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김영랑(金永郞) 생가에서 만나는 '찬란한 슬픔'

by 혜강(惠江) 2006. 2. 27.

 

강진


김영랑 생가에서 만나는 ‘찬란한 슬픔'의 봄   

 

 - 남도에 피어난 순수 서정의 세계 -

 

 

글·사진 남상학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남도답사 1번지 강진· 해남 편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진  김영랑 생가를 찾아가는 발걸음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가려면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장성을 지나 광산 나들목에서 호남고속도로를 빠져나간다. 나가자마자 만나게 되는 1번 국도에서 좌회전하여 곧바로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13번 국도로 우회전하여 나주 방향으로 간다.

 

  13번 국도를 달리다가 다시 22번 국도를 만나는 삼거리가 나오면 우회전하여 나주 방향의 22번 국도로 간다. 22번 국도를 따라 나주까지 간 후 나주에서 영암으로 빠지는 13번 국도로 들어가야 한다.  이 13번 국도를 따라 영암을 지나 성전삼거리를 만나면 2번 국도로 좌회전한다. 이 2번 국도를 따라 달리면 강진이다. 강진에서 읍내로 들어가 강진군청 옆에 있는 영랑세탁소를 끼고 좁은 길을 들어가면 막다른 곳에 영랑생가가 있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궁내동 톨게이트에서만 따져도 약 6시간 정도 거리이다.

 

 

 

 

 

  하지만 남도 답사의 경우에는 시간적으로 오래 걸린다는 생각에 앞서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옛 정취에 대한 아쉬움을 앞세워 남도의 황토와 들판, 그리고 나지막한 산등성이의 곡선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 애써 달려간 그곳에는 독특한 조형을 자랑하는 걸출한 월출산과 아담한 사찰들, 그리고 다산초당의 역사적 유적들이 즐비할 뿐더러 후덕한 인심과 푸짐하고 맛갈스런 남도의 맛이 호기심을 더해준다.    

 

  더구나 시를 사랑하는 시문학도들에게는 1930년대 순수서정시를 대표하는 영랑의 체취가 배어 있는 영랑(永郞) 생가가 아담하게 꾸며져 있어 강진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한다. 특히 그의 시는 그가 살아온 남도의 향취를 그대로 담은 순수 서정의 표본이 되기 때문이다.

 

 

지조 높은 삶과 순수 서정의 세계

 

 

 

 

  영랑 생가는 영랑 김윤식이 1903년 출생 때부터 1948년 9월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6년의 세월을 살았던 처소이다.  영랑은 1903년 1월 16일 이곳 강진읍 남성리 탑동에서 김종호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감추어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그해 4월 4일 강진 장날 만세운동을 기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 때 용아(龍兒) 박용철 선생과 친교를 맺었다. 1921년 일시 귀국하고, 1922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청산학원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생가로 돌아온 영랑은 민족 수난의 한과 비애를 달래기 위해 대나무 숲에 싸인 생가의 사랑에서 손수 북을 치면서 시를 읊었다.

 

 


 

 
  1931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선생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시작활동에 참여하여 그해 3월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는』등 4행 소곡 6편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 『영랑시집』을 발간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서정주 등이 일제에 꺾여나갈 때 영랑은 붓을 놓고 지조를 지켰다. 광복을 맞은 영랑은 우익 청년 운동에 정열을 쏟았으며 1945년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7개월간 일했다.  1950년 6·25 동란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은신하였으나 9·28 서울수복 때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아 그 다음 날인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영랑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81편의 시를 남겼으며, 그중 60여 편 정도가 해방 전 강진에 칩거하면서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외면하였으며, 모란을 가꾸며 동백, 대나무 등이 가득한 남성리 집에서 썼다.  그래서 그의 시엔 강진의 풍토와 사투리가 담겨져 있으며, 10편 정도는 민족정신이 많이 배어 있다.

