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편운문학관 탐방
‘고독의 시인’ 조병화의 삶과 시(詩)
글·사진 남상학
봄빛이 화사한 날, 햇빛 따스한 봄길을 따라 차를 몰고 안성으로 달렸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에 있는 편운문학관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서울에서 오산이나 용인을 거쳐 이동(송전)에 이른 다음, 계속 외길을 따라가면 곧바로 조병화의 고향인 난실리가 나온다. 용인에서는 45번 국도, 오산에서는 302번 지방도를 타면 된다.
이곳은 안성군과 용인시의 경계선상이다. 다른 방향에서 오려면 고삼이나 양성면 쪽에서 오는 길도 있다. 여기 삼거리에서 송전 방향 쪽의 다리를 건너면 양성면 난실1리다. 야트막한 산언덕, 넓은 평야, 그리고 고기도 살찐다는 '어비리'(이동) 저수지가 펼쳐져 있는 곳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 길가에 '편운재 회관'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가면 마을이 나온다. 마을이 깨끗하고 조용하며 아담할 뿐만 아니라 시인의 생가와 자택이 있어서인지 그윽한 분위기가 감돈다. 길 건너편에는 조그만 쉼터가 있고, 그 안에는 나이 열 여섯에 먼저 간 신랑을 따라 죽었다는 앳된 부인네를 기리는 '전주유씨열녀정문'이 있다. 조병화의 시비는 바로 그 옆에 있는데, 고향 마을 사람들을 찬미하는 그 시 제목은 <우리 난실리>다. 참으로 기교와 가식이 없으며 소박하고 평이한 시이다.
우리 난실리 고향 사람들은 잘 살자는 꿈을 먹고 삽니다.
잘 살자는 꿈을 먹고 살기 위하여 부지런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우며 서로 아끼며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갈 잘 사는 고향 만들기
우리 난실리 고향사람들은 아름다운 그 꿈을 먹고 삽니다.
길은 바로 조병화의 자택으로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조병화의 도서관 겸 서재인 '편운동산'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이 보인다. 바로 옆에는 조병화 송덕비가 있다. 이 난실리 마을은 국내에 몇 안 되는 문화마을 중의 하나다. 이곳 편운동산의 공간을 소개하면, 경내에는 편운조병화문학관, 편운재, 청와헌, 시인 및 조상의 묘소 등이 있다.
편운문학관은 1993년에 문화관광부에 의해 난실리가 문화마을로 지정되면서 국고의 지원을 받아 지은 건물로 조병화문학관에 해당한다. 시인의 저작도서, 그림 및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대지 315평에 연건평 85평 규모의 2층 건물이며, 전시실 3실과 세미나실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는 편운 조병화 선생의 유품 및 친필을 전시하고 있으며, 소장 자료로는 휘호, 서예품, 육필원고, 조각 작품, 테이프, CD자료, 조병화 시집을 포한한 저작도서, 그림, 신문기록 자료, 상장 및 훈장, 작곡 원고, 서간자료 등 많은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편운재는 1962년 조병화 시인의 어머니 진종 여사께서 별세하자 그 이듬해인 1963년에 어머니 묘소 옆에 세운 묘막으로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어머니 말씀을 새겨 넣었다. 시인의 효심을 읽을 수 있는 집이다. 이 건물은 시인이 생전에 정년퇴임 후 작업실로 썼던 혜화동 서재를 원형 그대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청와헌은 1986년 조병화 시인이 인하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정년퇴임한 후 기공하여 이듬해 완공하여 집필실 및 화실로 사용하던 시골집. 들판가의 집이어서 개구리 소리가 요란히 들려 '청와헌'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청와헌 뜰에는 "꿈의 귀향"이라는 묘비(시비)가 있다. 그는 일찌감치 고향에 자신의 묘비를 세우고 ‘꿈의 귀향’이라는 시를 새겼다. 1998년 세웠고, 시인의 뜻에 따라 2003년 4월 25일 시인의 49재에 제막했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 '꿈의 귀향'
라고 새겼다. 이곳 난실리 마을의 편운동산은 조병화 시인에게는 시의 산실이나 다름없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유년시절의 꿈을 키웠다. 그가 문단에 등장하고 나서 시인의 약력과 문단 활동은 어느 누구보다 화려했다. 독자도 많았고, 따르는 제자들도 많았다. 이는 그의 문학적 재능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가진 인간적 풍모 때문이었을까.
