을 떠맡은 전상국 교수는 꼭 20년 전부터 김유정 고향 마을에 '미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강원대 교수로 온 것도 실레 마을이 가까운 것이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문학 답사객들을 이끌고 마을을 둘러싼 금병산을 수백 번은 올라 다녔다고 했다.

   실레마을이 김유정의 고향이란 것 외에는 아무 자료가 없던 시절부터 전상국 교수는 실레 마을을 찾아다녔고 김유정의 향기를 맡으러 실레마을을 찾는 사람들을 안내하며 마을을 돌아다닌 것이다. 그의 이런 극성(?)이 열매를 맺은 것이 오늘의 '김유정 문학촌'이다. 아무개 문학관, 아무개 문학기념관이라 하지 않고 '촌'자를 붙여야 김유정답다는 것도 그의 고집이었다.

   기념관 앞에는 김유정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생가를 복원했다. 생가 옆으로 장독대, 디딜방아, 외양간, 뒷간이 딸려 있다. 그리고 생가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에 이어 정자를 만들어 놓았다. 이 모든 시설은 단아한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념관은 김유정의 문학과 생애에 대한 모든 것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김유정의 문학생애, 구술문학의 진수, 농촌계몽운동가, 봄을 표현한 작가, 김유정의 일대기를 담은 비디오물, 연대별 한국 문학의 흐름이라는 주제로 그의 삶과 문학세계를 살뜰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정작 다른 기념관과 달리 김유정의 유품이 별로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김유정은 요절한 작가다. 찌든 가난 속에서 폐결핵이 악화돼 29세의 나이에 ‘닭과 뱀을 고아 먹으면 살아날 것 같다’는 편지를 세상을 뜨기 불과 열하루 전 단짝 친구에게 보내고 식민지 조국을 쓸쓸히 떠났다. 따라서 독신으로 살았던 김유정의 혈육은 물론이고, 짧았던 생애만큼 김유정의 유품은 몇 점 되지 않는다. 겨우 흑백 사진 석 장이 전부다.

 

  문학촌 안에는 마을의 지도와 함께, 각각의 장소가 소설 속에서 어떻게 등장하는 지를 설명해 놓았다. 김유정의 작품들을 출판 당시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김유정의 사랑’이라는 주제의 전시관에서는 불운했던 예술가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김유정은 1908년 태어났으며 8남매 중 일곱째였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했고, 고교 2학년 때까지 말을 더듬어 항상 과묵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김유정은 첫사랑 박록주를 만나 광적인 구애를 펼치지만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김유정은 소설 <두꺼비>에서 “저쪽에서는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여겨주지 않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 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 달 동안 썼다” 라고 적었다.

  박록주와 사랑에 실패한 김유정은 고향인 실레마을로 돌아왔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실연은 ‘명작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결과를 낳는다. 고향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은 그는 <봄봄> <솥>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등의 작품을 썼다.

 

  또 시인 박용철의 동생인 박봉자와 30여 통의 편지를 받았으나 후 김유정과도 알고 지내던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하여 또 한 번 김유정은 좌절한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이야기보다 김유정이 우리에게 돋보이는 것은 그의 작품성과 그가 차지하고 있는 문학사적 위치에 있다.

 

 


김유정의 문학적 특성과 위치



  1908년 실레마을에서 태어난 김유정은 1916년부터 약 4년간 한문을 수업하고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 문과를 다니다가 ‘더 배울것이 없다’는 이유로 중퇴한다.  그 후 전국을 방황하다가(30) 일확천금을 꿈꾸고 금광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듬해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와 야학당(금병의숙: 金屛義熟의 전신)을 열고 불우한 아이들을 가르친다.

   1933년 25세 폐결핵 발병 진단을 받고 처녀작 <산골 나그네> 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가 정식으로 등단하기 2년 전인 1933년 개벽사의 《제일선》이란 잡지를 통해서였다. 같은 해에 그는 <총각과 맹꽁이>, <흙을 등지고> 등을 발표하지만 별로 좋은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한다.