 

  영랑은 1931년 박용철, 정지용등과 중심이 되어 창간한 『시문학』지 1호를 통하여 "동백이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등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그 후 계속 순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다. 1920년대에 걸쳐 대립했던 민족주의 문학과 계급주의 문학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순수 서정시의 형성과 전개에 공헌한 것은 시문학파의 공로가 아니겠는가.

 

 

 

 

 

   영랑의 시는 순수한 탐미주의(耽美主義)적 문학관에 입각하여 섬세하면서도 영롱한 정서를 잘 다듬고 깎아낸 언어와 시형(詩型)에 담은 대표적인 순수 서정시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당시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그의 지향은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에 속한다.

 

 같은 서정이라 하더라도 소월이 북도(北道)의 투박한 사투리로 독특한 가락을 표현했다면, 영랑은 남도의 곱살스러운 방언을 그의 시에 담은 점이 다르다. 그의 시 가운데는 4행시가 많다. 이 역시 민요의 형식에 가깝게 표현하려고 한 의도로 볼 수 있다.

 

 섬세한 정서, 언어의 조탁, 미묘한 음악성을 획득한 그의 시는 분명 우리 순수시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영랑 시의 또 하나의 의미는 부드러운 가락, 정서와 함께 강한 정신의 결기를 들 수 있다. 이 또한 일제에 대하여 창씨개명과 심사참배를 거부한 높은 지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겨울 깊은 밤 비바람은 우루루루

피 칠해 논 옥 창살을 들이치는데

옥 죽음한 원귀들이 구석구석 휙휙 울어

청절(淸節) 춘향도 혼을 잃고

몸을 버려버렸다.

밤새도록 까무러치고해 돋을 녘 깨어나다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 ‘춘향’중 4, 5연 


  1040년 <문장> 에 실린, 모두 7연으로 된 작품이다. 40년대는 일제가 단말마의 발악을 하던 때이다. 우리에게서 국어를 빼앗았고, 심지어는 창씨개명까지 강요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아름다운 노래만을 부를 수가 없었다.

 

  창씨개명을 과감하게 거절한 영랑은 순수 서정의 세계에서 나와 현실과 대결하는 시를 쓰기에 이른다. 이 시에서 춘향은 조국으로, 이 도령은 광복으로, 변 학도는 일제로 대치된다. 원작과는 달리 춘향을 죽은 것으로 처리한 것은 그만큼 시대가 암담했음을 가리킨다. 그러하니 미적 세계를 동경하며 모란이 피기를 기다린들, 봄이 와도 그 봄은 어찌 ‘슬픔의 봄’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강한 그의 결기는 강경이라는 지역의 정신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곳은 다산과 추사, 초의 선사, 혜장 선사 등이 머물다 간 곳이고, 당으로부터 천태종의 민중 불교적 사상이 들어와 터전을 넓힌 곳이며, 강한 남도의 결기가 살아있던 곳이다. 그의 후기 시들에서 보이는 결기는 대체로 이와 관련이 된 듯하다. 전통적인 소재를 통해 절의와 결기를 상징화하였다. 

 

  자신이 살아온 향리 강진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그의 생가의 풍물은 그가 시가 지닌 빼어난 순수서정과 향토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따라서 영랑 생가를 둘러보는 일은 곧 그의 시를 이해하는 길로 통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뜻에서 영랑생가를 찾는 일은 그의 시적 현장을 만나는 일로 바로 통한다.