시인은 1921년 5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서 부친 조두원(趙斗元)과 모친 진 종(陳 鍾) 여사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미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43년 3월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이과에 입학하여 물리, 화학을 공부하다가 일본의 패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45년 9월부터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수로 교단생활을 시작한 그는 인천중학교(6년제) 교사, 서울중학교(6년제) 교사로 재직하면서, 1949년 첫 시『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산호장, 1949)을 출간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아울러 중앙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서 시론을 강의하다가 1959년 서울고등학교를 사직하고 경희대학교 교수(문리대학장, 교육대학원원장 등 역임), 1981년부터 인하대학교 교수(문과대학장, 대학원원장, 부총장 등 역임)로 재직하다 1986년 8월 31일 정년퇴임했다.
이와 같은 교육과 문학의 업적을 인정받아 중화학술원(中華學術院)에서 명예철학박사, 중앙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캐나다 빅토리아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상, 198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및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그는 이러한 상금과 원고료를 모아 후배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1991년 편운문학상(片雲文學賞)을 제정했고, 2004년까지 42명의 시인, 평론가들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그는 여러 직함을 역임하면서 그동안 세계시인대회 국제 이사, 제4차 세계시인대회(서울, 1979) 대회장을 겸임했다. 아울러 그는 이 세계시인대회에 한국대표 또는 단장으로 수차에 걸쳐 참석해 왔으며, 이 대회에서 추대된 계관시인(桂冠詩人)이다. 또한 국제 P.E.N. 이사로 1970년 국제 P.E.N.서울대회에서는 재정위원장을 역임했다.
유독 베레모와 파이프를 애용했던 조병화 시인은 무릇 시는 `영혼이 잠자는 집'이라며 현실은 현실로, 시는 시대로 따라 살다 간 우리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인 동시에 보기 드믄 순수 시인이었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도 겸하여 유화전과 시화전 등 초대전을 여러 차례 가졌다. 그의 그림은 그의 시세계와 흡사하여 아늑한 그리움과 꿈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는 이를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그의 시의 특징은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인간의 숙명적인 허무와 고독이라는 철학적 명제의 성찰을 통하여 '꿈과 사랑'의 삶을 형상화한 점에 있다. 김소월이 전원의 서정을 바탕으로 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데 비하여 그는, 외로운 도시인의 실존적 모습, 허무와 고독으로서의 인간존재가 꿈과 사랑으로 자아의 완성에 이르는 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잊어버려야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그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 <하루만의 위안(慰安)>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만남의 연속된 반복, 그 속에서 스스로의 위안과 보람을 찾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특히 그의 시는 이해하기 쉬운 낭만의 언어로 진솔하게 그려낸다. 그런 그의 표현 방식은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대중과 함께 하는 '한국 시단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그는 살아있을 때 늘 이렇게 말했다.
'시라는 고독한 등대 때문에 나는 흔들리지 않는 내 인생을 내 철학대로 후회 없이 살아온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견디는 수단으로 시를 써 왔습니다. 내 개인적인 운명이 주는 고독과 내가 처하고 있는 한국적 역사의 비극이 주는 고독 등이 범벅이 되어 실로 나의 일생은 이러한 고독과 운명, 그것과의 긴 투쟁사였습니다.’