   그는 화풀이라도 하듯 다음 해 연말에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동아 등 세 신문에 소설을 응모하여 1935년 새 아침에 <소낙비>가 조선일보에 1등 당선되고, 조선중앙일보에 <노다지>가 가작 입선됨으로써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난다. 그는 정말 하루 아침에 유명해진다.  그는 등단하면서 곧바로 같은 해에 <금따는 콩밭>, <떡>, <만무방>, <산골>, <솥>, <봄·봄>, <안해> 등 단편 10편과 수필 3편을 발표한다. 또 구인회(九人會) 후기 동인으로 참여. 이상과 깊은 친분을 가졌고, <안해>를 《사해공론(四海公論)》 12월호에 발표하여 문단의 찬사를 받는다.

   1936년에는 단편 <심청>, <봄과 따라지>, <가을>, <두꺼비>, <봄밤>, <이런 음악회>, <동백꽃>, <야앵>, <옥토끼>가 각각 발표된다. 1937년 병이 깊어졌으나 소설  <따라지>, <땡볕>, <연기>를 발표하고, 3월 29일 오전 6시 30분에 30세의 나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사망한다. 작품집으로 《동백꽃》을 남겼다. 그는 요절하기까지 불과 2년여의 작가생활에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 <동백꽃>은 농촌을 배경으로 유난히 성에 빨리 눈뜬 처녀(점순이)와 아직 성을 모르고 사는 어리석고 멍청한 소년(나:점순이네 집 소작인의 아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행위를 풍자적이며 유머러스하게 그림으로서 사랑의 순진성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향토적인 색채가 농후하며 소설 전체를 통하여 정이 물씬 풍긴다. 소년을 끌어안고 동백꽃 향기 속으로 쓰러진 점순이가 어디선가 배시시 웃으며 나타날 것만 같다.

 

 



   데릴사위로 들어온 머슴이 쉬 자라지 않는 장차 색시 감 점순이와 장인이 될 심술 사나운 주인 사이에서 겪는 갈등을 통해 근대화 초기의 농촌문제와 인간관계를 해학적으로 그려낸 <봄 봄> 역시 알맞은 자리에 척척 들어맞는 말씨로 엮어놓은 낭만적 작품으로 어리석은 인간과 가벼운 유머로 꾸며져 있다. 농촌의 현실을 제재로 한, 매우 해학적이며 익살스러운 명작으로 손꼽힌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그의 모습 또한 깊이 각인되어 앞으로도 인간의 삶의 형태가 있는 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문장에서 구수한 속어(俗語)를 자유로 구사했고, 소재를 불구와 불우한 인간 군상에서 구하여, 짙은 인간미(人間美)가 단편마다 스며 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 그리고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 비어의 구사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김유정은 우리나라 근현대문학에서 농촌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한 시대의 생활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김유정의 문학은 농촌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심리를 사실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이상(李箱)과 더불어 천재로 꼽힝다. 안타깝게도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그는 우리 근대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참고자료 1 : 김유정 연보> 

1908.1.11 김춘식ㆍ청송 심씨의 차남으로 출생(2남 6녀 중 일곱째), 본관은 청풍. 김유정의 아명은 멱설이. 유정의 출생지가 춘천인지 서울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서울인 듯 함.
1915(7세) 어머니 돌아가심(3.18)
1916(8세) 서울집의 이웃 글방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  이후 1919년(11세)까지 4년간 한문을 배움.
1917(9세) 아버지 돌아가심(5.23), 이후 형 유근의 방탕한 생활로 재산이 탕진되기 시작함.
1920(12세)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 입학
1921(13세) 재동보통학교 3학년 월반
1923(15세) 재동보통학교 4학년 졸업(제16회).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4.9), 가세가 기울어 전전.

1924(16세) 말더듬 교정소에 다님
1926(18세) 휘문고보 4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낙제함.
1928(20세) 형 유근은 가산을 탕진하고 춘천실레마을로 내려가고, 유정은 봉익동 삼촌댁에 가서 얹혀지냄.