 

  강진읍으로 들어오면서 길목인 강진중학교 앞 <영랑 로터리>에서 먼저 내방객을 맞이하는 것이 영랑  김윤식의 동상이다. ‘북(北)에 소월이라면 남(南)에는 영랑’이라고 불릴 만큼 그의 시문학사에서의 업적을 평가하여 강진 어귀에 세운 것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강진 거리의 간판에는 ‘모란다방’, ‘모란수퍼’, ‘모란갈비’, ‘모란이피기까지’ 등이 많고, 거리의 이름도 ‘영랑로’, ‘영랑로터리’등 ‘모란’이나 ‘영랑’이란 이름이 들어간 것이 많다. 그만큼 강진 사람들은 이 고장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시작활동을 한 영랑 김윤식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랑 시가 갖고 있는 부드러운 가락이나 맑은 정서들은, ‘물이 거세지 않고, 산은 험하지 않고, 해가 밝고 하늘이 맑고, 땅이 기름진’강진의 풍광에서 빚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강진에서 호흡하며 살고 있는 강진 사람들에게 영랑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으랴.  강진버스터미널에서 영랑로를 따라 10분쯤 걸어가면 영랑사거리가 나오고, 표지판을 따라 2분쯤 가면 바로 영랑생가가 나온다.

 

 

돌담에는 햇발이 속삭이고

 

 

 



  생가에 들어서기 전 제일 먼저 만나는 구부러진 돌담은 그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의 현장이다. 돌담에는 담쟁이덩굴이 뻗어 있고, 남서향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함께 어울려  노는 듯하다. 그 돌담 위로 오래된 은행나무 가지가 운치 있게 드리워 옛집임을 알려준다. 돌담을 들어설 때 웬만한 사람이면 서정이 흠뻑 드러나는 그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을 상기해 볼 수 있으리라.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물씬 드러나는 향토적 서정과 민족적인 운율을 동반한 한편의 영롱한 서정시다. 내용과 형식이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이 작품은 직유를 통해 어떤 간절한 소망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간절한 소망’은 무엇일까?  

 

 

 

 

 
  이 시가 쓰여진 때가 1930년대의 현실임을 상기한다면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는 소망은 역설적으로 화자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불행한 것을 암시하는 것이 되고, 그의 소망은 역설적으로 밝고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임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 때 `하늘'은 그저 예사스런 하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땅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땅이 현실적인 생활의 세계를 의미한다면 하늘은 그로부터 벗어나 아무런 구속 없이 명상하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터전을 의미한다. 김영랑이 소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명상과 평화의 삶이 아니었을까.    아울러 이 돌담들이 늘어선 골목 일대는 그의 시 ‘제야’의 현장이다. 그는 세모(歲暮)의 쓸쓸한 저녁 이 골목에 드리워진 수심을 가눌 수 없어 안쓰러워한다.

 

 

 

 

 

 제운 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버린다

 못 견디게 무거운 어느 별이 떨어지는가.   

 어둑한 골목골목에 수심은 떴다

 가라앉았다 제운 맘 이 한밤이 모질기도 하온가   

 희부연 종이 등불 수줍은 걸음걸이 

 샘물 정히 떠 붓는 안쓰러운 마음결   

 한 해라 기리운 정을 몯고 싸어 흰 그릇에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 비사이다. 

 

  - ‘제야(除夜)’ 전문

 

 

시비(詩碑)에 새긴 ‘모란이 피기까지는’

 

 

 

 

  입구의 넓은 잔디밭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비가 있다. 생가에 들어가기 전 먼저 시비를 세워두고 돌비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새겼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모란이 피기까지는' 전문

 

 

 

 

   이 시는 영랑이 남달리 좋아하던 모란을 소재로 하여 한시적(限時的)인 아름다움의 소멸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비애감을 표현한 작품으로, '모란'은 실재하는 자연의 꽃인 동시에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대유적 기능의 꽃이다.