- <편운재에서의 편지> 표지글
조병화 시인은 다작시인(多作詩人)에 숙한다. 그만큼 시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또 교단생활과 문단활동도 왕성했다. 창작시집 53권이 증명하듯 그의 시에 대한 열정은 남달리 성실했고, 따라서 보기 드믄 다작(多作)에 속한다.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산호장, 1949) 이후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남은 세월의 이삭』(東文選, 2002)에 이르기까지 52권의 시집을 내어, 한국 시문학사상 가장 많은 시집을 낸 톱의 기록을 세웠다. 53권 째의 시집 『사랑이 그러하듯이』는 그의 유고집이다. 또 2주기를 맞이하여 제자와 후배 문인들이 마음을 모아 고인의 유고시집인 제53숙 “넘을 수 없는 세월”(동문선)을 간행했다. 여기서 그의 시집을 간행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의 침실(1952) 제4시집: 인간고도(1954)
제5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1965) 제6시집: 서울(1957)
제7시집: 석아화(1958) 제8시집: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1955)
제9시집: 밤의 이야기(1961) 제10시집: 낮은 목소리로(1962)
제11시집: 공존의 이유(1963) 제12시집: 쓸개포도의 비가(1963)
제13시집: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64) 제14시집: 내일 어느 자리에서(1965)
제15시집: 가을은 남은 거에(1966) 제16시집: 가숙의 램프(1968)
제17시집: 내 고향 먼 곳에(1969) 제18시집: 오산 인터체인지(1971)
제19시집: 별의 시장(1971) 제20시집: 먼지와 바람 사이(1972)
제21시집: 어머니(1973) 제22시집: 남남(1975)
제23시집: 창 안에 창 밖에(1976) 제24시집: 딸의 파이프(1978)
제25시집: 안개로 가는 길(1981) 제26시집: 머나먼 약속(1983)
제27시집: 나귀의 눈물(1985) 제28시집: 어두운 밤에도 별은 떠서(1985)
제29시집: 해가 뜨고 해가 지고(1985) 제30시집: 외로운 혼자들(1987)
제31시집: 길은 나를 부르며(1987) 제32시집: 혼자 가는 길(1988)
제33시집: 지나가는 길에(1989) 제34시집: 후회 없는 고독(1990)
제35시집: 찾아가야 할 길(1991) 제36시집: 낙타의 울음소리(1992)
제37시집: 타향에 핀 작은 들꽃(1992) 제38시집: 다는 갈 수 없는 세월(1992)
제39시집: 잠 잃은 밤에(1993) 제40시집: 개구리의 명상(1994)
제41시집: 내일로 가는 밤길에서(1994) 제42시집: 시간의 속도(1995)
제43시집: 서로 따로 따로(1996) 제44시집: 아내의 방(1997)
제45시집: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97) 제46시집: 황혼의 노래(1997)
제47시집: 먼 약속(1998) 제50시집: 고요한 귀향(2000)
제51시집: 남은 세월의 이삭(2002) 제52시집: 남은 세월의 이삭(2002)
제53시집: 사랑이 그러하듯이(200)
그의 많은 시집이 그대로 최상의 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다작(多作) 중에는 현대 도시생활의 쓸쓸함을 읊은 인생시(도시적 인생파)들, 그러한 시들 중에는 좋은 작품도 꽤 많다. 그만큼 폭넓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리는 슬며시 물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도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 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 “소라”
그가 지닌 초기의 현대 도시적 음유시인의 풍모는 후기에 와서 많은 변모를 보였다. 즉 경쾌한 터치와 평이한 문맥의 배후에 인간의 운명과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 자신의 호방한 성격과 더불어 그의 시의 독특한 영역과 개성을 쌓아가는, 흔들리지 않는 산악과 같은 시인이었다.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ㅎ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ㅅ가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빛이 쏟아지는 것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처럼 존재론적 허무 속에 살아야 하는 인생,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고 그 희망 때문에 또 살아야 할 존재들인 것이다. 쉬운 일상어와 , 일상적인 문맥을 충분히 활용하여 독자에게 별 부담을 주지 않고 어떤 위안과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점에서 독자의 심금을 울리며, 고립된 현대시와 독자와의 사이에 새로운 다리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그의 지나치리만큼 평이한 그의 작품을 두고 치열한 시정신의 결핍을 지적하기도 한다.
지금쯤 너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가?
죽어간 종달새들이 모여서 다시 사는 마을
태양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
보리밭에서
길을 쉬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인간들의 소리가 아주 끊어져버린
먼 그리움의 변두리
시간이 있는 나라와
시간이 없는 나라를 줄지어 흐르고 있는 강물
그 강물의 다리를 건너고 있는 건가!