1929(21세) 휘문고보 5학년 졸업(제7회 통산21회).  박록주에게 열렬히 구애하기 시작함. 
1930(22세)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4.6)하였으나 제적당함. 춘천으로 내려감. 들병이들과 어울려 무절제하게 생활. 늑막염 발병(가을)
1931(23세) 보성전문학교 입학(4.20). 학교에 다닌 흔적은 없음. 춘천 실레마을에서 야학당을 엶. 이후 농우회로 개칭
1932(24세) 농우회를 금병의숙으로 개칭하여 간이학교로 인가받음. 소설 <심청> 탈고.
1933(25세) 서울에 올라가서 누이 유형에게 얹혀 지냄. 폐결핵 발병. 소설 <산골나그네> , <총각과 맹꽁이]> 발표.
1934(26세) 소설 <소낙비>(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노다지>(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가작 입선) , 구인회에 후인 동인으로 가입.
1936(28세)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로 투병 생활.  박봉자에게 열렬히 구애하였으나 거절당함. 
1937(29세) 신병이 악화되어 경기도 광주 다섯째 누이 유홍의 집으로 거처를 옮김. 안희남에게 마지막 편지 < 필승전> 씀 3.18)

1937.3.29 세상을 떠남(06:30) 화장하여 한강에 뿌림. 
1938 단편집 [동백꽃] (삼문사) 발간
1968 김유정념사업회 발족 [김유정전집] (김유정기념사업회, 현대문학사) 발간. 김유정문인비(김유정기념사업회, 춘천의암호반) 건립
1969 [봄ㆍ봄] 영화화(제작 태창흥업, 감독 김수용)
1975 [봄ㆍ봄] 연극화(제작 극단혼성, 각색 신명순, 연출 최지웅, 춘천 강원도립문화회관 공연)
1978 김유정기적비(춘천, 실레마을 금병의숙 터) 건립
1984 [땡볕] 영화화(제작 화천공사. 감독 하명중)
1987 [원본 김유정집] (전신재, 한림대출판부) 발간
1994 문화체육부 주관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됨.  김유정 동상(김유정기념사업회, 춘천문화예술회관) 건립. 김유정 문학비(김유정기념사업회, 춘천조각 공원) 건립.
1995 한국현대문학표징(한국문인협회ㆍSBS문화재단, 춘천 실레마을 금병의숙터) 설치
1996 김유정선생유적지 조성 추진위원회(춘천시주관) 발족
2002 김유정문락촌 개관 
 
       - 기행문학에서 옮김 -

 

 

<참고자료 2 : 필승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렬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채리지 않으면 이 몸을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조력하여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있는 걸로 한 둬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허거든 네가 적극 주선하여 돈을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엎집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드렸다. 나로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3월 18일」



의암 호반의 김유정문인비, 공지천 조각공원 안의 김유정문학비  

   춘천이 김유정의 고향이고 그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준 곳이라 조형물, 자료방 등 김유정을 추모하는 흔적들이 시내와 시 외곽에 분포 되어 있다. 삼악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의암댐 호수가에는 김유정 문인비가 지리하고 있다. 삼악산과 호수에 어울린 문학비는 더욱 그를 그리워 하게 한다.

   김유정 문인비는 1968년 5월 29일, 예총 강원도 지부와 김유정 기념 사업화 주관으로, 그를 아끼던 문우들이 모인 가운데 세워졌다.
문인비가 서 있는 위치는 그가 자주 강에 나와 삼악산을 관망하던 자리로, 고향을 떠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밤낚시를 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왼쪽 대석 비면에 '산골나그네'의 일절과 짧막한 행적기가 새겨져 있다.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가! 앞뒤 울타리에서 부수수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밑에서 들리는 듯 나직나직 속삭인다. 더욱 몹쓸건 물소리. 골은 휘돌아 맑은 샘은 흘러내리고 야릇하게도 음률을 읊는다. 풍! 풍! 퐁! 쪼록풍!

 

 



  김유정문인비 바로 왼쪽 옆 수풀 속에 김유정선생 행장비가 있다. 김유정 선생의 가문인 청풍 김씨 가문의 내력과 그의 짧은 일생이 비문 뒤에 적혀 있다.

  또 공지천 조각공원안에 있는 김유정 문학비가 있다. 김유정문학비는 1994년 김유정기념사업회에 의해 건립됐다.(춘천시 삼천동) 강원대 이운식 교수가 제작하고, 글씨는 강원대 황재국 교수가 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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