 

  이 시가 쓰여진 시적 배경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나라 잃은 슬픔과 광복을 기다리는 마음을 모란에 실어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인데, 어떤 이는 한때 그가 사랑했던 무용가 최승희와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의 참담한 심경을 노래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전자는 공적으로 치우친 해석이요, 후자는 사적으로 치우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과 감정에는 공과 사가 복합적으로 겹쳐 있다고 볼 때, 이는 둘 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로되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다. 시의 해석에는 무슨 딱 부러진 정답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어쨌든 영랑 시의 밑바닥을 복합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실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 상실감의 면면을 굳이 말하라 한다면 근원적인 자아와 꿈의 상실, 나라와 주권의 상실, 첫 아내의 죽음을 비롯한 사랑의 상실 등등 실로 복합적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실감과 비애의식이 투사되어 쓰여진 시가 바로 바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그러나 그는 모란이 피는 날을 계속 기다리고 있겠다는 심경을 토로하면서, 그 슬픔이나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기대와 희망의 시간 속에 있기에 자신이 기다리는 봄이 다만 '슬픔의 봄'이 아닌, '찬란한 슬픔의 봄'임을 시인하게 된다.

 

  여성적인 어조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가다리는 이 시는 유미주의적인 순수서정시로서 일체의 관념과 목적의식을 배제한 예술지상주의적 성격의 작품인 동시에 시의 전통적 계승의 면에서 볼 때 김소월을 이어받고 다음에 서정주로 접맥되었다.


  영랑이 가장 사랑했다는 5월이 오면 영랑생가에는 그 크기가 처녀의 얼굴만한 화사한 모란꽃들이 활짝 벙근다. 그것들이 뜨락을 환하게 밝히고 사방으로 향기를 퍼뜨려 벌과 나비를 불러 모은다. 그 향기가 어찌나 진한지 만발했을 때는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 향기를 맡고 천지의 문학 애호가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그러므로 영랑생가의 분위기를 제대로 만끽하려면 모란이 피는 5월에 와야 한다. 그 화사하기 이를 데 없는 모란은 절세미인처럼 도도하고 목숨이 짧아 준비 없이 찾아오는 이를 아무 때나 반기지는 않는다.

 

 

모란 향기 그윽한 안채와 사랑채 

 

 

 


   현재의 영랑생가는 1948년 선생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되면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던 것을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연차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일부 변형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되었던 것을 영랑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1986년 2월 7일부터는 지방 기념물(제 89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초가로 복원된 생가에 들어서자 안채와 나지막한 난간을 두른 사랑채 마루가 있다. 초여름이 되면 마치 시인의 시 구절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인 듯 마당 구석에서 모란이 탐스럽게 피어오른다고 한다.  안채는 <집>, 사랑채는 <북>의 현장이다.

 

 내 집 아니라
 늬 집이라
 하능늘 나르던 은행잎이
 좁은 마루 구석에 품인 듯 안겨든다.
 자고로 맑은 바람이 거기 살었니라
 오! 내집이라

 

  - ‘집’의 일부

 

  이 시에서 보듯, 그는 친구를 불러 모아 풍류를 즐겼다.  특히 <북>은 남도 가락의 멋과 여유를 제대로 승화시킨 절창으로 꼽힌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제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엇머리

잦아지다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 살리는 반주(伴奏)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콘닥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듸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정중동(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人生)의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제 

 

<주> 만갑 - 송만갑(당대의 명창)의 이름

 

- ‘북’ 전문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그의 피에는 남도 예인의 숨결이 배어 있었다. 영랑은 음악에 대단히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원래 그는 동경 유학 때 양악(성악)을 전공하려다 부친의 완강한 반대로 영문학으로 바꾼 뒤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무슨 음악회가 열린다 하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전답을 팔아 올라가야 직성이 풀릴 만큼 양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남도 가락 특히 판소리나 육자배기는 수시로 그의 사랑채 툇마루에 명창들을 불러들여 즐길 만큼 좋아했다. 당시 그의 사랑채를 자주 드나들던 명창들이 바로 임방울 등이다. 그는 이들에게서 소위 ‘촉기’(애이불비의 기름지고도 생생한 기운)의 미학을 배웠다고 한다.