- “밤의 이야기 9”에서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5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캄캄한 걸 살아온 거다
미움도 사랑도 모두
가난한 풀밭 머리에서 가난한 풀만 뜯다
가난히 쫓겨 다니며
아까운 정들을
캄캄히 살아온 거다
이긴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잡은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가진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죽음으로 직행을 하는 거다
지하 5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 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 밤의 이야기 17
시인은 『밤의 이야기』48장을 묶어 시집을 내면서 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다만 나에게 있어서, 항상 문제 되었고, 문제되어 있는 것은, 시보다도 내 어둠이었고, 어둠이다. (중략)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 하지만, 고독해서 실존(實存)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인 것 같다. 나는 이러한 고독 속에서 보이지 않는 거리를 두고 서로 실재(實在)하고 있는 고독한 이웃의 혼(魂)들을 향해, 걷잡을 수 없는 이 가는 목소릴 또 한 번 전하는 것이다. 허허(虛虛)한 밤처럼”
공교롭게도 나는 대학 시절, 그의 시집 『밤의 이야기』를 분석한 평론 <한국적 허무주의의 고찰>로 모처로부터 신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서구에서 허무주의로 표현되는 '어둠’이 실존(實存)과 관계되는 인간 존재의 것이라면, 한국적인 '어둠'은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측면이거나 도시 서민이 가진 단순한 센티멘탈리즘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밤(어둠)’으로 표현되는 그의 시의 키워드는 역시 '고독'이다. 고독이라는 보편의 정서로 하여 그의 시는 항상 많은 독자를 끌고 다닌다. 그의 시집은 국내에서 뿐남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일본, 중국,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 네덜랜드)에서 25권이나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 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리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 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나
작별을 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우리들의 옛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할
말을 배우며 사세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살자던 시인은 인생의 마지막에 임박하여 투병 중에도 <편운재에서의 편지>를 독자들에게 썼다. 고향 경기 안성의 어머니 묘소에 세운 묘막 ‘편운재’에서 ‘편운재에서의 편지’를 낼 정도로 남달리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해 왔다.
그가 '조각구름(片雲)'이란 뜻의 호를 딴 편지를 틈틈이 쓰기 시작한 것은 1993년 1월 1일부터. 1권은 '나보다도 외로운 사람들에게' (93년 1월 1일~96년 1월 20일), 2권은 '외로우며 사랑하며' (96년 2월 3일~98년 7월 24일), 3권은 '러브레터'(1998년 7월 이후)로 10년간 독자에게 띄운 편지에 해당한다.
먼저 간 아내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 그는 임종이 때가 가까워 오는 것을 예감한 것일까. 제119신에 “85세까지 살 것이란 예상이 빗나가는 것 같다”고 걱정했던 노 시인은 2002년 7월 15일자 마지막 120신에서는 ‘…시간의 적막 속에서 / 속수무책, 온몸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 아, 이 공포, / 콘크리트 같은 적막 속을…’이라는 시로 악화일로의 건강에 대한 심려를 피력했다. “이젠 더 계속할 힘이 없어서 제120신으로 이번 편운재에서의 편지를 마감합니다.”라고, 마지막 글을 남겼다.
마지막까지 독자들과 함께 하려 했던 그의 철저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죽음을 예감한 노시인의 회한과 안타까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생의 허망함과 속절없음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인은 결국 향년 82세로 2003년 3월 8일 오후 경희의료원에서 영면(永眠)했다.
시인은 자신이 죽은 후에 난실리 편운동산에 자신의 문학관은 조성하기로 마음 먹고 이미 착실하게 준비를 했다. 편운재와 청와헌을 단장하고 묘도 단장을 해 놓았다. 이제 편운동산은 고인이 된 자신의 안식처이자 생전의 모습과 일생 문학활동을 하던 모든 것을 집대성한 자리가 되었다.
편운문학관은 조병화 시인의 업적을 기리고, 시인이 독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노래해 온 꿈과 사랑의 정신을 선양하며, 나아가 지역주민에게는 문학공간을 제공하고 문학적 역량을 지닌 청소년들을 발굴하여 문학의 길로 안내하기 위하여 해마다 문학행사(꿈과 사랑의 시 축제, 시낭송대회)를 개최한다.
문학관 앞 잔디밭에 봄을 맞아 꽃 잔디가 곱게 피어나 화사하다. 그의 시적 분위기와 걸맞는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잔디밭 한가운데 설치한 조각 작품도 분위기를 한껏 살려준다. 편운동산을 되돌아 나오는데 한 무리의 방문객이 들이닥쳤다. 뒤꼍에 누운 그는 많은 독자들을 가졌기에 결코 외롭지 않아 보였다. 봄날의 화사한 햇살이 더욱 눈부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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