 

  또 그는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음색이 고왔을 뿐더러, 특히 북을 치는 솜씨만큼은 웬만한 고수들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거문고를 즐겨 연주했던 영랑은 여느 시인처럼 노래나 악기를 단순한 소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위의 시에서 보이듯이 북을 잡고 있는 그는 소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는 영랑 시의 한 특징인 음악성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근거라 하겠다.

 

 

 

 

 

  그리고 장독대 옆 모란 밭은 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현장이다. 당시 이곳에는 수십 년 묵은 모란이 여러 그루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서울로 이주할 무렵 주민들이 파가 버리고 지금 있는 것들은 모두 새로 이식한 것들이다. 사랑채 옆의 모란 밭도 임의로 조성된 것이다.

 

  시에서도 드러나듯이 영랑은 살아생전 유독 모란을 아끼고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모란을 영랑의 마음이 투영된 꽃이라고들 한다. 5월 중순이면 생가의 앞마당에는 강진 처녀들의 얼굴만한 모란꽃들이 다투어 피어나 향기가 일대에 진동한다. 그때쯤이면 영랑의 시를 사랑하는 답사객들이 경향 각지에서 벌떼처럼 몰려들어 잉잉거린다. 모란의 향기는 영랑 시의 향기인 셈이다.

 

 

시의 소재(素材)가 된 우물과 장독대

 

 

 

 

  안채 왼쪽으로는 옛날 돌로 쌓은 우물이 제 모습 그대로 있고, 안채 오른쪽으로 장독대와 감나무가 있다. 우물은 그의 시 ‘마당 앞 맑은 새암을’의 현장이다.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먼 하늘만 

내려다보고 계심 같어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 몸 부르심 같어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 ‘마당 앞 맑은 새암을’ 전문
 
  시인의 가족들이 사용했을 우물 뒤쪽을 지나니 안채의 오른쪽에 장광이 나온다. 장광이란 간장, 된장, 김치, 젓갈 등을 담은 독을 놓아두었던 이른바 장독대를 지칭하는 전라도 방언이다.  장독대와 감나무는 전라도 사투리를 감칠맛 나게 구사한 시‘오메-단풍 들것네’(원제는 누이야 내 마음을 보아라)의 현장이 되었다.

 

 

 

 

    ‘오-메 단풍 들것네’ 등 향토적인 언어를 통해 서정시의 영역을 넓힌 시인은 감나무 곁  장광에서 누이가 장독을 여는 모습을 보고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은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래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 ‘오-메 단풍 들것네’ 전문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순수 서정성이 아니다. 이 시는 사투리가 시 속에서 어떻게 구사되고 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 시구를 표준말로 바꾸어 읽어보면, ‘어머, 단풍 들겠네’로 그 시적 감흥이 전혀 달라지고 만다. ‘오매’라는 감탄사와 ‘들것네’등의 어휘를 등장시킴으로써 독특한 전라도 사투리의 묘미를 유감없이 살려 시적 감흥을 한껏 높이 끌어올려 놓은 셈이다.

 

  영랑은 백석(평안도 사투리)·박목월(경상도 사투리)과 더불어 전라도 사투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시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 속에서 "골붉은 감잎"을 날려 보내던 늙은 감나무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지금 있는 자그마한 것은 생가 복원 때 이식한 것이라고 한다.

 

 

작품의 산실(産室)이 된 삶의 현장

 

 

 

 

   영랑이 19살 때 심었다는 사랑채 앞의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 은행나무는 ‘아파 누워 혼자’의 현장이다.  영랑생가의 뒤란 언덕을 채우는 것은 대나무 숲과 늙은 동백나무들이다. 그 중 동백나무는 영랑의 데뷔작인 ‘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의 현장이다.  원래 영랑생가 뒤에는 나이 먹은 동백나무들이 수십 그루 있어 대나무와 함께 사시사철 푸르렀다고 한다.

 

  영랑 생가 이외에도 강진은 어디를 가나 쉽게 동백나무를 볼 수 있다. 옛날 강진에는 집집마다 적어도 한 그루씩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랑은 그의 산문 <감나무에 단풍 드는 전남의 9월>에서 “나는 내 고향이 동백이 클 수 있는 남방임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른 지역의 동백나무들이 대개 4월이 다 되어서야 꽃을 피우는데 반해 강진의 동백나무들은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2월말이면 꽃을 달기 시작하여 3월 중순이면 절정을 이룬다. 그런가 하면 어떤 것들은 일 년 내내 무시로 빨간 꽃을 달고 있다.  그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동백나무 이파리마다에 아침 햇살이 와 닿으면 ‘빤질한 은결’이 어린 아이들의 웃음처럼 깔깔거리는 것이다. 그 ‘빤질한 은결’은 영랑의 마음속으로 투사되어 ‘끝없는 강물’로 굽이치면서 유미주의에 눈을 뜨게 한다.('끝없는 강물') 

 

 

 


    따라서 영랑의 맑고 섬세한 감성은 동백나무를 비롯한 강진의 자연 경관이 키운 것이다. 영랑은 대숲의 곧고 소슬한 정신보다는 동백이나 모란의 풍부한 아름다움을 더 사랑했다.  원래 생가 뒤란에는 이 나이 먹은 동백나무들이 수십 그루 있어 대나무와 함께 사시사철 푸르렀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 뒤뜰 언덕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강경 뜰을 바라보며 ‘언덕에 바로 누워’‘내 마음 아실 이’‘가늘한 내음’등의 작품을 통해 사모하는 마음과 마음의 고독감 등 순수 서정을 노래했고, 멀리 훤하게 트인 강진만 구강포 물길을 바라보며 벅찬 환희를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에 담아 노래했다.  그러나 언덕 위의 대밭과 동백 숲은 한국전쟁 때 좌익 청년들이 불을 질러 거의 타 죽고 서너 그루만이 겨우 남아 있다. 

 

 

 

 

 
  이렇듯 영랑생가는 남도의 큰 서정시인 한 명을 기를만한 풍물과 정취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는 생의 대부분을 이곳에 꼭꼭 숨어서 시를 썼다. 늑대 같은 일경들이 수시로 찾아와 창씨개명을 종용했지만,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결코 응하지 않았다.

 

  그의 표현대로 ‘여기는 먼 남쪽 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두견)이기도 했지만, 그만의 왕국이기도 했다고 할만하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출도 삼간 채 생가의 앞마당을 거닐며 시심을 키우다 보니 생가의 모든 것들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친구가 되지 않았겠는가. 

 

 

 


    질박한 땅. 편안한 나루 강진(康津). 조각칼로 예리하게 파낸 듯 길쭉한 홈이라도 닮은 듯 강진만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고, 완도, 청산도, 보길도에서 걸러진 남해의 바닷바람을 고금도가 한 번 더 막아주어 강진은 평안하다. 또한 동서 양편으로 천관산과 두륜산까지 두르고 있으니 강진의 기름진 들판과 갯벌 역시 거센 풍파 걱정 없이 언제나 평안하다.

 

 

 

 

 

    이곳 만덕산 자락 동백의 숲 속에 백련사가 있고, 또 가까이 다산 초당이 있다. 이들을 포함한 강진편 답사는 국내여행 편으로 미루기로 하고, 고즈넉한 영랑생가를 돌아 나오려니 영랑생가를 포위하고 있는 갖가지 건물들이 유난히 눈에 거슬린다.

 

  멋없이 지어진 주변의 슬라브 건물, 목조가옥, 연립주택. ‘영랑’과 ‘모란’을 따서 지은 빌라, 세탁소, 수퍼 마켙 간판들이 영랑생가를 포위하고 있는 형상이다. 영랑이 시심을 키웠던 생가의 분위와는 전혀 다른 당혹감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